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악당의 육아 방식 (1)2021.10.04.
나는 미래에 있을 여주인공의 이불킥을 대비해 키안의 눈을 가렸다. 첫 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 여주가 매우 부끄러울 테니, 최애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런 건 지켜줘야지. 그리고 키안에게 속삭였다.
“루시가 부끄러워할까 봐 잠시만 가리는 거야.”
키안은 내 말뜻을 잘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침 저도 몸을 뒤로 돌리려던 참이었어요. 나중에 내 얼굴을 보면 창피할 수도 있으니까.”
세상에. 이건 뭘까. 주인공의 타고난 매너인 걸까?
‘봐라, 시카르. 얘 이제 일곱 살인데 이런 매너를 갖고 있잖아! 너도 좀 보고 배우라고!’
시카르는 전혀 이쪽에는 관심이 없었고 루시와 루이드를 보며 미간만 찌푸리고 있었다.
“꼴들 하곤.”
낮고 무거운 중저음이 공부방에 울리자, 루시는 저승사자라도 본 듯 넋 나간 얼굴로 시카르를 보다가 점점 입술을 실룩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니까, 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레이독스는 재빨리 루시를 안고 나가며 말했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레이독스가 빠르게 달렸지만, 곧 복도 저 끝에서 ‘으아앙!’ 하고 루시의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루이드는 옷 소매로 대충 슥삭 얼굴을 닦았지만, 전혀 닦이지 않고 오히려 색이 옆으로 더 번질 뿐이었다. 루이드는 반갑지 않은 얼굴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누구세요?”
“어……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뭐라고 소개할지 천천히 생각하며 느릿하게 말을 하는 동안, 루이드는 듣기 싫다는 듯 돌아서며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됐어요.”
너무나 버릇없는 루이드의 행동에 당황하던 중에, 잡고 있던 키안의 손에서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아래를 쳐다보니 키안의 손에서 작은 불씨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키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키안. 밖에서는 이런 걸 만들지 않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지?”
“하지만, 어머니께 무례하게 구는 건 참을 수가 없어요.”
키안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키안의 등을 슬쩍 쓸어주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우리를 더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단다. 난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으면 해.”
키안은 조금 시무룩한 눈으로 날 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나중에 키안이 밖에서 정령을 불러내도 괜찮을 때, 그때까지만 참아줘. 알았지?”
“네……. 죄송해요.”
“난 키안이 친구들과 잘 지내기만 하면 돼.”
그제야 키안의 손에 있던 따뜻한 열기가 푹 꺼지는 게 느껴졌다. 원작에서는 키안이 레이독스에게 입은 은혜 때문에 루이드를 해치진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 은혜도 입지 않았으니 루이드의 머리카락을 태워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리미리 조심시켜야지. 루이드는 나중에 키안의 오른팔이 되어줄 텐데. 잠시 후, 고고하게 책상에 앉아 있던 루이드도 곧 레이독스에게 이끌려 나가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루시와 루이드 모두 예쁘게 옷을 갈아입고 나니, 새 사람 같았다. 레이독스는 루시와 루이드를 공부방에 먼저 들어가게 한 후 우리가 대기 중인 복도로 나왔다.
“준비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키안은 저녁 전에 데리러 오시면 됩니다. 키안, 우린 이만 들어갈까?”
나는 키안의 손을 놓아주며 잘하라고 화이팅을 외쳐주면서도 막상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후작님. 오늘만 키안이 잘 적응하는지 보면 안 될까요?”
맙소사. 나는 극성스러운 어머니들도 안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난 그저 키안이 루시와 어떻게 지낼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같은 부모로서 공작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건 매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늦은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 마음을 전혀 못 헤아리는 것 같은데…….’
레이독스는 매정할 만큼 내 마음을 몰라주고 공부방 문을 닫아 버렸다. 키안은 왕족이라 시카르도 기억을 볼 수가 없는데. 나는 돌아서 유유히 복도를 빠져나가는 시카르의 뒤를 쫓았다.
