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주인공을 위한 빌드업 (3)2021.09.27.
키안을 재운 후 방으로 돌아온 나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가 가졌을 죄책감의 무게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엉엉 울고 있는데, 잠옷 차림의 시카르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그만 울지. 비카가 너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군.”
“그럼, 내 방에도 방음 마법을 설치하면 되잖아. 흐엉…….”
“대체 왜 그렇게 우는 거지?”
“어린 키안이 너무 가여워서 그래. 훌쩍.”
“겨우 그런 걸로 이렇게 눈물 바람이라고?”
“겨……겨우라니?! 그 어린 애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게 신체로 발현이 됐겠냐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아,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맞지?
“정말 너는 쓸데없이 눈물이 많아.”
“이건 쓸데없는 눈물이…… 아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시카르의 얼굴이 이상했기에 나는 그를 피하듯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그의 얼굴은 그와 어울리지 않게도 약간 볼이 빨개진 게 수줍어 보였다. 왜 이런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걸어오는 건지 궁금해하던 그 순간. 시카르가 자신의 가슴으로 내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니까 나를 품었다는 말이다. 그리곤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물론 기계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어쨌든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마저 뚝 끊겼다.
“뭐, 뭐 하는 거야?”
“아이들이 울 때마다 네가 이렇게 안아주니까 아이들이 눈물을 뚝 그치더군. 그래서 따라 해본 건데. 확실히 효과가 좋군.”
시카르는 나를 품에서 떼어 내며 자신의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다음에도 울면 이런 식으로 그치게 해야겠군. 방법이 간편해서 좋아.”
‘내가 아이들을 달랠 때 쓰던 것을 얘는 이렇게 응용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곧 소름이 돋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나는 아이들을 달래 준 뒤 아이들이 울음을 멈추고 나면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으니까.
‘설마, 내 이마에 뽀뽀할 건 아니지?’
나는 혹시나 모를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듯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다행히 시카르는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조건 다 따라 하는 건 아니지. 시카르의 목적은 나를 달래는 게 아니라 그냥 울음만 그치게 하는 거잖아.’
그런데, 곧 돌아서 나가던 시카르가 다시 돌아왔다.
“참. 한 가지 잊었군.”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 때,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무리는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거더군. 그래야 애들이 다시 울지 않나 보지?”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섰다.
“영광인 줄 알아. 우리 해피도 내 뽀뽀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물론 해피는 너처럼 울지도 않았지만. 그럼 난 다시 가겠다. 잘 자도록.”
시카르는 일을 잘 해결해서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방을 나가려 했기에 나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
“왜.”
“아까, 다친 건 괜찮아……?”
시카르는 내 볼을 꼬집으려 몇 번 흔들었기에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뭐 하냐……?”
“네 기억에 보니, 네가 사는 곳 인간들은 인간이 귀여울 때 이렇게 볼을 꼬집더군.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주니 나도 귀여워 해주는 것이다.”
“이거 놔.”
시카르는 피식 웃으며 자신은 멀쩡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이런 걸로 앞으로 널 울리진 않을 테니까. 그럼 이제 자도록.”
시카르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방을 빠져 나갔다. 걱정된 거 운 게 아니라 놀라서 운 거라고 몇 번을 말하냐고. 근데, 그 말도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정말 놀라서 운 건지, 시카르가 걱정돼서 운 건지 나도 헷갈리는 것 같았다. *** 며칠 뒤, 눈이 많이 녹아내리고 레이독스가 공작저를 찾아왔다. 듀리온은 또다시 레이독스가 공작저를 찾아왔다며 놈의 목을 따 올지에 대해서 물었고, 시카르는 죽이지 말고 데려오라고 일렀다. 나는 ‘공작님이 죽이지 말랬으니 죽지 않을 만큼만 질질 끌고 다니다 데려와야겠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나가는 듀리온을 따라 나가 그를 불러세웠다.
“마님. 왜 그러시죠.”
“듀리온 님께 부탁이 있어요.”
“마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드려야죠. 무슨 부탁이십니까?”
“후작님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시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 매우 예의를 갖추고 있는 중입니다. 마님.”
응? 죽이지만 않으면 예의를 갖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제 보니 사고하는 게 시카르와 비슷하구나.
“듀리온 님. 후작님을 저번처럼 끌고 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를 대하듯 정중하게 대해주세요.”
듀리온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둘이 원수와 다를 바 없이 사이가 나쁘니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같은 아군이 될 사이니 이전처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후작님은 저희에게 큰 도움을 주실 분이에요. 특히 우리 소공자의 스승이 될 사람이랍니다.”
“그, 버터 같은 놈이 우리 도련님의 스승이 된다고요?!”
듀리온은 레이독스의 성격이 부드럽고 유순한 걸 빗대어서 자주 버터 같은 놈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듀리온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옹고집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 버터 같은 놈이 우리 고귀하신 도련님의 스승이 된다면, 우리 도련님도 버터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저는 반대입니다.”
“공작님께서 결정한 일이에요. 듀리온.”
듀리온은 그게 정말이냐는 듯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레이독스 놈의 집을 자주 오가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도련님의 스승으로까지 두려고 한다니…… 공작님께서는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듀리온 님. 공작님이 국왕 전하와 뜻을 함께한 이유를 기억하시나요?”
