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악역을 다루는 방법 (4)2021.09.09.
아이들의 옷차림을 보니 귀족의 아이들은 아니었고, 평민의 아이들쯤으로 보였지만, 아이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보면 어쩌면 고아들이나 구빈원, 또는 수도원의 아이들로 보였다. 얼굴이나 옷이 깨끗한 걸 보니 돌봐 주는 이가 분명히 있는 아이들 같았다.
“키안. 내가 아이들을 만나고 와볼게. 잠시만 기다려 줘.”
내가 밖으로 나가자, 아이들은 내게 혼날까 봐 잔뜩 겁을 먹고는 뒷걸음을 치더니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어어 이러다 놓치겠는데. 아이들을 혹하게 할 만한 말을 해서 붙잡아야겠어.’
나는 아이들을 쫓아가며 급하게 외쳤다.
“얘들아! 사탕 사줄게!”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탕이요?”
“달고 맛있는 사탕들 먹고 싶지 않아?”
“원장님이 누가 줬냐고 물어보실 텐데…….”
원장님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구빈원 아이들이 맞는 것 같았다.
“블레이크 공작부인이 줬다고 말하면 된단다. 그리고 너희가 어디 사는지 알려주면 여기 있는 장난감을 보내 줄 생각이야. 어디 사는지 말해 줄래?”
아이 중 가장 커 보이는 아이 한 명이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고민하듯 망설이다 대답했다
“레페르 구빈원이요.”
레페르 구빈원이라고 들으니 꽤 큰 곳 같았다.
“곧 장난감과 사탕을 들고 갈 테니 가서 보자꾸나.”
나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지만, 아이들은 크게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자기네끼리 뭐라고 속닥속닥하더니 다시 도망치듯 가버렸으니까. 호의를 베풀었는데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장난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키안은 가게 주인이 내어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어떻게 됐어요?”
“어. 그게…….”
키안에게 굳이 아이들이 즐거워하지 않더라는 말을 해줄 필요는 없겠지. 선심을 베풀다가 거절당하면 그것도 꽤 마음이 아픈 법이니까.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매우 좋아하던걸.”
키안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안겨들었다.
“어머니, 고마워요.”
“내게 뭐가 고마워. 아이들에게 선물을 베푼 건 너인데. 그런데 키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한 거야?”
“아……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오갈 곳이 없어서 거리를 헤맸을 때 우연이 어떤 귀족 아이가 손에 들고 가는 장난감을 봤거든요. 그때 배가 너무 고팠는데도 그 장난감이 너무 갖고 싶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배를 채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장난감이기도 하니까. 정의롭고 착한 주인공과 함께 다니려니 오늘 악녀 컨셉은 실패로 끝나겠는데?
“그런 일을 겪었다고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난 네가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해. 키안.”
키안은 칭찬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운 듯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레페르 구빈원이라고 아시는가?”
안경을 닦고 있던 장난감 가게 주인은 안쓰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입죠. 매일 장난감을 구경하겠다고 아이들이 몰려와서, 하루는 장난감을 주려고 나갔더니, 도망을 가더라고요. 장난감을 주겠다고 해도 도망만 가고…… 그런 모습을 보면 가엾죠…….”
‘으음. 이 주인장 마음씨가 꽤 착한데?’
“오늘은 자네가 그동안 주고 싶었던 그 장난감들을 모두 줄 수 있을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각하.”
“우리 소공자가 이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구매해서 구빈원으로 보내길 원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걸 모두 사겠다는 말이네.”
내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은 깜짝 놀라 닦고 있던 안경을 떨어트렸다.
“네? 이, 이걸 전부 다 보내란 말씀이 십니까?”
“그래. 모두 보내도록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각하! 당장 짐을 싣겠습니다요!”
