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악역을 다루는 방법 (5)2021.09.13.
시카르는 무심한 눈으로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였다.
“키안에게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군?”
“아무래도 그 구빈원 원장이 이상해서 그래. 아이들한테 뭔가를 세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키안의 말로는 그 원장이 나쁜 사람 같다는 거야.”
“그건 수도에서 해결할 일이지. 우리가 나설 일은 아니다.”
“이건 너에게 기회야.”
“기회?”
“키안에게 너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이 일을 잘 해결하게 되면, 키안이 널 보는 눈이 달라질 거야.”
“달라져봤자 나한테서는 또 냉기만 느껴진다고 할 놈인데.”
“그러니까 내일 같이 가줘. 냉기가 느껴져도 자신에게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게.”
시카르는 서늘한 눈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길리언의 결혼식 문제를 처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꼬맹이까지 한몫 거드는군. 정말 피곤한 녀석이야.”
“아빠니까 신경 써야지.”
“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녀석의 아빠란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아니니까 아빠라는 걸 강조하는 거지.’
“생각은 안 해도 행동은 아빠처럼 해줘.”
“좋아. 내일 수도에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보도록 하지.”
시카르는 거기까지 말하고 돌아서려 해서 나는 그를 불렀다.
“시카르!”
“또, 왜.”
“할머님은 괜찮으셔……? 좀 어떠셔……?”
시카르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그런 표정을.
“지금 우리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건가? 왜?”
“왜긴. 당연한 거 아니야? 할머니가 대신전에 가셔서 아직 안 오고 계시니 어떻게 됐는지, 괜찮으신지, 치료는 잘되고 있는 건지 걱정되니까 묻는 거잖아.”
“왜 우리 할머니를 걱정하는 거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네 편 하나가 사라지니까? 그래서 묻는 건가?”
시카르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 누구도 제 부모를 걱정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의아하게 받아들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껏 살면서, 형식적인 안부 인사 말고는 주고받지 못했으니까. 그 순간 나는, 이 악역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사는 법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람들은 목적이 없어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거야. 내가 할머니를 처음 뵀을 때 아무 목적 없이 할머니를 데려왔던 것처럼.”
“네가 우리 할머니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게 정체를 들키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우리 할머니 걱정을 하다니…… 우리 할머니를 도운 걸 후회하지 않나……?”
“내가 그날 할머니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잘못되셨을 텐데. 당연히 후회 안 해. 난 정말 이 저택에서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할 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어서 말해 줘. 할머니는 어떠셔?”
시카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나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는 2주 정도 지나면 돌아오실 것이다.”
“오래 걸리네. 그럼 그때 공작저의 안주인으로 할머니를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어.”
“파티라도 할 작정인가?”
말은 저렇게 해도 시카르는 할머니의 안부를 물어 봐주는 내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물론 태어나서 고마운 게 뭔지를 느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탓에 그런 감정을 완전히는 모르고 있겠지만.
“오순도순 모여서 옛이야기도 하고, 같이 뜨개질도 하고 그러려고.”
“뜨개질이라니. 비카는 죽고 싶다고 하겠지만, 할머니께서는 좋아하시겠군.”
마치, 자신은 뜨개질을 안 할 것처럼 구는데, 나는 할머니에게 말씀드려서 시카르도 뜨개질을 시킬 생각이었다. 뜨개질하는 시카르와 비카라. 정말 재미있겠는데.
“어서 자라. 내일 레카도르로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오늘따라 왠지 걸어 나가는 시카르의 뒷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 다음 날. 우리는 듀리온과 비카를 대동하고 구빈원으로 들어갔다. 키안도 함께 왔지만, 키안은 일 처리가 끝난 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비카가 잠의 정령을 불러내 키안을 마차 안에 재운 후에 우리를 따라 구빈원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백발의 엘프, 비카를 보고 넋을 놓고 있었다. 원장은 정신없이 뛰어나와 시카르를 알아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브……블레이크 공작님 아니십니까……!”
“네가 이곳 구빈원을 운영하는 원장인가?”
이미 내 기억을 통해서 다 봐놓고도 시카르는 한 번 더 확인했다.
“네. 공작님. 미진하지만, 제가 이 구빈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카르는 원장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옆에 있던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깜짝 놀라 해서 나는 아이를 향해 윙크했다.
“괜찮아. 네가 예뻐서 손을 잡아주시는 거야.”
그러자 아이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시카르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잠시 침묵하더니, 서늘한 눈으로 원장을 쳐다보며 이를 갈듯 말했다.
“어제 우리 소공자가 이곳 아이들에게 선물해준 장난감을 모두 다시 뺏어갔군.”
자신은 전혀 아무 죄가 없다는 듯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던 원장은 화들짝 놀라 꽉 잡은 두 손을 떨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아이들은 원장이 다시 장난감을 뺏어갈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고도 기분 좋아하지 않았던 거구나.’
새삼 어제의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라 씁쓸했다. 시카르는 아이의 팔 하나만 잡고 어제 있었던 일을 계속 얘기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귀신에라도 쓰인 사람 같았기에 원장은 두려움에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레카도르의 백성들은 시카르가 사람들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지만, 적어도 시카르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소문쯤은 들었기에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 장난감은 왜 다시 뺏은 거지? 다시 팔기 위해 뺏은 건가?”
“아, 아닙니다! 아이들의 선물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보관을 해둔 겁니다!”
“알아보니 레페르 구빈원에서 후원금을 꽤 많이 받았던데, 아이들은 아무 지원도 못 받았더군.”
