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주인공을 위한 빌드업 (1)2021.09.20.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절친의 정보는 팔 수 없다는 건가?
“제가 원하는 건 엄청난 정보는 아니에요. 그냥 후작님께서 요즘 뭘 하시는지, 아직도 국왕의 근위대가 유카나다르에서 금발의 소년을 찾고 있는가 하는 정도거든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원작에서처럼 레이독스가 제르미에게 부탁해 어떤 죽은 소년을 키안으로 둔갑시켰느냐, 아니냐 하는 거였다. 원작에서 길리언이 키안을 찾는 걸 멈춘 이유가 그들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된 어떤 소년을 키안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으니까.
“네. 아직 금발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찾는 걸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모두 잡아들이고 있는 중이죠. 이곳은 어떻습니까?”
“블레이크에는 금발 머리를 가진 아이가 없어요.”
“그렇군요.”
이들이 아직 아무도 키안으로 위장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국왕이 금발 머리 아이를 찾는 걸 막을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요?”
“아시다시피 유카나다르에는 금발 머리의 아이들도 많고, 많은 아이가 매일 질병으로 죽어가죠. 그중 한 아이를 키안으로 둔갑시키세요.”
제르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죽은 아이를 이용하라는 말입니까?”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저도 마음이 좋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다른 살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에요. 제르미님께서 보신 왕족의 문장을 죽은 아이의 목 뒤에 새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의 시신은 화장이 아니라, 왕궁 안에 고이 묻히게 될 테니까요.”
원작에서도 나중에 키안이 아이의 시신에 고마움을 느끼며 왕궁에 계속 두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람 좋게 웃기만 하던 제르미의 얼굴에 조금은 불편한 기색이 엿보였다.
“왕손 저하 때문은 아니고요?”
“물론 그것도 맞아요. 왕손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금발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죠.”
“레이독스에게 전달은 해보겠습니다.”
“후작님께 이것도 전달해주세요. 루시의 가출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요. 루시의 가출을 멈추기 위해 아이를 가둔다면, 그건 학대가 될 거예요. 루시의 가출을 멈추게 하고 싶으시다면, 왕손 저하에게 왕세자 수업을 시키는 게 좋을 거라고요.”
“그건 저조차도 납득이 안 되는 말이군요. 루시의 가출이 왕손 저하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죠?”
“루시가 가출할 때마다 왕손 저하께서 안전하게 잘 데리고 올 테니까요.”
제르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얼굴을 긁적거렸다.
“레이독스 말로는 공작부인께서 미래를 보신다고 하더군요. 혹시…….”
제르미는 말을 하려다 말고 내 눈치를 살피다 시선을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제 미래도 보이십니까?”
원래 미래라면 알겠지만, 이젠 미래가 바뀌어서 나도 모르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의 미래를 볼 수는 없어요.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제르미 님의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르미는 정말로 실망한 것 같았다. 조금은 기대에 차 있던 눈꼬리가 금세 내려갔으니까. *** 수련의 방을 온갖 마법의 방으로 변신시킨 제르미는 꽤 많은 돈을 받았다. 그리고 제르미가 떠난 그날, 저녁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한바탕 폭설이 내려 우리는 며칠간 공작저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마차가 다닐 수 없는, 정말 엄청난 폭설이었다. 나는 이 폭설이 언제 그치려나 하는 마음으로 키안과 함께 창밖을 보고 있었다. 듀리온은 밖에서 장작을 가득 들고 와 벽난로에 하나씩 넣으며 하품을 하다가 우리가 신경 쓰이는지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말했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가 눈썰매를 끌고 가서라도 사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듀리온 필요한 건 없어요. 키안에게 밖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던 것뿐이라서.”
“아. 도련님께서 이곳에 온 뒤로 외출을 한 번밖에 못 하셨죠.”
듀리온도 외출을 한 번밖에 못 한 키안이 신경 쓰이는지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다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밝은 얼굴로 말했다.
“흐음…… 그럼 혹시 얼음 낚시터는 어떨까요? 꽤 재미있을 거라고 보장합니다!”
괜찮겠는걸. 낚시는 키안이 해본 적이 없잖아? 나는 듀리온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그거 괜찮은데요? 키안은 어때?”
“저도 좋아요! 낚시는 동화책에서만 봤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시카르도 불러야겠다.
“시카르는 자금 어디 있죠?”
“수련의 방에 계신 데 모셔오겠습니다.”
“좋아요. 밖에 날씨가 많이 추울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하자고요!”
*** 으어어어…… 이,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는데?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지만, 아무리 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도 화목난로도 없는 데다 핫팩도 하나 없으니 너무 추웠다. 얼음 낚시터에 간 나는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서 몸을 덜덜 떨며 후회했다.
“듀리온. 얼음낚시가 원래 이렇게 추운 건가요? 혹시 여기에 화목난로 같은 건 없나요?”
“저희도 얼음낚시가 처음이라 이렇게 추운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마님. 화목난로는 지금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듀리온은 화목난로를 가져오기 위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시카르는 별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얼어있는 걸 보니 그도 춥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은 아예 나오지 않은 비카가 가장 부러웠다. 그래도 다행인 건 키안이 매우 즐거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너 빼고 우리 다 고생이다. 들어가서 몸 좀 녹였다가 다시 나오자는 말이 절로 나오려는데, 키안의 낚싯대에 입질이 들어왔다.
