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장르가 착각계 였나요? (2)2021.08.16.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번쩍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 놀라 숨을 고르고 있는데 내 손을 잡고 있는 손길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시카르가 나른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그와 키스하는 꿈을 꾼 탓인지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걸 보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와 입을 맞춘 꿈을 다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라고 생각할까. 꿈에서 자신과 키스했다고 자길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또 그러겠지? 일단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뭐, 뭐야?! 너?!”
시카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내 손을 놓았다.
“또, 그 옷장 꿈을 꾸고 있길래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려고 들어가 본 거다. 그런데 네 두려움이 너무 강해서 그 옷장에서 끌어낼 수가 없더군. 그걸 극복해야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데 말이야.”
그럼 그게 시카르가 내 꿈에 들어온 거였어?
“너, 꿈에도 들어갈 수 있어?”
“나는 정령을 불러내진 못하지만, 존재하는 정령은 정신은 지배할 수 있다. 꿈의 정령이 네게 꿈을 꾸게 있게 하면, 나는 그것을 통해 타인의 기억에 침범할 수가 있다. 물론, 시타르족이라고 해서 나처럼 모든 정령의 정신의 지배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은 너도 알겠지.”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 그럼 혹시 나한테 입을 맞춘 게 너야?!”
“네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옷장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그 방법은 말곤 없었다. 내가 계속 입을 맞춰준다면 점점 그 꿈도 좋은 기억으로 바뀔 테니까.”
응? 더 악몽이 될 거 같은데. 남의 악몽 속에 들어와 더 악몽으로 만들었다고는 생각 못 하는군.
“특히 너처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악몽을 꾸는 사람은 악몽의 정령에게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지. 네가 그 꿈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앞으로 꿈속에서 계속 입을 맞출 생각이다. 그럼, 이제 아름답고 좋은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
시카르는 자신이 내게 키스를 하면 내 악몽이 아름답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이제 더는 악몽이 안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완전 순전히 자기 생각이잖아?!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놈은 정말 완전히 미친놈이 분명하다.
“다른 방법은 없어?”
시카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로 넘겼다.
“그렇게 부끄럽나? 얼굴이 잘 익은 딸기보다도 빨개졌군. 너무 좋아하진 마라. 그건 꿈이지. 실제가 아니니까.”
이, 이게 넌 좋아하는 걸로 보이냐? 시카르가 실제는 아니라곤 했지만, 입 맞추던 그 감각은 정말 실제 같았다. 그래서 너무 놀란 나머지 잠에서 깬 것 같기도 하니까.
“아무래도 그 드림캐처라는 거 말이야. 하나 더 만들어야겠군. 키안뿐 아니라 너도 필요한 것 같으니까.”
그게 효과 있으면 나도 진작 달았겠지.
“근데, 그거 효과 없어. 미신이라서.”
“그런데 왜 키안에게는 그런 걸 만들어 주라고 한 거지?”
“키안은 아이잖아. 악몽으로부터 지켜주는 드림캐처가 있다고 믿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았어. 아무래도 의지가 되지 않을까 해서.”
“네 말도 일리는 있군. 그럼 네 꿈속엔 내가 계속 들어가야겠다.”
“이…… 입 맞추러……?”
“난 네 악몽을 없애러 가는 건데 넌 입을 맞추러 간다고 생각하는군. 엉큼한 녀석.”
“누, 누가 엉큼한데?!”
“또 얼굴 벌게지는군. 넌, 정말 엉큼해.”
키스는 자기가 해놓고 나더러 엉큼하대! 이거 설마 장르가 착각계였나? 악역이 툭하면 착각하고, 막 그런? 아니야. 분명 그건 아니었어. 이 소설은 아주 치열한 왕위 쟁탈 소설이었다고!
“참, 어제 네 기억에서 봤는데, 색종이 접기를 하자고 했더군?”
“키안이 좋아하는 놀이라 그래.”
“주인공이 색종이 놀이 같은 걸 하다니. 한심하군.”
시카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는 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공작저의 후계 수업을 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흔한 귀족 자제들이 하는 놀이 수업도 배우지 못했고, 왕립 아카데미도 가지 못했다.
“우린 어린 키안을 평범한 아이들과 같이 정서적으로 밝게 키우는 것이 목표니까. 그리고 색종이 접기는 내가 잘하는 거니까. 자신 있어!”