어쩌면 장난감 가게 주인의 따뜻한 온기를 우리 키안이 느끼고 아이들에게 대신 전해주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게 주인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하면서도 귀에 걸린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허허. 이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먼, 짐 마차가 없으니 짐 마차는 빌려야 할 것 같고, 짐을 실을 인부도 부족하니 옆집 구두장이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네. 허허. 오늘 아침만 해도 이런 횡재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 왠지 흐뭇한데? *** 레페르 구빈원은 신시가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멀지 않은 곳이니 아이들이 신시가지 주변을 오갈 수 있었겠다 싶었다. 레페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꽤 큰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건물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다. 우리 마차와 함께 구빈원 앞으로 장난감과 각종 먹거리들을 가득 실은 짐 마차가 도착했다.
짐을 하차하는 동안, 원장과 아이들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원장은 푸근한 인상의 50대 중반의 여인으로 장난감 가게 주인의 말에 의하면, 자작 부인이었지만 남편과 사별 후 구빈원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세상에나! 어서 오십시오. 비 각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방문해 주시다니요. 레페르 신이 저희 구빈원을 굽어살피시어 각하를 보내 주시었군요. 저희 구빈원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과 먹거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각하.”
원장이 너무 머리를 수그리고 말을 해서 나는 그만 머리를 들라고 했다.
“그래도 제가 감히 어떻게 비 각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가 있겠습니까. 각하의 은혜로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사옵니다.”
시카르의 말로는 이럴 땐 그냥 호통을 치는 게 가장 낫다고 했다.
“두 번은 말 안 하겠습니다. 어서 고개를 드세요.”
힘주어 말을 해서인지 원장은 곧장 고개를 치켜들어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비각하…….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그만 안으로 안내해주세요. 어서 빨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직접 나누어주고 싶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구빈원은 허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깔끔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건물을 깔끔하게 잘 관리하셨군요.”
“과찬이십니다. 아이들을 위해 위생적인 환경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청결을 잘 유지하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훌륭하군요.”
원장은 겸손을 보이긴 했지만 듣기가 싫지는 않은지 옅은 미소로 얼굴을 붉혔다. 짐꾼들이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한편에 쌓아두는 동안, 나는 원장과 구빈원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장의 말에 의하면, 현재 레페르 구빈원은 많은 아이들에 비해 후원이 적어 운영이 힘들어서 아직 보수 공사를 못 한 곳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좀 도와줄까 생각하던 차에 키안이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응? 왜 그러니 키안?”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어요.”
키안은 말을 끝내며 원장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원장은 곧장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말씀들 나누십시오. 저는 짐이 맞게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있겠습니다.”
“수고 좀 해 주세요.”
원장이 가는 것을 보고 나는 키안에게 물었다.
“키안. 왜 그래?”
“이상해요.”
“응? 뭐가?”
“저 원장에게서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키안이 볼 때는 차갑게 느껴진다는 거야?”
“네. 저 원장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아마 모두 거짓말일 거예요.”
마음의 온도를 느끼는 키안이 보기에 냉기가 흐른다면, 원장의 지금 모습이 모두 가식이란 소린데.
“알겠어. 키안. 내가 좀 더 세세히 살펴볼게.”
키안은 굳은 얼굴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단, 원장과 함께 도착한 선물들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아이들의 인상이 어두웠다. 단 한 명도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저 학습된 것처럼 무감각한 말투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이들이 장난감을 별로 안 좋아하나 보죠?”
나는 은근슬쩍 떠보듯이 물었고 원장은 내 질문에 움찔하며 표정을 굳혔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비각하께서 오셔서 아이들이 놀라서 그럴 거예요. 이렇게 높으신 분은 아이들이 처음 보거든요.”
“아…… 그래요?”
“네. 큰 수도원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구빈원에 비 각하께서 관심을 보여 주실 줄은 저조차도 상상도 못 한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대충 둘러봐도 아이들은 손에 든 장난감을 남의 물건 보듯 만지작거리며 원장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다.
‘흐음…… 그래도 아이들이 깨끗한 것을 보면 분명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키안이 잘못 볼 일도 없고,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지금으로써는 알 방도가 없었다. 원장은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느라 키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키안에게만 조용히 말했다.
