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장르가 착각계 였나요? (4)2021.08.23.
“키안. 넌 참 좋은 아이구나. 공작님께서 속으로는 아주 기뻐하고 계실 거야.”
키안은 무엇보다 내게 칭찬을 받은 것을 기뻐하는 듯 보였다. 키안은 코를 슬쩍 만지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가 기뻐하시니 저도 기뻐요.”
손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시카르는 다시 색종이를 접었고 우리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목표한 것을 모두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된 것들은 모두 유리 상자 안에 넣어서 천 마리의 학은 키안의 방으로, 천 송이의 장미꽃은 내 방에 두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키안의 방을 찾은 나는, 키안이 학을 담아둔 상자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을 봤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그저 키안의 소중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기도를 끝낸 키안에게 조금은 시카르가 점수를 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봐. 키안. 이 학은 공작님과 내가 함께 만든 거고, 저 드림캐처는 공작님이 만들어 주신 거야.”
키안은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듯 나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어머니. 전 정말 운이 좋은 아이인 거 같아요.”
그래도 아까 동상에 걸린 시카르의 손을 해동해주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풀렸나 싶었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키안. 공작님에게서 나는 느낌이 어때?”
키안은 사실대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내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음……. 차가워요.”
키안보다 시카르가 마음을 열게 하는 게 더 우선인 걸까.
“키안. 그래도 간혹 냉기가 흘러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이 차가운데 좋은 사람이 있다고요?”
“응. 마음은 차갑지만, 생각은 바른 사람들이 있어. 공작님도 그런 사람이야.”
“공작님이 정말 그런 분이에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묻는 키안의 순수한 눈망울에서 나는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어쨌든 키안이 필요한 이상 시카르가 키안을 해치진 않을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이지. 지금은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언젠가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게 되실 거야.”
“정말 그럴까요?”
“그럼. 그러니 넌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돼.”
키안은 글쎄, 라고 하듯 긴가 민가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볼게요.”
나는 키안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난 후,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고 키안은 작고 여린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꼭 감싸 안아주었다.
“잘 자렴. 키안.”
“잘 자요. 어머니.”
나는 키안이 잠들 때까지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길 바라며 배를 토닥여주었다. 목 뒤를 슬쩍 확인하자 여전히 왕족의 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빨리 이 문장을 숨겨야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시간을 보니 지금쯤이면 루시가 집을 나갈 시간이었다. 제발 오늘, 레이독스의 마음이 바뀌기를. *** 레이독스는 유라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믿는다니 우습지만, 혹시나 모르니까.’
그래서 레이독스는 루시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쓸쓸히 복도를 걸어가며 공작부인의 말은 그저 헛소리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레이독스가 잠을 재우느라 자장가를 불러주는 동안 창문을 통해 밤하늘의 반짝이던 별을 보던 루시는 옛날 동화가 생각났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던 한 소년이 추운 겨울날 엄마를 찾으며 길을 걷다 길가에 쓰러지자, 별이 된 엄마가 아이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루시는 자신 역시도 엄마를 찾아 길가를 헤매다 쓰러진다면, 엄마가 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별이 환하게 보이는 날은 엄마도 날 찾기가 쉬울 거야.’
모두 다 잠든 시간. 루시는 집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동화 속에서처럼 정처 없이 걷다 쓰러져야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꼭 오늘 밤이 아니어도, 내일 밤이어도 엄마의 얼굴을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추운 날에 거리를 돌아다니던 루시는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건 루시가 원하는 바였다. 혹한의 날씨의 냉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시의 눈앞으로 무언가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에 루시는 자신의 엄마가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엄마야. 엄마가 날 찾으러 왔어.’
루시는 눈을 떠서 엄마를 보고 싶었지만, 잠을 자듯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길에 쓰러진 루시를 발견한 레이독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시의 체온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레이독스는 루시의 체온이 더 떨어지지 않게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마차에 올랐다. 분명, 루시가 자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왠지 유라의 말이 신경 쓰여서 잠든 루시를 확인하러 갔더니 정말 루시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체했어도 동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나자 루시가 이렇게 된 게 모두 자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탓만 같았다. 시카르는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도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그와 손을 잡고 싶지 않았기에 모른 체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독스는 루시의 방에서 아이가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을 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다이닝룸으로 내려왔지만, 키안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도 증세가 악화된 탓에 대신전에 가 있었고, 듀리온은 우리를 방해하기 싫다며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비카는 원래 다른 사람과 겸상하는 것을 싫어해 혼자서 식사를 했다. 키안마저 없다 보니 아침 식탁에는 시카르와 나 둘 뿐이었다.
“키안은 왜 안 내려와?”
“키안은 비카와 같이 식사 중이지.”
“왜, 우리랑 같이 식사하지 않고?”
“오늘부터 정령 놀이를 하며 식사를 한다는군.”
“정령 놀이?”
“너도 어제 봤겠지. 키안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소설 속에서는 키안이 8살 돼야 정령을 잘 다룰 수 있다고 돼 있지. 하지만, 비카와 함께 정령 놀이를 가장한 정령 수업을 하는 동안 키안의 실력이 나날이 향상되었다.”
시카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어쩌면 그가 이미 이런 것들을 염두하고 키안의 보모로 비카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카르. 부탁이 있어. 키안을 조금만 좋아해주면 안 될까? 너한테서 계속 냉기가 흐른대.”
