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주인공을 위한 빌드업 (4)2021.09.30.
드디어 기다리던 대답이 레이독스의 입을 통해 나오자, 나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한 번 더 확인했다.
“정말이죠?”
“제가 어떻게 감히 공작부인께 거짓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치. 여기가 헛소리를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니지.
“참, 보내주신 장난감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더군요. 무엇보다 공작부인께서 저희 아이들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계셔서 꽤 놀랐습니다.”
루시에게는 겨울 공주 인형을, 루이드에게는 장난감 활을 선물해 주었다. 두 사람이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저도 답례로 왕손 저하의 선물을 사려고 했지만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공작부인께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키안이 싫어하는 건 잘 아는데, 좋아하는 것들은 케이크 말고는 잘 모르는구나. 원작에서도 좋아하는 거라곤 무기연마, 기술연마, 정령술 연마, 온통 연마뿐이었으니…… 그나마 색종이 접기를 좋아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는 게 없네.
“아직 크게 좋아하는 게 없어요. 남자아이니 장난감 검으로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우리 키안은 언제부터 맡아 줄 생각이지?”
시카르는 키안에게 뭘 사주건 관심 없다는 듯 가장 시급한 것부터 물어봤고 레이독스는 조금 뜸 들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오십시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시카르 역시도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지.”
“그럼 전 왕손 저하의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키안을 만나게 되면 그런 호칭은 자제해라. 그 아이는 아직 꿈에도 자신이 왕족이라는 걸 모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드디어. 레이독스라는 큰 철옹성을 쓰러트렸다. 시카르는 큰 선심을 쓰듯 말했다.
“골치 아픈 것들이 얼추 해결됐으니 자유로운 외출을 허용하지. 하지만,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키안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지. 만약 탈주를 시도하다 잡히게 된다면, 지금처럼 편한 방이 아닌 새장 같은 철장 안에서 지내야 할 테니까.”
그러고도 남겠지. 그래서 난 애초에 도망갈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는 키안을 최대한으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뭘 해도 멋진 키안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주인공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잘 보여야 했으니까.
“메이리. 네가 볼 땐 어때?”
“도련님이야 언제나 멋지시죠.”
“그건 그렇지?”
“네. 그럼요! 전 이곳 블레이크 땅에서 저희 도련님처럼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본 적도 없는걸요.”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오늘은 이렇게 입고 나갈까?”
털 커프스가 달린 털코트를 입고 있는 키안의 모습은 정말 누가 봐도 왕손 같았다.
‘루시야. 기다려주련. 지금 우리가 너의 남자주인공을 데리고 가니까!’
키안은 모처럼의 외출이 설레는 듯 마차 안에 타자마자 밝은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니. 오늘은 어디 가는 거예요?”
“공부하러 가는 거야.”
“공부요?”
“그럼. 이제 우리 키안도 공부를 해야 할 나이인걸. 그리고 이제 친구도 생기고 스승님도 생기게 될 거야.”
“친구요……?”
“그래. 마침 후작님의 쌍둥이들이 너와 나이가 똑같다는구나.”
이제 막 친구를 사귀며 사회성을 익힐 나이에 설산과 공작저에서만 지냈으니 키안에게 친구란 존재는 신기루 같은 존재일 것이다. 구빈원에 갔을 때도 키안은 또래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쉽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키안은 조금 망설이는 얼굴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은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키안. 친구란 존재가 어렵게 느껴지지?”
키안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처음엔 원래 다 어려운 법이야. 공작저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하지? 그때도 매우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잖아. 너무 어려워하지 마. 키안과 같은 또래 친구들일 뿐이니까.”
그리고 어려워할 정신도 없을 것이다. 쌍둥이들이 허구한 날 싸워대서 그거 말리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그동안 가만히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던 시카르가 눈을 슬며시 뜨더니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제 대화를 다 끝낸 건가?”
나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카르는 옆에 있는 상자를 집어 키안의 무릎 위로 던졌다. 키안은 순발력 좋게 상자를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냉큼 손으로 잡았다. 내가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시카르가 말했다.
“필기구다. 어젯밤 급하게 구하느라 전달이 늦었군.”
필기구라니! 항상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가장 들뜨는 선물이 필기구였던 때가 떠올랐다. 키안도 필기구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들뜬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지금 당장 이것을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와 같은 눈빛이었기에 나는 당장 지금 열어봐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며 함께 필기구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각종 색연필과 물감 크레파스 노트 등등 필기구들이 가득했다. 그 중엔 지우개도 있었다.
“이것 봐. 키안. 이건 지우개야.”
“와…… 지우개가 곰 모양이에요.”
“우리 키안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고 공작님이 사주셨으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야 돼. 알았지?”
