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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장르가 착각계 였나요? (1) (21/197)

21화. 장르가 착각계 였나요? (1)2021.08.12.

그 한마디가 끝이었지만, 그 말은 곧 내 말을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소설을 읽을 때도 그 여인의 죽음이 안타까웠는데 이제 그녀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기쁘다 보니 환한 웃음이 절로 나오려 하는데 시카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기특한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건 마치...

16549773986459.jpg“나를 설득시키다니 아주 기특해. 우리 해피도 기특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

16549773986463.jpg‘그래. 강아지를 쓰다듬어 줄 때의 느낌이었어!’

16549773986459.jpg“사람을 이렇게 쓰다듬어 주는 건 네가 처음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다. 앞으로도 기특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렇게 쓰다듬어 주도록 하지.”

16549773986463.jpg“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내 머리에서 손 좀 치워줄래?”

16549773986459.jpg“부끄러워 말고 마음껏 즐겨라. 자주 있는 일은 아닐 테니.”

아무래도 시카르는 사람의 표정을 못 읽는 게 확실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보고도 좋아한다고 느낄 리는 없을 테니까. 시카르는 우리가 키안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방문을 여느라 겨우 손을 치워냈다. 키안이 보고 싶어 얼른 방안으로 들어왔지만, 방안은 어둡기만 했다. 등 뒤에서 시카르가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두운 건 질색이었다. 나는 일을 끝내고 쉴 수 있는 밤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낮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위험한 놀이기구는 탈 수 있어도 공포의 집 같은 곳은 결코 못 가는 타입이었다. 잘 때도 깜깜한 게 무서워 불을 끄고 자지 못해서 항상 불을 켜고 자야 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빠져나오기 위해 돌아서려는데 시카르가 나를 붙잡았다.

16549773986459.jpg“괜찮으니까. 겁먹지 마. 비카가 불러낸 어둠의 정령들일 뿐이니까.”

16549773986463.jpg‘비카가 왜 이렇게 방안을 깜깜하게 해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방 안에 예쁜 불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나비 양을 한 예쁜 불꽃들이 나타났다. 그러다 하트 모양을 한 불꽃이 아름답게 번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눈앞에서 펼쳐지는 예쁜 불꽃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바로 코앞에서 펼쳐진 예쁜 불꽃들은 요정 모양을 하고 내 주변을 감싸고 빙빙 돌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있다 보니 점점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며 요정들은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고 키안과 비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비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16549773986484.jpg“내 역할은 여기까지.”

비카는 자기가 도와줄 건 다 도와줬다는 듯 방을 빠져나갔다. 키안은 아직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걸어오더니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16549773986487.jpg“제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단 말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어머니.”

이, 이건 원작에서 키안이 레이독스에게 자신을 구해주고 거두어준 것을 고마워하며 루시와 루이드와 함께 보여줬던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쌍둥이들이 후작저 서재에 불을 모두 끄고 나서 키안이 불꽃을 일으켜 자신을 받아준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이나 조연도 아니고, 하다못해 이곳의 엑스트라도 못 되는 내가 키안에게 이런 인사를 받아도 되는 걸까? 키안에게서 이런 애틋한 사랑을 받는다 생각하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키안은 방긋 웃으며 내게 걸어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16549773986487.jpg“고마워요. 어머니.”

생모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가 어머니 소리를 듣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키안에게 생모를 반드시 찾아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며 키안을 꼭 끌어안았다.

16549773986463.jpg“내게 너무 과분한 인사야. 키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좋은 엄마가 되어주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다 못했는걸.”

16549773986487.jpg“이미 너무 좋은 어머니인걸요.”

그리고 나는 시카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도 와서 같이 안으라는 말이었다.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키안과 잘 지내기 위해서 내 말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게 있다는 걸 떠올린 것인지 마지못해 다가와 다 같이 서로를 껴안았다. 나라고 시카르와 다 같이 포옹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키안과 시카르의 간격을 좁혀야 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란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런 말도 해주면 더 좋겠지.