“우리 그럼 아이들한테 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까?”
“네. 좋아요.”
마땅한 아이를 찾던 중 신시가지에서 만난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에게 조심히 다가간 나는 아이를 복도 구석으로 조용히 불렀다. 아이는 원장의 눈치를 슬며시 살피다 원장이 다른 아이들과 선물을 푸느라 정신없는 모습을 보곤 내게로 걸어왔다.
“왜…… 그러세요.”
“응.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
아이는 겁을 먹는 듯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 소공자의 말로는 원장님이 좋은 사람 같지가 않다고 하는데, 네가 아는 원장님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말해주지 않을래?”
잔뜩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웅크렸다.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해. 그래야 내가 너희를 도울 수가 있거든.”
혼란스러운 듯 아이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아이는 두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원장님은 가여운 우리를 거두어주신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보통 저런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려면 정말 원장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기뻐하며 말하거나, 학습이 돼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이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학습된 결과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이들은 모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한결같이 원장이 너무나 훌륭한 분이라는 말만 했다.
‘아이들 모두 세뇌당했어.’
오늘 아이들에게 더 물어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키안. 우리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키안은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는 얼굴로 원장을 보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키안의 눈빛엔 걱정과 간절함이 가득했다.
“네?”
“증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
키안은 이런 정의롭지 못한 상황은 참을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매우 아쉽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늘은 우리가 이만 돌아가게 되겠지만, 내일은 공작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야.”
“공작님 께서요?”
“물론이지. 공작님께서는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모두 대신해주실 거야.”
‘그 성격에 이런 일 하나 처리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게다가 이 일은 시카르에겐 키안과 좋아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 공작저에 도착하니 주문한 옷이 거실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키안은 씻어야 해서 곧장 제 방으로 보낸 후 쉬기 위해 소파에 좀 앉아있으려니 시카르가 서재에서 나왔다.
“또 옷을 한가득 샀군. 내게 너무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저렇게 말할 줄 알았지.’
“사람들에게 상냥할 필요 없이 차라리 악녀가 되라며. 그래서 악녀가 되기로 한 것뿐이야.”
“드레스를 많이 사는 게 악녀라고 생각하다니. 넌 천상 악녀가 되긴 글렀군.”
“무슨 소리야. 사치가 악녀의 상징이라고!”
“차라리 내게 잘 보이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군.”
이건 정말 완전히 시카르식 해석이다. 시카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오늘은 뭘 했는지 보게 손 좀 잡아 볼까.”
나는 알아서 하라는 듯 시카르를 향해 던지듯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은 시카르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조금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나름 악녀 흉내를 좀 내 본 모양이군. 그런데 넌 너무…… 어설퍼…… 키안은, 정말 태생을 속일 수가 없는 것 같군. 슬쩍 따라만 해도 왕손으로 보이는 걸 보면 말이지. ……역시 아직 눈사람만 보면 발리제가 떠오르는 건가…… 이건 뭐지? 구빈원에 장난감을 보냈군.”
“키안이 원했어.”
“꼬맹이는 정말, 쓸데없이 마음이 여려. 저런 걸 보면 군주의 자질이 없는 놈인데 결단을 내릴 땐 또 단호하기도 하니 왕좌를 차지했겠지…… 그런데, 구빈원 아이들의 반응이 이상하군.”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키안의 말로도 원장이 이상하대.”
“그렇군. 루시와 루이드의 선물은 잘 챙겼나?”
“응. 루시와 루이드 한테는 선물을 보냈어.”
“그래? 그럼 지금쯤이면 후작저에도 선물이 도착했겠군.”
시카르는 이제 기억을 모두 봤다는 듯 내 손을 놓았다.
“이제 그만 올라가지.”
“아, 아니. 나 아직 할 말 있어.”
돌아서려던 시카르는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
“내일 키안과 구빈원에 같이 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