“물론이죠.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시카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키안와 나는 한창 필기구를 구경하다가 자주 하는 외출이 아니어서 그런지 마차 밖 풍경을 보느라 금세 시선을 빼앗겼다. 아직 녹지 않는 눈들이 하얀 설탕처럼 뿌려서 있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달그락달그락 말발굽 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어디론가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될 것만 같은 설렘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루함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키안은 내심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것에 설레었을 테고, 나는 루시와 키안이 만난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 주인공들이 만나는 대망의 시간은 금세 찾아왔다. 우리는 후작저 응접실에 앉아 레이독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키안에게 소개해 주길 고대했지만, 그는 혼자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블레이크 공작님, 공작부인. 그리고…….”
레이독스는 키안을 보며 ‘왕손 저하시군.’이라고 말하듯 황공한 얼굴로 인사했다.
“블레이크 소공자님. 유카나다르 후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카르는 레이독스의 기억을 보기 위해 그와 악수를 나눈 후 말했다.
“자넨 항상 겉과 속이 같군. 그것도 투명할 정도로 말이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 말은 곧, 레이독스가 하는 말과 그의 성품이 일치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레이독스가 청렴결백하다는 말이니 칭찬은 분명했다. 나는 어정쩡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키안에게 슬쩍 말했다.
“키안.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후작님.”
“반갑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막상 레이독스와 인사를 나누는 키안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늘상 시카르가 했던 말처럼 키안에게는 품위와 위엄이 베여 있었다.
“후작님. 쌍둥이들은 어디 있죠?”
쌍둥이 얘기를 꺼내자마자 한숨을 쉬는 레이독스를 보며 그가 오늘도 얼마나 육아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공작부인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아침부터 싸워서, 지금은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서 반성하는 중입니다.”
역시 오늘도 싸웠구나. 서로 취향에 맞는 선물을 줬는데도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운 건가. 하필 내가 보낸 선물 때문에 싸울 건 뭐람. 레이독스는 무언가 생각난 듯 하인을 불렀고, 잠시 후 하인이 장난감 검을 가지고 들어왔다. 레이독스는 장난감 검을 키안에게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선물이란다. 받아 주겠니?”
장난감 검이지만, 키안은 마음에 드는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든 후 미소를 지었다.
“매우 마음에 드는군요. 유카나다르 후작님.”
“키안. 앞으로는 후작님께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좋아.”
원작에서도 그렇게 불렀으니, 그런 호칭을 쓰는 게 더 친해질 수 있는 지름길일 수도 있겠고 말이지. 레이독스는 얼마든 그렇게 부르라는 듯 미소지어줬지만, 키안은 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과 인사시켜 주도록 하지. 키안이 사귀는 첫 친구들이라 기대가 크거든.”
“아이들이 공부방에 있으니 우리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물론이죠.”
키안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으며 레이독스는 키안에게 쌍둥이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주었다.
“우리 쌍둥이들은 자기 물건을 건드는 것을 매우 싫어한단다. 그것만 지켜주면 싸우지 않고 지내는 데 무리는 없을 거다.”
정작 그 쌍둥이들은 항상 서로의 물건을 건들다 늘 싸우지.
“혹시 너도 싫어하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해주지 않겠니?”
키안은 싫어하는 게 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확신이 선 듯 말했다.
“다치는 거요.”
키안은 별 표정 없이 말했지만, 정말, 키안의 성품이 돋보이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레이독스 역시도 신선한 충격을 먹은 듯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다. 레이독스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얼굴로 키안을 보며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주겠니?”
“다치는 거요. 친구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해요.”
놀랍다는 레이독스의 표정을 보니 어깨가 올라갔다. 왠지 시카르의 어깨도 조금 올라간 거 같은데? 레이독스는 참 기특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멋진 생각이구나.”
아주, 멋진 생각이지. 보통 아이들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생각이니까. 물론 지금껏 키안이 살아온 그 짧은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사기도 했지만, 그만큼 얼마나 똘똘한 아이인지 알 수도 있었으니까. 흡족한 미소를 짓던 레이독스의 표정은 공부방 문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공부방 안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이 집 애들은 서로의 얼굴에 낙서를 하며 반성을 하나 보지?’
쌍둥이가 말썽쟁이인 건 알았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이 아이들이 커서 왕후가 되고 패스파인더가 된다면 누가 믿겠냐고.’
원작에서 패스파인더는 새로운 불모지를 찾아 대륙을 확장 시키는 인물이었는데, 루이드가 바로 그 업적을 세우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는 미래의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주인공 셋이 모여 있다는 말이다. 레이독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 루이드! 당장 낙서를 멈추지 못해?!”
그동안 우리가 온 지도 모르고 서로의 얼굴에 낙서를 하던 쌍둥이는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보았다. 쌍둥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지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레이독스의 화난 얼굴을 발견한 루시와 루이드는 갑자기 얼어버린 것처럼 손에 크레파스를 쥔 채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시카르는 여전히 무표정 했지만, 키안은 이런 건 처음 본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키안의 표정을 보니 나도 꽤 당황스러웠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첫 만남이 너무 인상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