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악당의 육아 방식 (2)2021.10.07.
레이독스는 그동안 한 번도 아이들에게 손찌검한 적이 없지만, 정말 오늘은 루이드에게 꿀밤이라도 콩- 먹여주고 싶을 만큼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다시피 날 때부터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에게 꿀밤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른들 문제라고 했지. 그리고 우리 유카나다르와 블레이크가는 묵은 감정을 모두 풀었다.”
“흥. 공작님이 또, 협박을 했나 보죠! 공작님이 아까도 루시를 울렸잖아요!”
옆에서 곰곰이 듣고 있던 루시는 그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공작님은 무서워.”
“그치?! 거봐요. 루시도 무섭다고 하잖아요!”
블레이크 공작가에 대한 루이드의 불신이 얼마나 큰지 레이독스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키안에게 왕세자 수업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이 나라의 군주로 섬기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 말은 곧, 키안이 루이드의 군주가 된다는 말이었다. 레이독스의 입장에서는 제 아들놈이 군주도 몰라보고 이 자식, 저 자식 거리며 쫓아내라고 떼쓰고 있는 것이었기에 골치가 아팠다.
“루이드. 공작님이 무서운 분이긴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니잖아.”
“아이를 울렸으면 나쁜 사람이죠!”
하지만 루시는 완전히 루이드의 말에 동의하진 못했다.
“근데, 공작부인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시잖아. 난 공작부인은 좋아.”
“맞아. 루이드. 블레이크가에서 우리 루시를 찾아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은혜를 잊어선 안 돼.”
루시를 찾아준 일은 분명히 고마운 일이 맞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루이드는 키안이 썩 반가운 건 아니었다. 루이드는 힘이 쭉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 영지에 다른 도움을 주신 일도 있어서 아빠가 키안을 맡기로 한 것이니 루시를 생각해서라도 키안하고 잘 지내도록 해. 알았지?”
루이드는 어떻게든 대꾸하고 싶었지만, 대꾸할 말이 없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럼 이제 모두 자리에 앉자꾸나.”
공부방은 중앙에 원형 테이블이 하나 있고 아이들은 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쭉 둘러앉았다. 레이독스도 원형 테이블에 앉아 책을 꺼내 들며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오늘부터는 역사를 공부할 생각이다. 이제 너희들도 일곱 살이 됐으니 역사를 배워야 할 테니까.”
“역사요?”
루시와 루이드는 그게 뭐냐는 듯 묻는 얼굴이었고 레이독스는 웃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키안은 자주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발리제가 떠올랐다. 아직 생사를 알 수 없었지만, 키안은 아빠가 살아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설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빠가 살아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 우리 왕국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것들을 이룩했는지 공부하는 거란다.”
“와아. 재미있겠다.”
라고 말했던 쌍둥이들은 레이독스가 역사책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잠들어 버렸다. 어차피 이 역사 수업의 목적은 두 아이가 아니었기에 레이독스는 키안을 시험하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을 읽는 데에만 몰두했다. 키안도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면, 곧장 잠들 테니까. 하지만, 키안은 꽤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역사를 경청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비카와 함께 하던 정령수업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레이독스가 역사를 알려주는 동안 키안의 총명한 눈빛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독스는 키안에게서 또 한 번 군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키안이 역대 그 어떤 왕보다도 총명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일곱 살에, 이토록 총명하게 수업에 집중했던 왕세자가 있었을까.’
그래서 레이독스는 저도 모르게 ‘수고하셨습니다. 왕손 저하.’라고 말할 뻔해서 순간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쌍둥이를 깨웠다.
“수업이 다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자.”
수업을 끝낸 레이독스가 쌍둥이들을 깨웠다. 루시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비몽사몽이었고 루이드는 기지개를 켜며 마치 수업에 온갖 집중을 다 했던 것처럼 말했다.
“아빠. 이야기 재미있었어요.”
“맞아요. 재미있었어요.”
실컷 자놓고 아닌 척하는 쌍둥이들 이었지만, 레이독스에게는 으레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수업을 다시 하자꾸나.”
“네. 아버지!”
“그럼, 난 30분 뒤에 올 테니 싸우지들 말고 놀고 있어라.”
이런 대답을 할 때는 그 누구보다도 씩씩한 쌍둥이였다.
“네. 당연하죠!”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싸울 게 눈에 훤했지만, 아이들끼리 잘 지낼 수 있게 맡겨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키안이 총명했기에 반드시 제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래서 곧장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더 골치가 아파 왔다. 공부방에 들어오자마자 레이독스의 눈에 보인 것은 루시를 말리느라 루이드 대신 손등을 할퀸 키안이었다.
“키안! 괜찮니?!”
“아. 네.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키안은 괜찮다고 했지만, 레이독스는 벌써부터 뒤통수가 얼얼해져 왔다.
*** 우리는 공작저로 가기 전 수도 시내를 잠시 들렸다. 수도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벼서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이 거리를 걷고 있으니 키안을 걱정하는 마음도 조금 더는 것 같았다.
“드레스는 많이 있는데 보석이 없더군. 그래서 오늘은 네 보석들도 좀 사고…….”
