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악역을 다루는 방법 (3)2021.09.06.
블레이크 공작저에 있는 수련의 방은 겉으로 볼 때는 그저 작은 훈련장 정도의 원형 건물처럼 보였다. 수련의 방은 외부에 알려진 적 없이 공작저의 주인 시카르와 그의 수하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수련의 방 바로 앞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복도 형태의 대기실이 딸려 있다. 비카와 듀리온은 거의 하루의 절반을 수련장에서 보내곤 했었다. 다만, 요즘 비카는 공작저에 나타난 어린 소공자를 돌보느라 예전만큼 수련의 방을 찾지는 않았지만, 오늘처럼 공작저에 손님이 온 날은 어김없이 이곳에 와 있었다. 듀리온은 팔짱을 끼고 정신없이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공작님과 국왕의 사이가 이상해 보이는데. 두 분이 싸우셨나?”
비카는 관심 없는 듯 앉아 있는 듯했지만 온 신경이 밖에 있었다.
“인간들이야 늘 싸우지.”
“너도 늘 싸우잖아?”
“우린 대놓고 싸우지만, 인간들은 얄팍하게 싸우지.”
듀리온은 인간들은 모두 다 같다는 그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인간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 나를 봐. 난 늘 대놓고 싸우잖아. 난 술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동의할 수 없는 건 비카도 마찬가지였다.
“넌 멍청해서 그런 거지.”
듀리온은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는 볼을 몇 번 긁적이고는 인정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분위기가 이상해. 평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정령사 놈도 안 보이는 게 수상하단 말이지.”
“원래 그 정령사는 있다, 없다 하지 않았나?”
“둔한 네 눈에는 안 보였겠지만, 그 정령사 놈은 항상 소리 없이 길리언의 뒤를 따라 다녔었어.”
“그랬나……?”
비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듀리온의 허리에 꽂혀 있는 단검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밖을 좀 살펴야겠다.”
“칼은 왜 들고 나가? 같이 갈까?”
“넌 그냥 여깄어. 너처럼 둔한 놈들은 금방 들키니까.”
“그래도 힘은 세잖아.”
“지금 그 힘은 쓸데가 없으니 기다려.”
밖이라면 모를까, 공작저 안이기에 듀리온은 비카의 안위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따라 나가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완전히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대었다.
“알겠어. 조심히 갔다 와.”
수련의 방을 나서자마자 공작저를 감도는 음산한 기운을 느낀 비카는 조심히 어둠의 냄새를 따라갔다. 기가 막히게도 공작저 벽면 곳곳에 악몽의 정령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것들 봐라?’
비카는 이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정령사 놈이 안 보인다 했더니, 공작저에 이런 짓을 하고 간 모양인 듯했다.
‘간만의 간식거리군.’
비카는 가젤 떼를 만난 포식자처럼 입맛을 다시며 꿈틀거리는 정령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악몽의 정령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비카의 난입에 정신없이 도망을 쳤지만, 비카는 벽면을 타고 다니며 연기처럼 움직이는 정령들을 잡아 뜯어 먹었다. 비카의 손에 물어뜯긴 어두운 그림자들이 비명을 지를수록 비카는 더욱 즐거운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도망가는 놈들이 있으면 실낱같은 끄트머리를 붙잡아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모두 으득으득 씹어 먹었다. 한순간에 공작저에 붙어 있던 모든 악몽의 정령들이 비카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비카는 입가에 묻은 실 가닥 같은 정령까지도 빠짐없이 쓸어 먹으며 입가를 닦았다.
‘겨우 이게 다라니. 배가 좀 찰 뻔했는데 아쉽게 됐네.’
만족스러운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카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 시카르에게 악녀가 무엇인지 보여 줄 복수의 시간! 나는 아침 일찍부터 누가 봐도 허영심이 가득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갖고 있는 보석이란 보석은 죄다 꺼내 몸에 둘렀다. 좀 무겁기는 했지만, 사치스럽고 악독해 보이는 악녀의 컨셉에는 맞는 것 같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출 준비를 하게 된 키안은 매우 들떠 보였다.