16549773986463.jpg“우리 가족이 화목하게 잘 살게 해주세요.”

나는 시카르에게 어서 따라 하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는 콧방귀를 끼고는 내 말을 따라 했다.

16549773986459.jpg“우리 가족이 화목하게 잘 살기를.”

말투는 우리 가족이 멸망하기를, 이라고 바라는 말투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했다는 데에 나는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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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시가 가출하는 건 이틀 뒤였고, 아이의 엄마가 사망하는 건 그로부터 또 이틀 뒤였다. 길리언이 키안을 보자고 한 것은 삼일 뒤였기에 우리에게는 딱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난 그동안 키안과 정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고 시카르는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긴 했지만 협조하겠다고 했다. 먼저, 오늘은 키안에게 뜻깊은 이벤트도 받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은 후 후식도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후식은 시카르와 내가 같이 만들기로 했다. 물론 합의한 건 아니었다. 키안과 가까워지려면 이런 것도 해야 한다고 우긴 탓에 시카르가 마지못해 팔을 걷은 것뿐이었다.

16549773986459.jpg“할 일이 태산인데, 주방에서 디저트나 만들어야 하다니. 시간 낭비가 따로 없군.”

16549773986463.jpg“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만큼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니까.”

앞치마를 걸치던 시카르는 듣기 싫다는 듯 나를 향해 등을 돌렸다.

16549773986459.jpg“이거나 묶지.”

앞치마를 차고 있는 악역이라니. 어울리지 않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시카르가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든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공작저에 퍼지는 바람에 안드레아와 할머니, 비카, 듀리온이 차례로 주방을 다녀갔다.

16549774001872.jpg“공작님께서 직접 주방에 다 나오시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공작님, 요즘 주방장이 내온 디저트가 입에 안 맞으셔서 그러시는 거라면 차라리 말씀을 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공작님께서 주방에 나오신 바람에 주방 사람들 모두가 직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공작님.”

16549774001876.jpg“저만한 일로 위기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안드레아. 이제야 시카르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으니 내버려 두어라.”

한편, 듀리온은 시카르가 마신 물컵을 집어 들고는 그 내용물을 의심하고 있었다.

165497740155.jpg“혹시 마님께서 공작님께 정신 지배 약이나 그런 거라도 마시게 한 게 아닙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공작님이 주방으로 들어올 일이 없는데.”

듀리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누가 봐도 시카르가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비카는 듀리온이 찬찬히 살피던 물컵을 뺏어 들며 비릿하게 웃었다.

16549773986484.jpg“이왕이면 마신 게 정신 지배 약이 아니라 즉사를 위한 독약이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워지려고 하네.”

빵을 반죽하던 시카르는 시끄럽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듀리온은 그의 코에 묻은 밀가루를 보며 웃음을 참느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고, 비카는 꼴좋다는 듯 비웃었다.

165497740155.jpg“푸핫! 고, 공작님. 코에 허옇게 묻은 그거, 설마 밀가루입니까?”

16549773986484.jpg“왜 그래, 잘 어울리는데. 직업을 주방장으로 바꾸지 그래? 시카르.”

16549773986459.jpg“시끄러우니까 다들 나가라. 죽여버리기 전에.”

그 말이 살벌하게 진심처럼 느껴졌는지, 비카와 듀리온은 입을 막고 웃음을 참으며 주방을 빠져나갔다. 요리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시카르는 의외로 케이크를 잘 만들었다. 케이크에 올리는 데코까지도 완벽하게 만든 탓에 나는 신기한 눈으로 시카르가 만든 케이크을 쳐다보았다.

16549773986463.jpg“요리를 잘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16549773986459.jpg“주방장의 기억을 좀 봤지. 드림캐처 보다는 이게 훨씬 쉽군. 그리고 난 뭐든 곧장 배운다. 그런 건 타고났지.”

16549773986463.jpg‘그건 나도 알고 있다고.’