“그거야 미친 폐왕을 잡기 위해서 손을 잡았었죠……?”
“지금 공작님께서 후작님의 손을 잡으려 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지금의 국왕 전하와 맞서기 위해서 후작님과 손을 잡으려는 거죠.”
듀리온은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냐는 듯 입을 쩍 벌렸다가 갑자기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 겁니까?”
“국왕 전하께서 공작님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죽이려 하시니까요.”
“그렇다면, 레이독스와 손을 잡으면 공작님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 방법뿐이에요. 제 말이 다 믿기지 않는다면, 나중에 공작님께 물어보세요. 이 말을 제가 했다고 말씀하셔도 좋아요.”
듀리온은 시카르가 사람의 기억을 본다는 사실까진 모르지만, 세상에 시카르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도 거짓말을 할 때마다 들켜봐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듀리온은 내가 없는 말을 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매일 밤 내 기억을 점검하는 시카르도 오늘 밤이면 이 사실을 알게 될 테고. 듀리온은 나를 향해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마님을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부하신 대로 레이독스에게 예의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듀리온. 이전처럼 후작님을 끌고 오지 않고 정중히 모셔오길 부탁드릴게요.”
“믿어 주십시오.”
듀리온은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다시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시카르는 듀리온과 무슨 얘길 그렇게 길게 했냐고 묻고는 내 손을 붙잡았다.
“조만간 듀리온에게 말해 주려고 했던 것들을 다 말했군. 나쁘지 않아. 그런데, 듀리온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군.”
“응?”
“듀리온은 예의가 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비카와 같은 족속이지. 내가 그 녀석을 궁에 데려가지 않는 걸 보면 감이 안 오나? 소설에도 나와 있을 텐데. 듀리온은 예의를 모른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하는 거 보면 꽤 예의를 차리던데?”
“그건 예의가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지.”
“그럼, 예의를 모르는데 예의를 지키겠다고 말을 한 건 뭐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듀리온 그 녀석이 예의를 지키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할지 기대는 되는군.”
‘제발 저번처럼 레이독스를 끌고 오지만 말아라.’
잠시 후, 듀리온은 레이독스와 함께 나타났다. 다행히 듀리온은 이전처럼 레이독스를 끌고 오진 않았다. 다만 검집으로 밀며 들어오고 있었다. 시카르는 봤냐는 듯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너도 그냥 포기해라.”
시카르도 예의를 가르치다 포기했고, 그래서 그가 예의를 차린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는 말이라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니, 뭐 이런 악당들이 다 있냐고! 다행인 건 듀리온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레이독스는 이번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행여나 비카가 엿들을지도 몰라 레이독스와 함께 응접실로 갔다. 얼마 전에 제르미가 왔을 때 내 방과, 거실과 주방을 제외한 모든 방에 방음 마법을 설치했다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될지는 몰랐는데, 또 이렇게 공작님을 찾게 되었군요.”
“그러게. 오늘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왔군. 일단 앉아라.”
레이독스는 차분하게 앉으며 말했다.
“구빈원 얘기를 들었습니다. 공작님께서 그 나쁜 원장을 수도 경비대에 넘기셨다고요. 정말 의외의 소식에 믿기지 않더군요. 제가 아는 공작님께서는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한 일은 아니다. 키안이 한 일이지.”
“키안이라면…… 왕손 저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키안에게 왕세자 수업을 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면 난 널 볼 이유가 없는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시카르가 재미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리 키안에게 왕세자 수업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드디어 결정한 건가? 키안이 당신의 미래의 사위라고! 미래의 사위를 하루라도 빨리 가르쳐야지.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공작부인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 루시가 가출을 하지 않게 하려면 왕손 저하를 집에 들여보내라 하셨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인지요. 왕손 저하가 저희 집에 오는 것과 저희 루시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나는, 시카르를 보며 내가 대답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가 가출할 때마다 키안이 따라가서 데려올 거니까요.”
“그건 결국 가출을 막는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찾아올 뿐이지.”
“지금의 공작님이 키안의 친아빠가 아니란 것을 알면 루시가 동정을 느끼게 될 거예요. 그렇게 가출을 멈출 겁니다.”
레이독스는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가 그런데 약하긴 합니다. 어미 새가 없이 둥지에 홀로 남겨져 있는 아기 새들만 봐도 가여워하니까요.”
“그리고, 후작님께서도 이번 구빈원 일을 보며 똑똑히 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키안에게 성군의 자질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요. 그날, 전 키안과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갔었어요. 그동안 외출을 하지 못해서 첫 외출 겸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주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키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장난감을 갖고 싶어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이었어요.”
이 말은 레이독스도 좀 놀랐던 모양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장난감에 정신 팔려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데에 비해 우리 키안은 밖에서 장난감을 보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눈을 돌렸으니까. 그것도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말이다.
“누가 봐도 왕의 재목이지 않나요? 이런 왕손에게 왕세자 수업을 가르치는 일은 후작님께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네 미래의 사위가 될 아이라고. 그러니 고민 그만하고 어서 결정하란 말이야! 레이독스는 마치 내 속마음이라도 들은 듯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한번 왕손 저하를 맡아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