“어머니.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조금 멀리 갈 거야.”
“얼마나 멀리 가요?”
“수도에 있는 시내로 갈 거야. 왕궁이 있는 곳이지.”
“그럼, 전에 만난 국왕 전하께서 사시는 곳이에요?”
“거긴 왕궁이고 우리는 수도의 시내로 갈 거야. 신시가지에 가면 다양한 가게들이 있단다. 그리고 아주 큰 장난감 가게도 있지.”
“와. 장난감 가게요?”
“곧 키안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우리 장난감 가게에 가서 친구들을 위한 선물도 사자꾸나.”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우린 오늘 사치를 할 거거든.”
“사치가 뭐예요. 어머니?”
“돈 걱정 없이 사고 싶은 걸 모두 다 사는 거야. 오늘 네가 사고 싶다고 하는 건 내가 다 사줄 생각이거든.”
“모두 다요?”
“응. 이 공작저를 거덜 낼 만큼 원하는 건 다 사줄 테니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하렴.”
키안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입술을 꾹 다물며 말했다.
“가서 생각해봐도 돼요?”
“당연하지.”
“어머니, 혹시 새우는 많이 비싸요?”
“새우는 왜? 설마 새우가 먹고 싶은 거야?”
“네. 처음 먹어봐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거든요.”
혀를 빼꼼 내밀며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뭔 일 나기 전에 이젠 주의를 시켜야겠어.’
“키안. 앞으로 새우는 절대 먹으면 안 돼. 절대.”
“네? 왜요? 어머니?”
“새우를 먹게 되면 새우가 널 아프게 할 거야. 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거든. 게, 바닷가재 같은 것들도 먹으면 안 돼.”
“하지만, 어젠 괜찮았잖아요. 어머니…….”
“그건 어제 공작님께서 미리 약을 먹여서 괜찮았던 거거든. 하지만 앞으로는 무조건 조심해야 해.”
실망이 컸는지, 키안의 눈동자가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거리다 기운이 빠진 듯 어깨가 축 처졌다.
“네. 어머니…….”
“그리고 남들에게는 알레르기 있다고 말하면 안 돼.”
“그건 왜……?”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면 허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키안, 사람들에게 허약해 보이고 싶지 않지?”
허약하단 말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키안의 두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이죠! 어머니!”
휴. 똑똑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덕분에 금방 설득이 돼서 다행이었다. 나는 키안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말했다.
“우리 그럼 이제 외출을 해볼까?”
나는 키안에게 어서 나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처음 하는 외출이 설레는 듯 키안은 총총걸음으로 내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드레스 샵이었다. 콧대 높게 들어가서 이 집에서 가장 비싼 옷으로 가져오지. 라고 하려던 내 계획은 조금 어긋났다. 샵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이 귀족 부인은 대체 누구지? 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전에 갔던 그 드레스 샵으로 가는 건데.’
그래서 나는 챙겨온 문장을 황급히 꺼내 들어 직원들을 향해 내밀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듯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비, 비 각하께서 저희 샵을 찾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나는 시카르가 일러준 대로 아주 도도한 자세를 취했다. 일단 소파에 기대며 두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턱을 좀 들어 올린 후 눈을 살짝 내리깐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샵에 있는 옷 중 가장 비싼 것들로 전부 가져와……. 케에엑…… 켁켁…….”
‘마지막 기침은 빼고. 안 하던 말투를 쓰려니 사레가 걸리는군.’
“비, 비 각하! 괘, 괜찮으십니까?”
내가 갑자기 사레 걸린 기침을 하자 당황한 직원은 급하게 물을 따라와 내게 건네었다.
“물 좀 드시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확실히 물을 좀 마시고 나니 목구멍이 따가운 것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오늘 악녀 이미지를 제대로 굳힐 생각이었다. 시카르가 원하는 그 위엄이 얼마나 악녀 같은 행동인지 똑똑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러면, 시카르도 자신의 악마 같은 모습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가장 비싼 옷들로 모두 가져와라.”
“네. 비 각하!”