시카르는 다시 무심한 얼굴로 아이의 팔을 놓았다. 나는 아이가 또 당황하지 않게 시카르가 놓은 팔을 잡아주며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시카르는 조금 귀찮다는 말투로 원장을 보며 말했다.
“원장.”
“네. 네 공작님.”
“받은 후원금은 모두 어쨌지?”
“바, 받은 후원금이라니요…… 그, 그런 건 없습니다!”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낮고 묵직하게 울리는 시카르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오싹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장은 팔과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으면서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시카르는 적군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려 할 때, 굳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상대를 만지지 않았다. 상대의 목숨을 끊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아무래도 지금, 그렇게 원장의 기억을 읽어내려 하는 것 같았다.
‘말려야 해!’
역시나 시카르는 원장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위해 검을 꺼내려 했다. 그래서 나는 온몸을 던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거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아, 안돼 시카르!”
“비켜라.”
나는 시카르의 팔을 잡아당겨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면 안 돼. 여기 애들이 있잖아! 애들이 놀란다고!”
“그럼 나더러 저 더러운 인간의 살아 있는 피부라도 만지란 소리야?”
“아니. 방법이 있어!”
나는 손을 뻗어 원장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순식간에 내게 머리를 쥐어뜯긴 원장은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휘청거렸다.
‘나도 폭력을 지양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아악. 공작부인! 왜 그러세요!”
‘당신 살리려고. 죄는 밉지만, 그래도 생명은 귀하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해요!”
“사, 살려주세요! 공작부인!”
‘내가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당신이 안 죽는다고!’
나는, 시카르에게 잡고 있는 원장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머리카락을 잡으면 되잖아.”
시카르는 냉큼 머리카락을 받진 않았다. 원장이 계속 고함을 빽빽 지르자, 칼등으로 원장의 목 뒤를 툭 쳐서 기절시킨 후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건 그렇겠지.”
원장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시카르는 조용히 기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놀란 아이들을 달래주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야. 공작님께서 잠시 마법을 부린 거야. 곧 마법이 끝나고 원장도 깨어나면, 공작님께서 맛있는 초코케이크를 사주실 거야.”
초코케이크란 말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초코가 최고지.
“와아! 초코케이크라니!”
초코케이크는 역시나 위대했다. 아이들은 원장이 쓰러진 것은 벌써 잊었는지 초코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잡고 있던 원장의 머리카락을 내려놓은 시카르는 곧장 듀리온과 비카에게 지하를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터는 건 내가 잘하지!”
듀리온은 모처럼 몸을 풀어서 기분이 좋다는 듯 뛰어갔지만, 비카는 귀찮은 얼굴로 설렁설렁 걸었다.
“그럼 너 혼자 가서 다 수색해. 귀찮아.”
비카와 듀리온은 금세 지하에서 원장이 숨겨놓은 돈을 찾아왔다. 그동안 후원받은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온 거였다.
‘시카르가 원장을 단죄하는 모습은 키안이 보는 게 좋겠지. 이런 정의로운 모습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어.’
비카에게 일러 마차 안에 있는 키안을 깨워 데려오게 했다. 키안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두 눈을 비비며 걸어오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원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키안. 시카르가 나쁜 사람을 혼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조금 여는 거야.’
시카르는 또 칼을 들어 원장의 턱 끝에 대려고 했다가 아이들이 본다는 내 말이 떠올랐는지 다시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이건 모두 후원받은 돈을 빼돌린 것들이겠지?”
“고……공작님. 사, 살려주세요! 제가 돈을 빼돌린 경위를 모두 설명드릴 테니…… 제발…….”
“네가 돈을 왜 빼돌렸는지, 네 생사 여부가 어떻게 되는지 내 알 바 아니다. 이제 곧 수도 경비대가 도착할 테니 가서 말하라.”
“모두 사실대로 말하고 돈도 드릴 테니 한 번만 봐주십시오. 공작님!”
원장은 숨겨둔 돈이 탄로 나자 허탈해진 듯 자신의 여죄까지도 낱낱이 이실직고하며 제발 경비대에 만은 넘기지 말아 달라 애원했지만, 시카르는 정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수도 경비대에게 원장을 넘겼다.
“이제 남은 일들은 수도 경비대에서 해결할 테니 우린 이만 나가지.”
“아, 안 돼. 아이들을 봐.”
나는 시카르의 팔을 붙잡았고, 눈치가 빠른 시카르는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지?”
“그건…….”
내가 설명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시카르는 내 손을 붙잡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초코케이크를 사줄 거라고 했던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며 슬쩍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사주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정말 안 사줄 생각이야?”
“내 영지민들도 아니고,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에게, 내가 왜?”
“왜냐면, 애들이 울 거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없지 않을 텐데?”
나는 아이들 슬쩍 둘러 보았다. 아이들 중에는 반드시 엄청난 울보가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이 중에 가장 울보가 누가 있을까. 돌아보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아이가 한 명 보였다. 아이들을 울리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한 번 울고 초코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지. 나는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이에게 다가가 오늘 초코케이크는 못 먹게 됐다고 말했다.
“왜, 왜요?”
나는 한없이 슬프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미안해…….”
예상한 대로 잔뜩 기대를 했다가 초코케이크를 못 먹게 된 아이의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초코케이크를 먹을 수 없대……! 으아앙……!”
좋아. 아주 씩씩하게 잘 우는군. 곧, 한 아이의 울음은 다른 아이들에게로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그러니까, 곧 구빈원 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말이다.
“으아앙……! 초코케이크……!”
나는 피곤한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시카르를 보며 잔뜩 인상을 구겼다.
“난 네 칼보다 애들 우는 게 더 무서운 사람이야. 그러니 케이크를 사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