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악역을 다루는 방법 (1)2021.08.30.
메이리를 불러 차를 내오자 레이독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온 차가 뜨거운 듯 후후 불어 마시던 제르미는 당황한 듯 자리에서 벌떡 따라 일어섰다.
“왜 먼저 가는 거야? 너, 공작님께 날 팔아먹기라도 한 거야? 얼마에 팔았어? 너 그 돈 나중에 나랑 꼭 나눠!”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이만 가려는 거다. 안 팔았으니 걱정 말고.”
“그럼 난 왜 부른 거야?”
“그건 공작님께서 차차 설명하실 거다.”
“그래? 어쨌든 너 나중에 내 출장비 챙겨줘야 해? 나 여기까지 날아오느라 마력 소비를 꽤 많이 했다고!”
“그 돈은 내가 챙겨 줄 테니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도록.”
부산한 분위기를 깨는 시카르의 무거운 중저음에 제르미를 뒤를 돌아보곤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공작님.”
제르미가 더는 붙잡지 않자 레이독스는 이만 가보겠다는 듯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후작님.”
시카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슬쩍 끄덕여주었고 레이독스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공작님께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십니다.”
시큰둥 하던 시카르도 그제야 레이독스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가 봐.”
시카르로서는 최선으로 예의를 갖춘 인사였고 레이독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시카르와 레이독스가 주고받은 눈빛은 마치, 육아에 시달리는 부모들만이 통하는 눈빛이었다. 레이독스는 공작저를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서재를 나갔다. 레이독스가 나간 후 초조했던 나는 곧장 제르미에게 말했다.
“저희가 마법사님을 부른 것은 저희 아들의 목 뒤에 있는 문장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제르미는 내 말을 듣자마자 공중에 무언가를 그리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
“문장이라면, 혹시 문신 같은 걸 말 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한, 2천 실링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문신 같은 것 따위가 아니다. 이 아이를 보거라.”
시카르는 제르미가 목 뒤에 있는 문장을 볼 수 있게 키안을 안으로 안아 들며 자세를 잡았다.
“이 문장을 지워라.”
키안의 목 뒤에 있는 왕족의 문장을 본 제르미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고, 공작님. 그런데, 왜 여, 여기 왕족의 문장을 가진 아이가 있는 거죠? 현재 레카도르에 존재하는 유일한 왕족은 길리언 국왕 전하뿐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아이가 정말 왕족입니까?”
“네 불친절한 친구 놈이 설명을 안 한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레이독스 놈에게 물어보고 넌 이것부터 처리해라.”
“이 분이 정말 왕족이라면 제가 어찌 감히 이 존귀한 몸에 손을…….”
“이거 하나만은 알려주지. 이 아이는 베로니아의 자식으로 현재 레카도르에 존재하는 유일한 왕손이다.”
“베로니아 공주님이 생산하신 왕손 저하시라고요?”
“그래.”
제르미는 꽤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곳에 왕손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러다 곧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잠든 키안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와, 왕손 저하! 한때 왕궁 수비대의 중대장이었던 제르미 아이커 인사드립니다. 저하!”
제르미도 저럴 땐 꽤 진지했다. 폐왕의 즉위 시절 왕궁 수비대의 중대장이었던 제르미는 수비대장직을 앞두고 왕궁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5층짜리 탑에서 살고 있었다. 제르미가 시끄럽게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시카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니까 깨우지 마라.”
“아, 예. 예. 죄송합니다. 공작님.”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이것부터 제거해.”
“왕실의 표식이 되는 문장이라, 제거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게 감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왕족의 문장인 만큼 숨기려면 꽤 많은 마력이 들어가고, 제가 그 마력을 다시 모으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마정수를 사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말이었고, 시카르는 귀찮으니 알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5만 실링을 주지.”
5만 실링이라 함은 이곳의 있는 마정수를 10개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제르미는 더 흥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당장 소매를 걷어붙였다.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단, 한 시간 이내에 하도록 해라. 늦으면 이 공작저에서 시체로 나가게 될 것이다.”