직원들의 움직임은 꽤 재빨랐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드레스를 들고 내 앞으로 와서 일렬로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쳐다도 보지 않고 찻잔을 들며 말했다.
“모두 포장해.”
‘이 정도면 좀 악녀 포스가 흐르겠지?’
“그리고 우리 소공자에게 어울릴 만한 옷도 모두 포장에서 공작저로 보내라. 계산은 모두 공작가 앞으로 달도록.”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일단, 우리 소공자가 입을 외투와 모자부터 가져와.”
“네. 비 각하!”
최대한 까다롭고 엄해 보이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표정을 계속 굳히고 있었더니 얼굴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이런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을.
‘아. 내 볼 근육이야.’
내 표정이 너무 엄했던 탓일까. 키안도 내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 혹시, 화, 화나셨어요?”
아차. 키안이 볼 때도 내가 화나 보이겠구나. 나는 키안이 들을 수 있게 귓속말로 낮게 속삭였다.
“주문한 물건을 잘 가져오라는 단호한 표현이었어. 화난 거 아니야.”
“그래요? 그럼 저도 어머니를 따라 할래요.”
“응? 날 따라 한다고?”
“네!”
키안은 정말 날 따라서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족이라 그런지 시카르가 알려준 것과는 달리, 정말 위엄을 갖춘 왕자의 표정이 나왔다. 거만하지 않은, 정말 품위가 넘치고 위엄이 있는 그런 표정 말이다. 나는 감탄한 눈으로 키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키안! 그거야! 아주 멋있어!”
멋있다는 내 말에 키안의 목이 더 뻣뻣해지고 턱이 조금씩 더 올라갔다. 저렇게 자세를 조금 움직이니 조금 전에 느껴졌던 왕자님의 위엄은 사라지고 귀여운 어린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눈물나게 귀엽구나. 키안.’
우리가 모자간의 정다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직원들이 외투와 털모자를 가져와 키안에게 입혔다.
뭘 입어도 너무나 귀엽고 멋있어서 나는 입을 틀어막고 오열할 뻔했다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키안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런 행동은 단호하고 위엄있는 표정을 짓자는, 일종의 우리 둘의 싸인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던 키안도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잘 통한단 말이야.’
샵을 나오며 나는 키안이 가장 고대할만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 장난감 가게에 가 볼까?”
“네. 어머니. 너무 가고 싶었어요!”
‘이곳에서는 어떤 장난감이 유행하려나.’
키안을 보통 아이들처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키우기 위해 장난감 가게에 갔지만,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는 키안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는 내용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키안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기우였다. 장난감 가게는 시카르가 꾸며준 놀이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각종 인형과 마차, 과자 집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키안은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 했다.
“와! 이런 건 처음 봐요!”
키안은 장난감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눈사람 모양을 한 장난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나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설산에서 자란 키안이 가장 많이 했던 놀이가 바로 발리제와 함께 만든 눈사람 놀이었으니까. 나는 얼른 키안의 시선을 끌 수 있을 만한 다른 장난감을 찾아보았다. 하얀 설산을 보고 자란 키안이 특히나 좋아하는 흰색의 인형을 찾던 중 하얀 화이트 진저맨을 발견했다. 나는 납작한 화이트 진저맨 인형을 들어 키안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키안. 이건 어때? 너무 귀엽지 않니? 화이트 진저맨이야.”
키안은 내가 보여 준 화이트 진저맨을 받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얘도 눈사람처럼 하얘요.”
“그렇지? 키안?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건 모두 다 가져도 괜찮아. 아니, 아예. 이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다 사버리도록 할까?”
어차피 오늘 흥청망청 써버릴 생각이니 장난감 가게를 몽땅 털고 와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키안은 크게 호응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걸 모두 다 사면 제 놀이방으로 가져가는 거예요?”
“물론이지. 원한다면 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어.”
키안은 고민하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다 말했다.
“그럼…… 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아이들……?”
시선을 돌려 밖을 보니, 아이들이 통유리 문에 붙어 가게 안에 있는 장난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남자 주인공이라서 그런 걸까.’
이제 일곱 살 된 아이의 깊은 사려에 나는 놀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