“어른이 되면 날 죽이려는 놈을 쉽게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리고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다. 네가 자신 있다고 했으니 네가 그 애를 바꿔. 아니면, 나를 바꾸든지. 내 삶을 해피엔딩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냉혈한 같은 놈.
“것보다, 지난밤 루시가 집을 나갔더군.”
“루시를 봤어? 어떻게 확인한 거야?”
“혹시나 해서 어젯밤 후작저 앞을 지키고 있다 보니 레이독스가 헐레벌떡 루시를 찾아 나서더군. 이 한겨울, 한밤에 제 딸이 집을 나가는 것을 봤으니 이제 레이독스도 조금 생각이 바뀌겠지.”
그래서 어젯밤에 듀리온과 함께 외출한 것이었나. 이틀 뒤까지 갈 거 없이 그의 마음이 빨리 바뀌면 좋겠는데. 우리에겐 지금 무엇보다도 키안의 목덜미 뒤에 있는 문장을 빨리 숨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 문장 때문에 아무 데도 가지도 못하고 공작저에 갇혀 지내는 키안이 너무 가여워서 마음이 무거웠으니까.
“참, 그나저나 발리제의 시신은 찾아보고 있는 거야?”
“수색 중인데 설산이라 찾기가 쉽지가 않다. 네 기억 속 소설 장면을 들여다봐도 정확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으니 쉽게 찾기가 힘들군.”
하긴, 원작에서도 몇 개월 걸렸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대충 식사를 끝낸 후 오늘도 키안과 놀아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피곤한 것 같군. 아가시온이 내게 저주를 내렸을 때에도 이렇게 고단하진 않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거지.”
복도를 따라오는 듀리온도 동의한다는 듯 뻐근한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걸어왔다.
“제 말이요. 수련의 방을 다녀와도 이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이틀 동안 색종이 천 개를 접고 나서 기절했지 뭡니까?”
“누가 들으면 너 혼자 다 만든 줄 알겠다. 네놈이 만든 건 백 개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느려터진 놈이 검술은 어떻게 익혔는지 용할 뿐이군.”
“저게 종이를 접는 일이 아니라 종이를 부수는 일이었다면 제가 제일 빨랐을 겁니다.”
“그랬다간, 키안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긴 힘들겠지.”
듀리온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도련님께서는 비카보다도 제게 더 상냥하게 대해주시는데요? 제게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하셨거든요.”
“그나마 키안이 네게는 마음을 여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듀리온은 기분이 좋은지 밝게 미소를 짓다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공작님. 설마 오늘도 그 이상한 종이접기를 할 생각은 아니시죠? 오늘은 눈썰매를 타는 게 어때요? 저기 뒷동산에 내린 눈 때문에 썰매 타기 딱 좋던데.”
그거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이들과는 활동적인 놀이를 하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시카르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눈썰매는 안 된다.”
“그럼, 눈사람 만들기는 어때요. 마당에 눈이 가득 쌓였던데.”
“그것도 안 돼.”
듀리온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째서 안 되냐고 물어보려다 원작 내용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원작에서 키안은 레이독스의 아이들인 루시와 루이드와 눈썰매를 타다가 제 아버지 발리제와의 추억이 떠올라 엉엉 울었었다. 시카르는 그것 때문에 눈썰매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그의 좋은 기억력이 시킨 일일까. 키안을 가엽게 여긴 그의 마음이 시킨 일일까.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키안이 못해본 걸 해볼까?”
“그게 뭔데?”
“점토 놀이.”
시카르를 비롯해 듀리온 역시도 그게 무슨 놀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점토 놀이?”
“점토를 갖고 이것저것 만들며 노는 건데, 아이들 정서 지능 발달에 좋거든.”
시카르는 그게 뭔지 알아보기 위해 내 손을 잡았지만, 듀리온은 자신이 더 수줍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께서 정말 마님을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 제가 보는 데서도 손을 막 잡으시고 말입니다.”
시카르는 듀리온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말문이 막혀서 헛웃음만 칠 뿐이었다.
‘하. 하. 하.’
***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다 비슷한 건지, 키안은 점토 놀이를 꽤 좋아했다. 비카는 시큰둥한 얼굴로 점토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를 뿐이었지만, 이번엔 듀리온도 재미있게 점토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키안은 곰을 만들었고, 듀리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슬라임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비카는 점토 놀이를 같이 하는 시늉만 하듯 손가락으로 점토를 대충 꾹꾹 누르는 것이 전부였다. 시카르는 뜻밖으로 왕관 모양의 점토를 만들고는 그것을 키안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잘 어울리는군.”
키안이 왕좌에 앉았을 때 모습을 상상해보고 있는 건가?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보고 있는 키안을 향해 박수를 쳤다.
“세상에, 너무나 잘 어울려. 어린 왕자님 같아.”
“왕자님이요?”
그럼, 넌 커서 왕이 될 거니까 지금은 왕자지. 나는 비카와 듀리온에게도 동의하지 않느냐는 듯 쳐다보았다. 비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듀리온은 나처럼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러게요. 진짜 왕자가 있다면 우리 도련님 같겠는데요? 멋지십니다. 도련님!”
화기애애엔 분위기 속에 안드레아가 방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공작님. 긴히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긴히 전하겠다는 거지? 그냥 말하라.”
안드레아는 키안을 향해 서한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국왕 전하의 전서구입니다.”
“길리언의 전서구라고?”
시카르는 급하게 서신을 펼쳐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길리언이 내일 당장 키안을 보러 오겠다는군.”
내일 당장이라고? 아직 키안의 목에 있는 문장을 못 숨겼는데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