시카르는 디저트를 직접 손에 들고 가 키안의 방 테이블 위로 툭 던졌지만, 모형 변화는 없었다. 키안은 시카르를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지만, 내 얼굴을 봐서 먹어 준다는 듯 포크를 들었다. 포크로 한입 덜어낸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간 키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표정을 보니 입맛에 맞는 것이 분명했다.

16549773986463.jpg“맛이 어때?”

키안은 상당히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려다 말고 무뚝뚝하게 기침을 한 번 했다.

16549773986487.jpg“먹을 만하네요.”

이 정도면 매우 맛있다는 말과 똑같았다. 시카르도 키안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16549773986459.jpg“이런 맛은 첨이라 놀랐겠군. 자주 해주진 못할 테니 아껴 먹어라.”

시카르는 거기까지 했으니 제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방을 나갔다. 조금 더 키안와 대화를 나누면 좋았을 테지만, 이만큼 한 것도 그에게는 꽤나 힘든 일이었을 테니 나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16549773986463.jpg“키안. 공작님이 앞으로 케이크 같은 걸 자주 만들어 주실 거야. 방금은 쑥스러워서 한 말씀이시거든.”

16549773986487.jpg“안 만들어 줘도 전 괜찮아요. 주방장이 만들어 준 케이크도 맛있었거든요.”

역시 케이크를 만들어 줘도, 키안의 시선에서 보이는 시카르의 냉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건가. 그래도 매일 무언가를 함께 한다면, 조금 나아지겠지. 키안이 또 뭘 좋아하더라. 맞아. 색종이 접기를 좋아했지.

16549773986463.jpg“키안. 우리 내일은 색종이 접기를 하고 놀아 볼까?”

16549773986487.jpg“색종이 접기요?”

16549773986463.jpg“응. 알록달록한 종이를 접는 놀이인데 매우 재미있을 거야.”

네가 매우 좋아하는 놀이가 될 거란다. 키안. 키안은 아직 그게 뭔지 몰랐지만, 놀이라는 말에 약간은 들떠 있었다.

16549773986487.jpg“좋아요. 어머니. 재미있을 거 같아요.”

16549773986463.jpg“그럼 내일 보자. 키안.”

나는 키안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방을 빠져나왔다. *** 여긴 어딜까.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내용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문득, 나는 이곳이 옷장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옷장 문이 슬며시 열리며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밖이 환하게 밝아오자 열린 틈 사이로 밖에 있는 누군가의 정체가 보였다. 그것들은 사람 같지 않았다. 어둡고 칙칙한 사람 형체와도 비슷한 괴물들이었다. 괴물들은 내가 옷장에 있는지도 모르고 밖을 서성이며 그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이 옷장에 있는 게 너무 무서웠지만,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저들이 이 문을 잡아당기면 문은 금방 열릴 것만 같아서 너무 불안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며 옷장 문이 활짝 열렸다.

16549773986459.jpg“유라!”

16549773986463.jpg“누…… 누구세요……?”

곧 드러난 얼굴은 시카르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16549773986463.jpg“시카르……?”

16549773986459.jpg“그래. 나다. 이리로 나와.”

16549773986463.jpg“시…… 싫어…… 바, 밖에 괴물이 많아. 나갈 수 없어.”

16549773986459.jpg“네가 다시는 이런 꿈을 꾸지 않게 내가 도와줄 테니 나와라.”

16549773986463.jpg“시…… 싫어…… 나, 나는 못 가!”

시카르는 내 팔을 잡아당겼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이 무서운 옷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력한 두려움이 나를 막고 있었다. 그는 몇 번 더 나를 잡아당기다 포기한 듯 내가 있는 옷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어디서 가져왔는지 옷장 안에 랜턴을 놔두었다.

16549773986459.jpg“옷장 밖을 무서워하는 네 정신이 너무나 강해서 밖으로 나가게 할 수가 없군. 그렇다면 이 기억이 좋은 기억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시카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안으며 날 바라보았다.

16549773986459.jpg“이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름답고 좋은 기억으로.”

그리고 시카르는 곧장 내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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