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주인공을 위한 빌드업 (2)2021.09.23.
무섭게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시카르의 손도 없었다.
“시, 시카르! 어디 있어?!”
“걱정 마라. 여기 있다.”
“어디?!”
“나는 너를 통해 키안의 꿈속을 들여다볼 뿐. 함께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내 목소리를 듣고 키안의 꿈을 따라가.”
“어, 어딜 따라가야 해?”
“앞을 봐.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걸 따라가.”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정말 무언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나타났다.
“이, 이것들은 다 뭐야?”
“글쎄. 키안이 두려워하는 작은 기억의 조각들 같은데, 잘 모르겠군. 더 들어가 봐라. 겁먹지마. 내가 보고 있다. 여차하면 끄집고 나올 테니까. 계속 가. 아니면 키안이 어떤 상황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
내가 어른이라고 해도, 나도 무서운 건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어두운 길은 너무 무서웠다. 그러다 보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더 걸어가.”
“어, 얼마나 더 가야 해?”
“거의 다 왔어.”
조금 더 다가가니 이번엔 눈앞으로 하얀 무언가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들은 모두 늑대였다.
“설산의 하얀 늑대들이군. 하지만, 널 해치지 않을 테니 그냥 무시하며 지나쳐라.”
“나, 날 해치지 않는다고?”
“그래. 키안이 널 적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그들은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오직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하얀 늑대들의 경계에 내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한 발 앞으로 내디디고 있으려니, 누가 내 손을 슥 잡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서 옆을 보니 시카르가 내 곁에 있었다.
“여긴 올 수 없다며?”
“이놈들은 키안이 두렵고 무서워하는 존재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러니 널 공격하겠지. 이곳이 아무리 꿈이라도 네가 다친다면, 정신적 데미지가 커진다. 이건 네 꿈이 아니니까.”
스르릉. 신경을 자극 시키는 금속성의 쇳소리는 시카르가 검을 빼 든 소리였다. 그가 검은 빼 든 그 순간, 하얀 늑대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카르는 나를 제 뒤로 숨기며 달려드는 정령들을 베여나갔다. 칼에 베인 늑대들은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고개 들지 마! 끝날 때까지 내 등에 얼굴 묻고 가만히 있어!”
시카르의 고함 소리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우레와도 같았다. 나는 등에 얼굴을 처박으며 옷깃을 잡고 모든 상황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다. 앞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동작에 팔과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곧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시카르의 달뜬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아…… 하아…….”
눈을 떠보니 시카르의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괘, 괜찮아……?”
“괜찮다. 이 정도는.”
하지만, 시카르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늑대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시뻘건 피가 그의 눈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저……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여기가 꿈이라서 괜찮다. 밖에 나가면 아무렇지도 않아.”
“정밀이야?”
“그래.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따라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카르의 팔을 꼭 잡으며 그를 따라갔다.
“설산의 늑대들은 불의 정령사를 위협하지 않는데, 키안이 설산의 늑대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막연히 설산에 갇혀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군.”
“키, 키안은 어디 있어? 또, 그 절벽에 있어?”
“오늘은 저기 있군.”
키안……? 키안이 있는 곳은 설산이었다. 키안은 설산 한 가운데서 발리제를 찾고 있는 듯했다.
“왜 키안이 저기서 발리제를 찾는 거야…… 원작에도 이런 건 없었는데…….”
“그저 악몽을 꿨다고만 나왔을 뿐, 꿈 내용을 일일이 묘사하진 않았던 거지.”
“발리제가 그리워서 저러는 걸까?”
“그것보단 발리제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겠지. 아무리 일곱 살 꼬마라고 해도 제 아빠가 저를 지키다 죽었는데, 요즘 우리와 행복하게 지냈던 자신을 조금씩 경멸하고 있었던 거지.”
시카르는 거기까지 말하고 돌아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야. 시카르?”
“그래서 오늘 이곳에 키안이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것들이 바글바글한 것 같군.”
“무슨 소리야? 그게?”
고개를 돌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의 무언가들이 보였다.
“이, 이것들이 다 뭐야?!”
“보지 마! 네가 무서워하는 것을 알면 네게 달려드니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어라!”
그래서 좀 전에도 고개를 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거였어. 눈이 마주치면 내게 달려드니까! 나는 손으로 귀를 막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시카르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한 팔로 나를 꼭 끌어안고 달려드는 무형의 것들과 싸웠다. 시카르의 팔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무수한 금속의 마찰음과 살갗이 할퀴는 날카로운 소리와,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시카르가 휘청거리며 손에 든 칼을 바닥에 짚었다. 눈을 떠보니, 검은 형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고 시카르의 배와 팔, 목 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 시카르! 괜찮아?! 네가 겁을 먹는 것도 아닌데 저놈들이 왜, 네게 덤비는 거야?!”
시카르는 숨을 헐떡이며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난 이곳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저것들을 없앴으니 이제 키안에게 가봐라.”
“아…… 알았어. 근데 정말 너 괜찮은…….”
말을 하는 동안 시카르는 희미하게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봐. 돌아보니, 키안이 발리제와 함께 살았던 바하라 설산에 있는 오두막이 보였다. 키안은 오두막 데크에 앉아 울고 있었다.
“키안!”
