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장르가 착각계 였나요? (5)2021.08.26.
그럼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점토 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내일 길리언이 오기 전에 키안의 목덜미에 있는 왕족의 문장을 무조건 숨겨야 한다. 그러려면 레이독스를 설득해야 하는데, 아이의 엄마가 죽는 건 내일 오후쯤이다. 만약 길리언이 그전에 오게 된다면 키안의 정체를 숨길 방도가 없다. 나는 이런 와중에도 전서구를 무표정하게 읽고 있는 시카르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길리언이 내일 언제쯤 온대?”
“내일 이곳에서 석찬을 들겠다는군.”
내일 석찬이면 어쨌든 조금의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금 당장 레이독스를 만나러 가 보는 게 좋겠어!”
시카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마침, 그러려던 참이었다.”
우리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모두 놀란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내 아내와 잠시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듀리온은 곧장 마차를 준비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나는 키안에게 다녀올 테니 비카와 놀고 있으라고 말해준 후 유카나다르로 향했다. ***
“요즘 자주 보는군요. 공작님.”
이번엔 레이독스의 반응도 이전과 달랐다. 그는 우리를 반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경계하지도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일 길리언의 근위대가 이곳 유카나다르에서 금발의 아이를 찾는 와중에 아이의 어미를 죽이게 될 것이다.”
“또, 그 예언 얘기를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나는 다음 답변은 내가 하겠다는 듯 시카르를 살짝 저지하며 말했다.
“우리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일 허름한 빈민가에 사는 푸른 눈의 아이를 찾으세요. 정오가 막 끝날 무렵에 근위대가 아이의 집을 덮칠 거예요. 후작님께서는 이곳 영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잖아요. 제발 제 말을 흘려듣지 말아 주세요.”
레이독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허름한 빈민가라고 했습니까? 우리 유카나다르에는 빈민가가 없습니다.”
“아니요. 얼마 전부터 생겼어요. 얼마 전, 폐왕과의 내전 때문에 유랑민들이 늘어났고 갈 곳을 잃은 일부의 유랑민들이 유카나다르로 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폐허로 남은 허름한 마을에서 터를 잡았고 그곳이 빈민가가 됐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게 이미 보고가 들어왔을 겁니다.”
“왜 집사가 보고를 하지 않았는지는 후작님께서도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만.”
레이독스는 흠칫하는 얼굴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유카나다르의 집사는 이전에도 횡령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지만, 레이독스의 장인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다. 나는 레이독스의 표정에서 그가 조금은 흔들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예요. 내일 저녁이면, 국왕이 블레이크 공작저를 찾을 거예요. 키안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저희에겐 후작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소를 했고 시카르는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레이독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래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겠지. *** 다음 날 오후까지도 레이독스에게서 연락이 없자 우리는, 아니, 나는 초조해졌다. 시카르는 마치 남의 일인 듯 무표정하고 나른해 보이기만 했다.
“시카르. 어떡해. 아직 레이독스에게서 연락이 없잖아.”
“제정신이라면 오겠지.”
시카르가 너무 평안해 보이니까 오히려 너무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카르는 아직 연락이 없는 레이독스 보다 자기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키안이 더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키안은 언제까지 내 무릎 위에 둬야 하지?”
“쉿. 잠들었잖아. 깨어날 때까지 둬. 참! 혹시 키안의 악몽은 바꿀 수 없어?”
“신성한 왕족의 정신을 침투할 수는 없지만, 키안이 네게 정신적으로 의지를 하고 있으니 너와 함께 시도해볼 수는 있다.”
“아…….”
“하지만, 키안은 아직 아이라서 그 꿈을 들여다보는 게 조심스럽다. 잘못하면 내게 정신세계를 완전히 장악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
“바보가 되겠지. 바보는 내 저주를 풀어줄 수가 없잖아?”
“하지만, 그래도 왕족이니까 평범한 여덟 살과는 다르지 않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왕족의 꿈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시카르가 날 도와준 것처럼 키안도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또 악몽을 꾸는 건지 키안의 미간이 또 사납게 찌푸려졌다. 그래서 나는 키안의 미간을 펴주었다.
“물 좀 가져오지.”
지금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가? 내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시카르는 제 손을 보라는 듯 시선을 내렸다.
“보다시피 내가 지금 손이 없어서.”
하필 사용인들도 다들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가 원하는 대로 물을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냥 두면 물이 스스로 내 입속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는 건가?”
아, 물까지 먹여줘야 하는 상황이군. 나는 물컵을 들어 실수로 넘어지는 척이라도 하며 시카르의 얼굴에 뿌려주고 싶었지만, 그의 무릎 위에서 얌전히 자고 있는 키안의 얼굴 위에 단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을 먹여주었다.
“얜 왜 이렇게 잠이 많지. 낮잠을 꼬박꼬박 자는 것 같군.”
“그게 아니야. 이맘때 아이들은 다 낮잠을 자는데, 키안이 낮잠을 안 자서 비카가 잠의 정령을 불러내서 강제로 재운 거야.”
“병약하기 이를 데 없군. 나는 이 나이에도 그런 것 따위에는 안 당했는데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키안을 더 행복하게 키워야겠지. 오늘은 정말 낮잠 자기 너무 좋은 오후야.”
“그리고 매우 따분한 오후이기도 하군.”
“초조한 게 아니라?”
“초조해야 하나……?”
“오늘 밤에 길리언이 이곳을 들이 닥칠 텐데, 아직 레이독스에게서 연락이 없잖아.”
“초조해한다고 상황이 바뀌진 않을 텐데.”