“시카르. 혹시 나를 통해서 키안의 기억은 못 봐?”
“꿈은 정령이 있어서 가능하지만, 기억은 정령이 없기 때문에 키안의 기억은 볼 수가 없다. 왕족의 기억을 볼 수 있었다면, 길리언의 기억을 통해 베로니아를 벌써 찾았냈겠지.”
‘하긴. 그렇다면 베로니아부터 찾았을 테지.’
“그리고 본다고 해도 뭘 하려고? 레이독스에게 맡겨라. 키안에게 해코지할 놈은 아니니까.”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그것도 키안이 알아서 할 일이다. 마음이 여리긴 해도 멍청한 놈은 아니니 알아서 잘 헤쳐가겠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놈.
“곧 할머니가 오실 테니 할머니를 맞을 준비나 하는 건 어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할머니가 오신다는 소식에 가라앉으려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선 이젠 괜찮으신 거지?”
“잠시 괜찮아질 거라고 예상해서 오시는 거다. 또 가셔야 하지.”
“또? 언제쯤이면 완전히 나으실 거란 그런 말은 없어? 대신전에서 받는 치료가 호전이 없는 거야?”
“신관들 말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군. 네가 사는 곳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치매는 난치병이라고 하더군. 기적이 일어나면 다 나을 수 있다고 하니,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수밖에.”
“나, 나도 같이 기도할 게. 할머니가 나으실 수 있게…….”
“그래도 다행인 건 대신전에 계시는 동안은 치매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군. 하지만, 대신전을 나서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렇구나…….”
온갖 마법과 신성이 난무하는 이곳에서도 치매를 완전히 치료할 수 없다니. 왠지 슬펐다. 복도를 걷던 시카르가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나를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우는 건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자동으로 뒤로 물러섰다.
“뭐, 왜, 울면 또 안으려고?”
나는 잔뜩 경계하며 말했지만, 시카르는 가당치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듯 하더니 정말로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잡고는 제 가슴에 끌어안았다.
“남의 후작저에 와서 우리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
그건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카르는 모순적이게도 날 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기특하니 이번만은, 허락된 장소가 아니라도 안아주지.”
“허락된 장소는 또 뭐야.”
“내가 언제든 널 안아주어도 꼴사납지 않을 곳이겠지.”
본인은 창피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창피했고, 누가 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물론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인품이 훌륭해서 우리가 후작저에서 안고 있었다는 소문을 낼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창피했고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었다.
“나 그렇게 엉엉 운 거는 아니니까. 이제 그만 안아줘도 괜찮아.”
시카르는 나를 놓아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공작저에 가서 마저 안아주지.”
뭐?!
“이제 가지.”
시카르는 몸을 빙글 돌리며 복도를 걸어나갔고 나는 그 뒤를 졸졸 쫓아 나갔다.
“됐어. 괜찮아.”
“기특해서 주는 상이다.”
“그러니까. 됐다고.”
***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임에도 키안은 이들이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보이는 뜨거운 오라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어머니가 돼준 유라에게서만 보았던 그 뜨거운 오라가 레이독스와 쌍둥이에게서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꾸나. 키안. 이 아이들은 쌍둥이들이고 너와 같은 또래란다. 루시, 루이드. 앞으로 수업을 같이 받게 될 친구야. 이제 그럼, 서로 인사를 하도록 해볼까? 누가 먼저 인사를 하겠어?”
루시는 의자에서 내려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할래. 내가!”
그러곤 키안의 앞으로 가서 도도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난 루시라고 해. 아까 내 모습이 조금 엉망이었겠지만.”
키안은 루시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까는 못 봤어.”
일부러 창피함을 가리기 위해 도도한 표정을 짓던 루시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가 데려온 손님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다니. 집안 망신이다 싶던 차에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
루시는 기분이 좋은 듯 웃고 말았다. 반면 루이드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유카나다르와 사이가 나쁜 블레이크가의 소공자가 제 집에 온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이드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키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나는 루이드.”