울고 있는 키안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갑자기 또 장소가 바뀌었다. 오두막은 사라지고 없는 어두운 숲속이었다.
“아래를 쳐다봐!”
고개를 숙인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로 절벽에 매달려 버티고 있는 키안이 보였다. 아이의 죄책감이 절벽으로 떠민 것 같았다.
“키안!”
나는 곧장 엎드려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키안! 내가 왔어! 내가 널 찾으러 왔어! 내 손 꽉 잡아!”
키안의 두려움과 죄책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의 보고 있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
“그래, 나야.”
“어, 어머니. 여긴 위험해요. 어서 이 손을 놓고 도망가요! 어머니!”
“아니. 나는 괜찮아. 여긴 안전해, 키안. 너도 안전하단다. 그러니 내 손 잡고 어서 그 절벽에서 나와야 해!”
하지만, 키안은 내 손을 잡고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등 뒤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설산의 하얀 늑대들이었다.
“조금만 더 견뎌! 비록 발리제는 구하지 못했지만, 너라도 구하고 나면 키안의 죄책감이 덜어질 테니까! 키안 스스로 저 절벽에서 벗어나게 해야 해! 그러니까! 눈 감아!”
나는 시카르에게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안 돼요! 어머니! 안 돼! 내 어머니를 내버려 둬! 내버려 두란 말이야!”
키안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 소리가 찢어지게 울렸다.
“내 어머니를 놔둬! 내 어머니만큼은 놔두란 말이야!”
그때, 늑대가 내 등 뒤를 밟고 올라서는 게 느껴졌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그 순간, 키안이 절벽을 짚고 올라섰다.
“내 어머니를 건들지 말란 말이야!”
어느새 키안의 손에 생겨난 정령들이 내 등 뒤로 올라탄 늑대들을 덮쳤다.
“화르륵!”
등 뒤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나는 시카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키, 키안은 어떻게 됐어?”
“봐라. 앞에 있다.”
앞을 보니 키안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다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엔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데다 정신이 없어서 잘 보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목 옆구리에서도 뜨거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시카르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이었다. 하물며 그는 죽을 때조차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냉혈한 중의 냉혈한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늘 냉정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으니 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괜찮다며? 꿈이라서 괜찮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피를 흘려? 지, 지금도 꿈인 거야? 그래서 이런 거야? 말해봐. 너 왜 이렇게 피를 흘리는 거야!”
“네 말대로 거짓말한 대가를 치르는 거겠지.”
“지금 농담이 나와?!”
그러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이만한 일로 눈물을 보이다니. 하여간, 넌 참 날 좋아한단 말이지. 내가 죽을 때 우는 걸로 모자라서 이젠 다쳐도 우는 건가. 내가 다칠 때마다 짖어대던 해피보다도 더 칭얼대는군.”
“슬퍼서가 아니라 놀라서 우는 거야! 기다려 봐! 사람들 불러올 테니까!”
시카르는 일어서려는 나를 붙잡고는 쓰러지듯 내려앉으며 침대에 몸을 기댔다.
“누굴 불러오게?”
“모, 몰라. 어쨌든! 누구든 불러와야 할 거 아니야!”
“악역이 득실한 이 소굴에서 이런 상처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냥 내 방에서 포션 하나만 들고 와라.”
‘맞아. 시카르는 부하들이 다칠 때마다 책상 서랍에 둔 포션을 먹여 치료한다고 했었지!’
나는 곧장 뛰어가 시카르의 방에서 포션을 찾아 그에게 먹였다. 그러자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 가는 것이 보였다.
“하루 정도만 푹 자고 나면 낫게 되니 그만 울어라.”
“놀라서 우는 거라고! 놀라서!”
그때 키안이 깨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시카르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몸을 더 낮게 낮춰 나를 향해 ‘쉿’ 하라는 제스처를 하며 침대 밑으로 숨었다. 잠에서 깨어난 키안은 나를 보자마자 정신이 깬 듯, 벌떡 일어나 앉아 나를 껴안았다.
“어! 어머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키안을 껴안아 주었다.
“이 식은땀 좀 봐.”
“저, 꿈에서 어머니를 봤어요.”
“정말?”
“네!”
키안은 나를 꼭 껴안으며 얼굴을 부비고 들어왔다.
“어머니가 나쁜 것들로부터 저를 지켜줬어요.”
키안은 자신이 날 지켜준 것을 내가 지켜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야? 그거 정말 다행인데. 우리 아들은 현실에서 항상 날 지켜주고 있으니까 꿈에서라도 내가 지켜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키안은 정말 그렇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머니를 지켜줬어요……?”
“그럼. 항상 날 지켜주는걸. 네가 아니었다면 난 정말 외로웠을 거야. 늘 나를 지켜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제가 어머니를 지켜 드릴게요.”
설산 속에서 오직 아빠와 단둘이 자란 키안에게는 발리제 뿐이었다. 그런 아빠를 한순간에 잃은 키안이, 당연히 그렇게 쉽게 발리제를 잊었을 리가 없었을 텐데.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너무 무신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느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던 키안이, 오늘 같은 악몽을 꿈을 꾸게 되었던 거겠지. 시카르의 도움으로 꿈속에 오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키안의 속마음이었다. 나는 오늘 키안이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