“이것 좀 보세요! 고기가 잡힌 거 같아요!”
꽤 큰 놈이 걸렸는지 낚싯대가 힘차게 움직였다. 키안이 작은 몸집으로 온 힘을 다해 낚싯대를 잡고 있었다. 나는 추위도 잊고 달려가 키안의 낚싯대를 같이 잡아 올렸지만, 내 힘 하나 보태는 것 정도로는 낚싯대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보던 시카르가 걸어와 함께 낚싯대를 잡자마자 낚싯바늘을 물고 있는 커다란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와! 엄청 큰 물고기예요!”
“대어다! 대어!”
키안이 잡은 물고기는 제법 큰 놈이었다. 아직 아무도 고기를 낚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키안 만이 커다란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키안! 이렇게 낚시를 잘하다니. 정말 대단한걸?”
“저 살아 있는 물고기는 처음 봐요. 너무 신기해요. 물고기가 이렇게 큰 줄 몰랐거든요.”
“물고기는 원래 이렇게 크지 않아. 키안이 큰 물고기를 잡은 거지.”
“정말요?”
“그럼. 키안이 대단한 거야. 못하는 게 없는걸?”
내가 기뻐하는 키안을 칭찬하는 동안 시카르는 물고기를 양동이에 던지며 일어섰다.
“이제 물고기도 잡았으니 이만 들어가지.”
시카르의 말을 듣더니 키안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저, 몇 마리만 더 잡고 들어가면 안 돼요? 낚시가 너무 재미있어서요…….”
양동이를 들고 몸을 움직이던 시카르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멈칫거렸고, 나는 그런 시카르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못할 거 없지. 시카르! 키안이 낚시 좀 더 하고 싶대! 키안와 잘 놀아 줄 거지?!”
아무래도 시카르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내가 그에게 키안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라고 소곤거렸던 탓인지 발걸음을 다시 되돌렸다. 아무리 봐도 추워서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린 키안도 춥다고 하지 않는데 시카르 성격에 자존심이 상해서 곧 죽어도 춥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키안이 추위를 덜 타는 이유는 설산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시카르가 그 사실을 깜빡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 난 이만 너무 추워서 먼저 들어가 볼게. 키안, 물고기 많이 낚아와. 아주 큰 놈으로 말이야.”
“네. 오늘 저녁은 제가 만든 맛있는 물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볼게요!”
나는 기특한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룰루랄라 저택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숄을 걸친 후 따뜻한 코코아 차를 한잔 마시고 나니 그렇게 졸릴 수가 없었다. 역시 등 따시고 배부른 게 최고라니까. 나도 모르게 슬며시 낮잠에 빠진 사이, 낚시를 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왔다.
“이것 보세요! 마님! 양동이가 가득 찼어요!”
듀리온이 들고 온 양동이 안에는 정말 대어가 가득했다.
“물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잡은 거예요?”
“네. 이거 모두 도련님께서 잡으신 거예요! 이거, 이거, 이거 이 큰놈들 전부 다요!”
우리가 낚시터를 갈 때 각자 다른 양동이를 가지고 갔었다. 듀리온과 시카르의 양동이가 가장 컸고 중간 크기의 양동이는 내 것이었고 가장 작은 것은 키안의 것이었다. 듀리온이 큰 물고기들이 있다고 가리킨 것은 모두 듀리온과 시카르의 양동이 안에 있는 커다란 물고기들이었다. 나는 제일 작은 키안의 양동이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도 다 키안이 잡은 거예요?”
듀리온은 흠칫거리며 시카르를 슬쩍 쳐다보았고,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거실을 나갔다. 그러자 듀리온은 나를 향해 속삭였다.
“그건 공작님께서 잡으신 거예요.”
그래서 나간 거군. 이 어린아이에게 낚시에서 졌으니 자존심 좀 꽤 상했겠는데? 나는 공작부인의 체면상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키안을 향해 미소지었다.
“우리 키안 덕분에 오늘 저녁은 정말 다양한 물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겠는걸?”
키안은 기분이 좋은지 수줍게 미소지었다.
“제가 어른이 되면 직접 낚시한 물고기로 꼭 직접 요리를 해 드릴게요!”
“키안. 이미 맛있는 요리를 얻어먹은 것과 다름없을 거 같아.”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정말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키안을 꼭 안아주었다. 그런데 키안의 몸이 조금 뜨거웠다.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이 조금 나고 있었다.
“키안. 열이 나는데?”
내 말을 들은 듀리온도 놀란 듯 다가와 키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 정말 열이 나는데요?”
“추운 데 있다 와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볼도 조금 상기돼 있네? 정말 괜찮아? 키안?”
“네! 정말 괜찮아요. 어머니!”
키안이 씩씩하게 웃기만 해서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그저 일시적으로 생긴 열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키안이 잡아 온 물고기로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밤에 키안을 재우고 난 후 돌아서려는데, 키안이 뭔가 이상해서 이마를 만져보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는 시카르에게 키안의 상태를 알렸다. 방으로 온 시카르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고?”
“아까는 조금 열이 나는 것 같았거든? 근데 지금 열은 안 나는데 식은땀만 흘리고 있어.”
“아까는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와서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지금 아무 이유도 없이 식은땀을 흘리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
시카르는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이건, 몸보단 정신적인 문제인 것 같다.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겠다. 키안의 꿈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