시카르의 그런 살벌한 소리에도 제르미는 문제없다는 듯 생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5분이면 됩니다.”
5분밖에 안 걸리는 거였어? 나와 시카르는 일이 순순히 잘 풀린다는 듯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제르미가 불러낸 파란 빛깔의 마력이 키안의 목덜미에 있는 문장에 붙어 있는 것 같더니, 서서히 문장과 함께 살갗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르미가 말한 5분 정도가 지나자 정말 감쪽같이 문장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됐어! 이제 안심하고 키안과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겠어.
“다시 문장을 나타나게 하려면 똑같은 방법을 쓰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때도 자길 불러서 써달라는 말이군. 뭐 어차피 그럴 예정이니까.
“제르미 아이커 님, 정말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또 불러주십시오. 마법 랜턴이라든지. 마법문이라든지 등등이요. 수수료는 많지 않습니다.”
제르미가 원래 이렇게 돈을 밝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홀로 마탑을 운영한 뒤로 작은 마을을 돌보느라 항상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영업사원이 다 되었다. 원래 성격이 매우 활발하고 유쾌한 사람이라 적성에도 잘 맞았다. 시카르는 비카를 불러 제르미에게 5만 실링을 지급하라고 일렀고, 비카는 자루 하나를 끌고 와서는 제르미를 향해 던졌다. 제르미는 돈이 든 자루를 받아 내느라 조금 휘청거리긴 했지만, 안에 든 내용물을 보고 매우 흡족한 긋 함박웃음을 지었다. 음. 매우 거침없고 깔끔한 돈거래군. 근데, 저 돈을 들고 다시 상공을 나르려면 꽤 힘들 것 같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주신 돈은 좋은 곳에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 돈을 어디다 쓰든 네 마음이겠지. 그만 가라.”
“그럼, 다음에 또 저를 불러주시길 고대하겠습니다!”
시카르는 제르미를 보내면서도 따로 입단속을 시키거나 하지 않았다. 나를 통해 이미 원작 속 제르미가 레이독스와 얽힌 일에 얼마나 의리를 지키는지 톡톡히 보았을 테니까. 제르미가 이 공작저를 방문한 것도 레이독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었다. 그가 제아무리 돈독이 올랐다고는 해도, 길리언와 한편이 된 시카르를 도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키안을 본 이상, 오늘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시카르가 더는 길리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키안의 문장을 해결하고 나니, 이제 내가 문제였다. 길리언을 실제로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돼서 몸이 경직되는 거 같았다. 시카르는 그런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알았다.
“긴장돼 보이는데?”
당연히 긴장되지. 악역 보스 중 한 명이 이곳을 오는데, 어떻게 긴장이 안 될 수가 있겠냐고.
“내가 너한테 칼을 들이댄 것처럼 길리언이 칼을 들이대기라도 할까 봐 긴장하는 건가?”
나는 그런 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휘저었다. 시카르는 대놓고 죽이네 살리네 한다면, 길리언은 앞에서는 한없이 좋은 사람인 척, 자비로운 척하고는 뒤통수를 때리는 무시무시한 악역이었다. 머리를 비상하게 쓰고 속을 보이지 않는 악역이라 시카르와는 다른 의미로 무서운 악역.
“내가 정말 공작부인처럼 보일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돼서 그래.”
‘길리언의 눈치가 시카르 너처럼 보통이 아니니까.’
길리언은 시카르처럼 사람의 기억을 읽지 않고도 표정, 몸짓, 손짓 등을 보고 사람과 상황을 파악했다. 눈치가 그만큼 빠르고 영민했다.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이상한 낌새를 느낄 게 뻔했기에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잘하든 못하든 어차피 길리언은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 그러니 차라리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
그건 그렇긴 하지. 길리언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니까.
“이제 키안을 좀 깨워야겠는데, 네가 좀 도와야겠다.”