“아이들과 할 만한 놀이가 뭐가 있는지 좀 봐야겠다.”
시카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으며 집중했다.
“색종이 접기는 어렵지 않겠고, 수수깡 놀이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안 그래도 키안이 조금 더 크면 그런 놀이도 할 생각이야. 지능 발달에도 좋거든.”
“이미 지능이 높은 키안에게 이런 걸 가르칠 필요가 있나?”
“이건 정서 지능에 좋으니까. 이 시기부터 키안의 정서 지능은 좋지 못했어. 너무 외롭게 자랐거든.”
거기까지 말해놓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는 주인공보다도 더 외롭게 자란 인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준 적 한번 없고 웃어본 적조차 한번 없는, 철저하게 고독한 인물이었다. 다행히 시카르를 힐끗 쳐다봤지만, 그는 내 기억을 읽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시카르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듯 무섭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밖에 있는 장미를 보라고 한 것 같은데, 근래 잘 안 지키고 있는군?”
내가 무슨 소설 속 캐릭터냐고. 매일 장미꽃을 보며 마음을 다잡게! 그런 건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그만큼 주인공의 오기와 끈기를 보여주기 위해 다루는 설정인데! 어쨌든 그래서 나는 되먹지도 않는 변명을 댔다.
“이젠 나 좀 도도해진 것 같아서…….”
역시 통하지 않았다. 시카르는 잡았던 내 손을 놓지 않고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내가 이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난 항상 발에 밟히는 잡초를 보며 각오를 다잡았었다.”
나도 안다고.
“그러면 결심이 흔들릴 일도 없지.”
그게 다 보여주기식 설정이라니까? 시카르는 창문을 열고 나를 창가 앞에 세운 후 내가 꼼짝도 할 수 없게 내 뒤에 서 있었다.
“지금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보여도 매일 보다 보면 언젠간 저 붉은 장미를 닮아있는 네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랑이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다 보면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한마디로 독해지라는 말을 거창하게 하는 거잖아.”
“모든 각오는 거창한 법이니까.”
“알겠으니까. 이제 좀 비켜줘. 너 지금 온몸으로 나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숨 막혀.”
사실은 시카르가 등 뒤에서 기습하며 사람을 죽일 때나 쓰던 포즈라 무서웠다. 이렇게 조여 들어오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숨이 막힌다고? 듀리온 말로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힐 만큼 좋다던데, 정말 그런 건가 보군.”
“아니, 난 그냥 숨이 막힌 거야.”
“넌 참 별종이란 말이야. 다들 나를 보고 무서워하는데, 너만 당돌하게 나를 좋아하니까.”
“…….”
“더 늦기 전에 이만 식사하러 내려가지.”
목숨 부지하려면 차라리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게 낫다 싶으면서도, 한 번씩 끓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조용한 식사를 끝난 후, 시카르는 곧장 업무를 보러 갔고, 키안은 비카와 함께 정령 놀이에 들어갔다. 요즘 키안은 오전마다 비카와 함께 정령 놀이를 가장한, 정령 수업을 한다고 했다. 시카르의 말로는 그렇게 하면 정령사로서 키안의 능력이 더 빨리 향상되고 자신의 저주를 풀 시간도 더 빨리 온단 이유에서였다. 그동안 나는 하인들에게 색종이를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포근한 발코니에 앉아 여유 있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오래 만끽하기 위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내게 메이리가 조심히 말했다.
“마님. 공작님께서 도련님의 놀이방으로 모시라고 전하셨습니다.”
“놀이방이라고?”
“네. 공작님께서 도련님의 놀이방을 만들어 주셨어요.”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시키지도 않은 걸 했단 말인가? 그것도 놀이방을? 업무를 보러 간다는 게 키안의 놀이방을 만들기 위해서였어? 근데, 놀이방을 만들었다고 하면 뭔가, 감동적인 기대감이 들어야하는데 왜 이렇게 불길하지?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라. 메이리.”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 공작저에는 시카르의 수련의 방이 있는데, 그곳은 마치 또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훈련과 수련이 가득한 곳이었다. 설마, 그런 혹독한 방을 키안의 놀이방으로 만든 건 아니겠지? 아니면 공포의 집을 만들어 놓고 놀이방이라고 한다던가?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뛰다시피 걸어가 키안의 놀이방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행히 시카르가 가끔은 제정신이 드는 모양인지 키안의 놀이방을 수련장으로 만들진 않았다. 오히려 현대의 놀이방과 비슷하게 만들어둔 모습이었다. 내 기억을 읽고 현대의 놀이방을 재현한 걸까? 호기심과 함께 찾아온 설렘으로 나는 놀이방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방 한쪽에는 작은 공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키안의 아지트가 되어줄 작은 텐트와 각종 모형 블록들과 곰돌이 등의 인형이 있었다. 내가 감탄한 표정을 보던 시카르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올렸다.
