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악역을 다루는 방법 (2)2021.09.02.
‘내 앞에서 이러지들 마. 무섭다고.’
그래도 내가 이 공작저에서 헛산 건 아니었다. 악역들과 함께하며 악역을 조금은 다루는 방법을 알았단 말이지. 물론 그 악역이라봤자, 시카르뿐이긴 하지만. 나는 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키안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가 귀족들이 나누는 인사를 올렸다.
“매일 세상을 비추는 밝은 해처럼 매일 기쁨이 충만하기를. 블레이크 공작저의 안주인, 유라 블레이크가 국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드디어 이렇게 뵙는군요. 블레이크 공작부인”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옵니다. 국왕 전하.”
길리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다음으로 나는 곧장, 키안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는 저의 아들 키안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키안, 인사드리렴. 국왕 전하시란다.”
키안을 소개하려니 조금은 긴장됐다. 특히나 시카르를 처음 봤을 때처럼 갑자기 ‘냉기가 가득해!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며 불씨를 또 만들진 않을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키안에게 잘할 수 있겠지? 라고 말하듯 쳐다보았다. 다행이도 키안은 보통의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키안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똘똘하기도 하지. 길리언은 키안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보며 답례했다.
“매일 세상을 삼키는 어두운 밤처럼 매일 번뇌도 사라지기를. 두 분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워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제 갑작스러운 방문이 불편하시진 않으셨는지 모르겠군요.”
“국왕 전하의 방문이 불편하다뇨. 그런 불충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는 전하의 방문에 매우 크게 감격하였답니다.”
기분 탓일까. 왠지 시카르가 방금 날 보고 미소를 지은 것만 같았는데.
“공작부인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림 이제 다이닝 룸으로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솜씨는 없지만, 전하께서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를 해놓았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기우이십니다. 제 입맛은 그리 까다롭지 않습니다.”
사실, 음식 준비를 지시한 건 시카르였지만, 나는 그 옆에서 음식을 소개하는 멘트를 외우느라 자동으로 길리언의 입맛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입맛은 소름 끼치게도 키안와 너무나 흡사했다. 길리언이 좋아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육고기들과 맵지는 않지만, 조금 짜고 달달한 음식들이었다. 특히나 키안이 좋아하는 비프타르타르를 매우 좋아했다. 다행으로 식사 시간만큼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식사를 하는 중에 길리언이 힐끔힐끔 키안을 쳐다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괜찮은 것 같았다. 길리언이 조용한 침묵을 깨기 전까지는.
“공작부인께서는 언제 공작님을 만나셨습니까. 공작님께서 결혼식에 초청하지 않아 두 분의 이야기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이건 이미 우리가 입을 맞추었지.
“제가 할머님을 찾아 드리며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러고 보니 오늘 할머님께서 보이지 않는군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시카르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요양차 레페르 대신전에 가 계십니다.”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귀띔이라도 해주셨다면 제가 할머님을 한번 살펴볼 수 있을 텐데요.”
“제 개인적인 일로 전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시카르의 특성상 자신이 기억을 볼 수 없는 길리언을 믿지 못해서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폐라뇨. 공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때마다 제가 정말 서운합니다. 저는 아직도 공작님과 함께한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왠지 너도 그 영광을 잊으면 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데. 길리언은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 나는 깜짝 놀랄 뻔한 걸 겨우 티 나지 않게 미소로 대신했다.
“참, 공작부인께서는 눈동자 색이 참 특이하십니다. 지금껏 갈색 눈동자는 많이 보았지만, 검은색 눈동자가 있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실례지만 공작부인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이곳에서는 꽤 먼 곳입니다.”
“먼 곳이라…… 어떤 곳인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이곳까지 어떻게 오게 되셨는지도 말입니다.”
시카르가 예의를 갖춰 말하긴 했지만, 명백하게 그만하라는 듯 길리언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전하시라도 제 아내에게 과한 관심을 갖는 건 실례인 것 같습니다만.”
“공작님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작부인께도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 실례했군요.”
시카르는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길리언은 자꾸만 무언가를 캐내려 하고, 우리는 감추려 하다 보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만이 다이닝 룸을 가득 메웠다.
“식사를 다 드신 것 같은데, 디저트 좀 내오겠습니다.”
“잠깐만요.”
길리언은 일어나려는 나를 멈춰 세운 후 자신의 왕궁에서 데려온 시종을 부르곤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시종이 알겠다는 듯 몸을 숙인 후 어디론가 가더니, 갑자기 원형 쟁반에 놓인 새우요리를 들고 와 테이블 위로 내렸다.
“라오카의 영주께서 대하를 많이 보내셨길래 좀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요리를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왕실 주방장이 직접 만든 요리를 가져 왔으니, 꽤 맛있을 겁니다.”
레카도르 왕족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에 새우를 먹지 않는다. 그건 길리언도 마찬가지였다. 새우를 먹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겪는 알레르기 반응은 가려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노화가 가속되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지기에 쓸데없는 신성력을 낭비해 치료를 해야 했고, 가운을 못 쓰는 후유증은 며칠 이상 갔기 때문에 그들은 갑각류라면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길리언이 그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먹으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키안을 먹이기 위해서 들고 왔을 것이다. 나는 몹시도 당황했지만,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의심만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카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런 상황에서도 시카르는 별 표정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있나. 나는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길리언에게 물었다.