“내가?”
“말했다시피 나 혼자 왕족의 정신력을 침투하긴 힘들다. 그러니 키안이 의지하는 네 정신이 필요하지.”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리 와서 내게 손을 달라는 소리다.”
나는 경계하듯 시카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신이 빨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카르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봐.”
고개를 돌리니 잠의 정령들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키안이 보였다.
“비카가 정령을 지독하게도 풀었군. 가서 놀라지 않게 깨워라.”
어린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깨우는 법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나는 슬며시 키안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토닥토닥거렸다. 그러자 키안이 지그시 눈을 떴다.
“어머니……?”
이내 번쩍 눈을 떠보니 키안이 좋은 꿈이라도 꾼 듯 눈을 껌뻑껌뻑 뜨고 있는 게 보였다. 시카르는 내게 아주 잘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키안. 잘 잤니?”
키안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완전히 눈을 다 뜨고 난 후에 자신이 시카르의 무릎에 안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튕기듯 떨어져 나와 내게로 조르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겨서 포복절도라도 하고 싶었지만,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무엇보다 기분 나쁘다는 듯 키안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시카르의 표정이 가장 재미있었다.
“어머니. 제가 낮잠을 좀 많이 잤나 봐요.”
“키안. 일어났으면 공작님께도 인사를 해야지.”
키안은 마지못한 듯 돌아서 시카르를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고, 시카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옆으로 삐딱거렸다.
“키안. 오늘 손님이 올 거야.”
“손님이요?”
“이 나라의 국왕 전하께서 오늘 방문하실 거야.”
국왕이라는 존재는 어린 키안도 놀라게 만들었는지 키안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
“우와! 그럼 임금님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 이 공작저에서 석찬을 함께 하기로 하셨어. 그래서 우리가 조금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단다.”
“네. 뛰어다니지도 않고 떠들지 않고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처럼 얌전히 있을게요.”
“그리고 부탁할 게 몇 가지가 더 있어.”
키안은 부탁이 뭐냐는 듯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키안. 누가 물어본다면, 꼭 내가 친엄마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던 거 기억해?”
“물론이죠. 기억해요.”
“절대 잊으면 안 돼.”
특히 오늘은 더더욱.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이건 정말 중요한 건데…….”
“네! 말씀하세요!”
“국왕 전하가 냉기만이 가득해 보여도 결코, 버릇없게 굴면 안 돼.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해.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말이야. 알았지?”
“음…… 네. 알겠어요. 어머니.”
“장하네. 우리 아들.”
키안은 영특한 아이니 이렇게만 말해 줘도 문제없을 것이다. *** 저녁노을이 산등성이에 걸리고 대지가 붉게 물들 때쯤. 올 것이 왔다. 길리언이 등장하는 그 순간, 시계 초침 소리마저 느려진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키안과 같은 눈부신 금발에 영롱한 푸른 눈빛을 가진 길리언의 모습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곁에 있는 시카르가 이들의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하는 악역 중의 악역이란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이제 정말 악의 소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철저하게 실감이 나는군.’
길리언의 뒤로 얼굴의 반을 가리듯 후드를 길게 내려쓴 남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저 검은 형체만 봐도 그가 길리언의 마법사 파시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시움은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얼굴이라고는, 검은 형태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형체 그 자체. 그의 정령사 라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둘만 온 듯했다.
“오는 길이 멀어서 지루하진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상 레카도르 왕궁에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다. 시카르의 말은 쓸데없이 왜 발걸음을 했냐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설 속에서도 시카르가 왕에 대해 어려워하지 않고 주저함이 없다고 소개돼 있었지만, 길리언은 그런 시카르의 오만함을 잘 받아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길리언의 모습은 내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길리언은 조금은 적대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멀다고 하시니 서운하군요. 요즘 우리 사이가 그만큼 멀어졌다는 것처럼 들려서 말이죠,”
이 악역들이 내 눈앞에서 이렇게 신경전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