“어때? 볼만한가?”
당연히 볼만하지. 나는 너무너무 감탄했다는 듯 두 손을 모으며 시카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한 거야?”
“네 기억을 보니 어린아이들 놀이방이 이렇게 되어 있더군. 블레이크가 공자의 놀이방에 걸맞게 말이야.”
키안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공작저의 품위를 만든 놀이방이었구나. 그래도 괜찮았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키안을 즐겁게 해줄 테니까. 그래도 뭐, 놀이방이라고 해서 귀신의 집처럼 꾸민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너무 잘 꾸미기도 했고.
“키안이 매우 좋아할 거 같아.”
“그럼 이제 키안을 부르라고 해야겠군.”
“이왕이면 비카와 듀리온도 불러주면 좋겠어.”
시카르는 동의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둘은 왜?”
“아이들은 여러 사람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거든. 우리 둘보단 비카와 듀리온도 함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은 키안과 함께 놀아줄 사람이 그 둘 뿐이니까.”
“어려울 거 없지.”
시카르의 부름을 받고 온 비카와 듀리온은 방 안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맨날 칼, 도끼, 창 같은 것들을 다루고 보던 악역들이라, 이런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처음 봐서 그런지 반응이 해괴했다.
“방 꼬라지가 왜 이래?”
“공작님. 이건…… 새로운 신종 토템들입니까?”
시카르는 두 사람의 반응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모두 앉아서 이거나 집어라.”
두 사람은 이번엔, 눈앞에 놓인 색종이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반응은 각각 달랐다, 비카는 기막혀했고 듀리온은 조금 신나 했다.
“뭐? 나더러 종이 따위를 접으라고?”
“이거 혹시 사람을 저주할 때 쓰는 물건입니까?”
“놀이다. 키안과 함께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놀이.”
“재미있는 놀이라고? 결혼하더니 정말 이상해졌군.”
“비카, 재미있는 놀이라고 하잖아. 언데드라도 소환하는 놀이 같은데?”
시카르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듯 제 이마를 짚으며 비카와 듀리온을 향해 색종이들을 던졌다. 비카와 듀리온은 시카르가 던진 색종이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잡았다.
“키안과 함께 하는 놀이다. 얌전히 앉아서 내가 하는 거 보고 종이나 접고 있어라.”
“쳇. 140년 인생 중 가장 쓸모없는 놀이를 하게 생겼군.”
듀리온은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시카르와 비카를 쳐다보다가 눈을 몇 번 껌뻑이고 난 후 색종이를 집어 들었다.
“정말, 그냥 종이접기를 하라고요?”
그래. 이 악역들아. 그냥 종이접기를 하는 거라고! 태어나서 이런 동심을 접해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겠지. 비카와 듀리온은 정말 이런 건 접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두 눈을 치켜뜨며 보고 있는 시카르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던지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손에 든 색종이를 야무지게 접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카르는 하인을 불렀다.
“가서 키안을 데려오도록 해라.”
“네. 공작님.”
드디어 키안이 이 방을 보겠구나. 키안이 이 방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너무 궁금하고 설레어서 가슴이 두근 거렸다. 키안이 싫어하진 않겠지? 제발 기뻐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너무 떨리는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어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시카르를 보며 말했다.
“시카르…… 나 지금 너무 떨려…….”
시카르는 내 말을 듣고 조금 움찔하더니 이내 곧 비카와 듀리온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내가 좋아도 비카와 듀리온이 보는 데서까지 그렇게 티 낼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
또, 왜 이래. 그러고 보니 비카와 듀리온이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지금 시카르를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시카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대답했다.
“원래. 유라는 나만 보면 떨려 하지.”
‘그건 두려워서 떠는 겁니다.’
그러자 비카는 쯧쯧거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거리며 ‘취향 참 독특하신 마님이라니까.’라고 했고, 듀리온은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아니, 정말 그런 게 아니라고!’
단체로 착각에 빠진 이 악역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