“레카도르에서 전하에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드실 수 없는데 저희끼리만 먹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전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내오겠습니다.”
지금껏 평온하게 날 쳐다보면 길리언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하게 바뀌었다.
“그럼 이 레카도르의 왕이 직접 가져온 선물을 거절하겠다는 말씀이 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부인.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어식을 먹지 않는 것은 아주 불충이니 사양 말고 드시오.”
시카르는 길리언을 향해 약간의 묵례를 올렸다.
“제 아내가 먼 이국에서 와서 뭘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한 말이니 전하께서 용서하소서.”
“용서라니요. 당연히 괘념치 않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시카르는 어쩌자고 저러는 걸까. 키안은 아직 갑각류 종류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야 산에서 사느라 먹을 일이 없었고, 이곳에 와서는 내가 주의시키느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키안은 자신에게 그런 알레르기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분명 맛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먹어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모두 들통날 게 뻔했다. 그럼에도 시카르의 표정은 너무 평온하기만 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카르를 보며 눈짓을 하려는데, 시카르가 먼저 키안에게 새우를 덜어주고 있었다.
“키안. 맛있을 테니 먹어 보련.”
키안은 별생각 없이 새우를 받아 들고는 한 입 먹더니, 예상대로 맛있는지 접시에 있는 새우들을 순식간에 비워내었다. 길리언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지만, 나는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눈앞이 아찔하기만 했다. 길리언은 키안이 새우를 잘 먹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참 잘 먹는군요.”
‘시카르! 시카르? 무슨 생각이 있는 거지? 그래서 가만히 있는 거지?’
난, 당장 시카르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모든 것에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키안. 맛있었어?”
“어머니.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이런. 정말 맛있었나 보네. 입가에 다 묻었는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키안의 입술을 닦아주며 얼굴을 살짝 만졌지만, 아직 키안에게서 열은 나지 않았고, 그 어떤 쇼크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시카르가 음식을 바꿔치기라도 한 걸까? 오만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아무것도 추리할 수 없었다. 답답해진 나는 일단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서 내리신 진귀한 어식을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큰 광영인지 모르겠습니다. 황공합니다. 전하.”
길리언은 흡족한 얼굴로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저런 걸 보면 시카르와 닮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공작부인께 한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는 말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모르지. 이 공작저 안에 처박혀 있는 내가 알 리가 있나. 어쨌든 나는 싫지 않은 척 수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금시초문이옵니다. 전하.”
“그래서 공작부인이 어떤 사람일지 무척 궁금했지요. 이렇게 보고 나니, 블레이크 공작께서 첫눈에 반하신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첫눈에 반한 건 아니고 첫눈에 죽이려곤 했었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달에 왕궁에서 제 결혼식이 열릴 겁니다. 그때는 꼭, 공작부인을 왕궁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부르시면 응당 어디라도 함께할 것입니다.”
길리언은 내가 매우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공작님께서 공작부인을 매우 잘 만나셨군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길리언이 나갈 때까지도 나는 키안에게서 이상 반응이 나타날까 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키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먼저, 키안을 방으로 올려보낸 후에야 나는 시카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을 수 있었다.
“시카르. 어떻게 된 거야? 키안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잖아?”
“그래서 길리언이 키안을 시험하기 위해서 새우를 들고 온 거지.”
“알고 있었던 거야? 대체 뭐가 다 어떻게 된 건지 도통 모르겠어.”
“예전에 폐왕이 길리언에게 몇 번이고 갑각류 음식을 먹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에 알레르기약을 구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좀 남아 있더군. 길리언이 온다길래 혹시나 해서 미리 키안에게 먹여놨지.”
‘뭐야. 그렇게 된 거야?’
“그럼 말을 해주지 왜 말을 안 했어. 깜짝 놀랐잖아!”
“나도 식사를 하기 직전에 떠올라서 어쩔 수 없었다.”
안도감이 확 밀려오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시카르가 완전한 내 편, 내 아군처럼 느껴졌던 탓에 나도 모르게 그를 안을 뻔했다. 그것은 다만, 간절히 이기길 원하던 경기를 보고 난 후에 하는 기쁨의 포옹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간접키스로도 부족해서 대놓고 안으려는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경기를 보고 난 후에 표현하는 기쁨의 포옹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안을 뻔했지, 안지는 않았고.
“어쨌든 안지는 않았잖아.”
“안 하던 짓을 하려는 걸 보니 꽤 긴장했나 보군. 키안이 왕손인 게 들통났다면 쓸모없어진 네 목숨도 내줘야 했을 테니까. 그래서 긴장했나?”
저 인간이 사람 목숨을 갖고 웃어? 나는 이를 으드득 갈고 시카르를 보며 말했다.
“나더러 차라리 악녀가 되라고 했지?! 내가 진짜 악녀가 뭔지 보여 줄게.”
시카르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기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