“나는 키안이라고 해.”
키안은 악수를 나누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지만, 루이드는 키안이 내민 손을 결코 붙잡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근데 이상하네. 블레이크 공작가는 우리 가문과 사이도 나쁜데, 왜 우리 집에 온 거야?”
“어?”
“얼마 전에 너희 가문에서 우리 유카나다르의 광물을 빼앗아 갔잖아!”
루이드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씩씩거리자, 레이독스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루이드. 그건 어른들의 일이야. 그리고 빼앗은 게 아니라 파멸의 정령들이 유카나다르에서 활개를 치니 블레이크가에서 처리해준 거지.”
“하지만 돈을 엄청 많이 달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엄청 겁주면서요! 저도 다 봤다고요!”
유카나다르가 현 국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러 파멸의 정령을 푼 것이었다. 레이독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블레이크가에서 광물을 지급 받고 정령 트랩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 보고 끝낸 일이었다. 루이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키안을 향해 앞으로 배를 내밀었다.
“우리와 친해지고 싶으면 우리 광물 돌려내!”
루이드는 마땅히 받아내야 할 것을 달라고 하듯 당당하게 말하고 있어서 레이독스는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루이드. 그만해.”
그 순간 루시가 루이드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야. 그게 왜 얘 탓이야. 바보야!”
“아! 왜 때려!”
“네가 집안 망신시키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이 바보야!”
“이게! 울보 주제에!”
레이독스는 루이드와 루시의 입술 위에 각각 검지를 올려 조용히 시켰다.
“둘 다 조용! 친구가 보는 앞에서 싸우다니 좋지 못한 행동이야. 지금까지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고 해도, 지금부터는 새 친구가 생겼으니 너희들도 이만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아빠가 늘 말하잖니. 남매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하지만 루이드는 입만 비죽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독스는 루이드를 설득하기보단 키안이 오해하지 않게 해명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키안. 루이드가 한 말엔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해라. 그때 내가 조금 곤욕을 치르긴 했다만, 루이드의 말처럼 공작님께 갈취를 당한 건 아니었단다.”
“네. 후작님.”
“그럼 이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자. 혹시 역사에 대해서 배운 게 있어?”
“아뇨.”
“그럼, 지리는?”
“아뇨.”
“그럼, 혹시 철학이나 사회는…….”
키안은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동화책은 봤어요!”
“푸하하핫! 동화책이래!”
레이독스는 참, 제 자식이지만 저 자식을 어떻게 하나 싶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아직 동화책만 익혔다, 루이드.”
엄한 눈으로 루이드를 꾸짖는 레이독스의 표정엔, 그러니까 친구를 놀리지 말란 의미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루이드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루시는 사냥감을 표적에 둔 포식자처럼 루이드를 놀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심하긴.”
“뭐?!”
“한심하다고. 한심해!”
후작저에서는 일상다반사로 있는 일이었지만, 키안이 보기에는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동화책에서는 서로 다른 종족이라도 항상 사이좋게 지낸다고 나왔었다. 그런데, 이건 다른 종족도 아니고 같은 종족에, 가족에, 게다가 쌍둥이인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듯 싸우고 있었다. 키안은 그저 신기한 광경을 보듯 두 눈물 동그랗게 뜨고 쳐다만 볼 뿐이었지만, 레이독스에게 키안은 그저 소공자가 아닌 이 나라의 왕손이었기에 내심 송구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새 친구가 생긴 첫날부터 자꾸 이럴 거니? 루이드?”
평소 제 아빠 말을 잘 듣지도 않았지만, 오늘따라 루이드는 레이독스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있었다.
“아빠가 하필 블레이크가의 소공자를 데리고 와서 그렇잖아요! 저는 저 자식하고 친하게 못 지내니까! 당장 저 자식을 내쫓으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