너무 인간적인 감정으로 접근했지. 내가. 당장 길리언의 칼날이 제 목을 겨누어도 침착할 시카르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나는 갑자기 목이 타서 시카르가 남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순간 그렇게 물을 벌컥벌컥 마시지 말라던 시카르의 잔소리가 떠올라 그를 슬쩍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 그냥 우리 둘밖에 없어서 내가 이렇게 마신 거니까 좀 봐줘.”
“아무리 여기 우리 둘뿐이라지만, 그렇게 간접키스를 하다니. 역시 엉큼한 녀석이군.”
간접 키…… 이젠 말하기도 귀찮다. 그나저나 레이독스는 정말 오지 않으려나. 초조함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듀리온이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듀리온은 매우 급하게 달려왔는지 조금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공작님! 레이독스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할까요. 죽여버리고 그 목을 가져올까요?”
듀리온이 평소엔 멀쩡하다가 한 번씩 이렇게 악당들이나 할 소리를 할 때는, 정말 악역이라는 게 실감이 날 정도로 살벌하단 말이지.
“아니, 그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이곳으로 불러라.”
“여기…… 서재로요?”
“그래.”
후작저를 오갈 때 마차를 끌어준 듀리온이었지만,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아직 듀리온은 레이독스에게 호전적인 듯했다. 앞으로 우리의 아군이 된다는 것을 알면 펄쩍 뛸지도 모르겠는데. 기다리고 있으니 듀리온이 레이독스의 팔을 붙잡고 끌고 오고 있었고, 레이독스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오고 있었다. 만약 둘 사이를 잘 몰랐다면 레이독스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줄 것을 부탁했겠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느꼈던 적대감을 알기 때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레이독스는 자리에 앉으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님의 말씀대로더군요. 국왕의 근위대가 빈민가에서 금발의 소년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젠 제 쪽에서 묻겠습니다. 제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네 친구이자 그 마법사 놈 제르미 아이커의 도움이다.”
“그 이후에는요?”
“건방지게 내 계획을 묻는 건가?”
“적어도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아차,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있군. 네가 키안에게 직접 왕세자 수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 저더러 왕손을 제 주군으로 받들라는 말씀이 십니까? 전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 네 말은 길리언을 군주로 맞이하겠단 건가?”
“당장, 왕손 저하를 군주로 맞아드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내가 택해.”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한시가 급한데, 이 사람들은 신경전을 하고 있다니. 나는 테이블 바닥을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잠깐! 이렇게 하죠. 먼저 키안을 도와주세요. 그리고 지켜봐 주세요. 길리언이 국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요. 시카르는 한 걸음 물러나 있을 테니까요.”
내 말을 듣던 레이독스는 시카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왕손 저하를 군주에 앉힌 후에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켜보실 생각이 십니까?”
“국정을 잘 이끌어가는지는 내가 지켜봐야겠지.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제르미는 곧 불러드리겠습니다. 밖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왕세자 수업은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카르는 레이독스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르미가 여기 와 있다고? 그랬다면 듀리온이 보고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레이독스는 차분한 얼굴로 창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와 있습니다.”
창가를 보니 하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파닥 거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나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네가 가서 열어라.”
하인을 불러도 되지만, 시카르는 제 부하 다루듯이 레이독스에게 명령했다. 그럼에도 레이독스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익숙한 듯 별 표정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레이독스가 창문을 열자마자 하얀 새 한 마리가 정신없이 파닥거리며 들어오더니 이내 짧은 단발머리를 한 귀엽게 생긴 한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후드 로브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누가 앉으란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제 머리 위에 쌓인 하얀 눈을 털어내며 소파에 벌러덩 앉으며 온몸을 달달 떨었다.
“후아. 공작님. 아, 아, 안녕…… 에취! 안녕, 하셨습니까? 바, 밖이 얼마나 추, 추운지…… 에취! 아십니까? 레이독스가 갑자기 빠, 빨리 오라고 호출을 해서 마, 마차를 탈 시간도 없이 새로 변해서…… 에취! 날아오느라 어, 얼어 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시카르는 제르미의 말이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한 번 휘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차 한잔이요!”
역시 소설 속에서처럼 그는 매우 유쾌하단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르미를 향해 말했다.
“제가 따뜻한 차 한 잔 내어드릴게요.”
제르미는 나를 보며 ‘예’라고 건성으로 대답한 후에 이내 신비한 것이라도 본 듯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다, 당신. 머리 색과 눈 색깔이?!”
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처음이겠지.
“좀 특이하죠? 이국인이랍니다.”
꽤 많이 당황한 모양인지 제르미의 눈빛이 많이 흔들렸다. 레이독스는 한숨을 쉬며 제르미를 툭 쳤다.
“제르미. 당신이라니. 공작부인님이시네.”
네. 그게 바로 접니다. 나는 당황하는 제르미에게 괜찮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듯 미소를 좀 지어주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 공작부인님. 제가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괜찮아요.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전 그럼 따뜻한 차 한잔 내올게요.”
“네. 공작부인님.”
결례라고 말을 해놓고도 제르미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건가? 시카르는 그런 제르미가 못마땅한 듯 작은 잭나이프 하나를 꺼내 제르미가 앉아 있는 소파로 던졌다.
“감히 내 아내를 빤히 쳐다봐? 또 그랬다간 다음엔 나이프가 네 목을 향해 날아들 것이다.”
제르미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너, 너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자신의 권위에 반하는 걸 용서 못 하는 시카르의 성격에 그나마 팔다리가 아닌 소파에 던진 건 키안 때문일 것이다. 제르미도 알겠지. 자칫했다면 오늘 팔 다리 중 어느 것 하나는 못쓰게 될 뻔했다는 것을. 잠깐. 그나저나, 아깐 남는 손이 없어서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저 손은 필요할 때만 나오는 마술 손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