시카르의 다음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네 속옷도 좀 사야 할 것 같군.”
나는 잘 걷던 걸음을 멈추고 치한을 보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네, 네가 내 속옷이 많은지 적은지 어떻게 알아?!”
당황해하는 나와 달리 시카르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이었다.
“너, 너, 너, 설마 그런 것까지 보이는 거야?”
“그런 거라니?”
“내가 속옷 입는 것을 본다던가…… 혹은, 내가 씻는 것을 본다던가……?”
시카르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당연한 걸 묻는군.”
“이, 변태!”
시카르는 인상을 쓰며 내 허리를 잡았다.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주변을 보아도 다들 시내 구경에 바쁜지 우리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너, 너 어떻게 그, 그런 걸 볼 수가 있어? 그건 변태들이나 하는 거라고!”
“난 볼 수 있다고 했지. 본다고 하진 않았는데?”
“하지만, 너 내가 속옷이 몇 벌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건 결국 내가 속옷을 입는 걸 봤단 소리잖아?!”
나는 폴짝폴짝 뛸 얘기였지만, 시카르는 여전히 심드렁하고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왜 꼭 그런 걸 네 기억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 그럼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비카의 기억에서 봤다.”
“비카가 그런 걸 다 알아……?”
“비카가 집사로서 하는 일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공작저의 집사니까. 안 그런 척해도 공작저 돌아가는 사정은 속속들이 알고 있지. 하녀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더군.”
비카가 귀가 밝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그럼, 넌 하녀들의 얘기를 엿듣는 비카를 본 거고?”
“그래. 근데 넌, 속옷이 부족하다 싶으면 하녀들에게 말하면 될 것을 왜 말 안 했지?”
“그런 것도 하녀에게 말하면 되는지 몰랐어. 메이리에겐 돈이 없잖아. 그래서 다음에 시내에 나가게 되면 사려고 하던 참이었거든.”
“메이리는 돈이 없지만, 네가 말하면 메이리는 하녀장에게 얘기할 테고, 하녀장은 백지수표로 계산을 하고 오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모두 메이리에게 말하도록 해.”
“그런 구조인지 몰랐어. 알겠어. 앞으론 그럴게.”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조금 찝찝했다. 설마 내가 속옷을 입는 기억을 훔쳐 봐놓고 안 봤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지. 시카르 성격에 그런 거로 거짓말하진 않겠지. 만약 봤다고 해도 당당하게 ‘그래. 내가 봤는데 뭘 어쩔 건데?’라는 식으로 나올 위인이기도 하니까. 시카르는 나를 속옷 가게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난 그동안 네 보석들을 사 올 테니, 사고 싶은 건 다 사도록.”
아무래도 불안해. 앞으로는 속옷을 입을 때마다 눈을 감아야겠어. 씻을 때도 눈을 감고 씻어버려야지. *** 이 세계의 속옷이 워낙에 비싸다 보니 진열된 게 생각보다 많이 없었기에 나는 있는 속옷을 몽땅 털어오다시피 했고 내가 산 속옷들은 모두 그날 저녁 공작저로 도착했다. 내 속옷이 많아진 것을 반긴 것은 누구보다 메이리였다.
“마님, 정말 감사해요!”
“메이리. 근데 왜 네가 감사해하는 거야?”
메이리는 아차 싶은지 입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봐. 왜 네가 고마워하는 건지 궁금해서 그래.”
“그게…… 세탁실 세이디가 마님의 속이 몇 개 없어서 속옷을 빨 때마다 상당히 조심스러워했거든요…… 해지면 안 되니까…….”
아. 그랬구나. 어쩐지 속옷이 매일 갈아입어도 항상 새것처럼 반짝반짝거리더라니.
“세이디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세이디에게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
“선물이요?”
나는 방에 있는 에메랄드 브로치 두 개를 가져와 메이리의 손에 쥐여줬다.
“하나는 너 하고, 하나는 세이디에게 주련.”
메이리는 감격한 얼굴로 손에 쥔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물론 되고 말고, 내가 주는 거야. 감히 누구도 뭐라고 못할 거야.”
메이리는 브로치를 두 손에 꽉 쥐며 얼굴을 묻고 울었다.
“살면서 제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마님! 너무 감사해요!”
“이런. 메이리…….”
나는 눈물을 흘리는 메이리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그러자 메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앞으로 더욱 마님을 충성을 다해서 모시도록 할게요. 저 같은 하녀에게 이런 큰 선물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마님.”
메이리가 아주 소중한 것을 꼭 쥐듯 브로치를 조심히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니 조금 더 비싼 블루 사파이어를 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서 옷 갈아입혀 드릴게요.”
“그래.”
나는 옷을 갈아입고 시카르의 방으로 갔다. 시카르의 방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오늘 그가 사 온 보석 상자들이 가득했다.
편하게 옷을 갈아입은 시카르는 보란 듯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네 거다. 길리언의 결혼식에서 어떤 걸 착용할지 하나씩 골라보도록.”
테이블 위로 가득 쌓여 있는 보석상자들을 보니, 갑자기 시카르가 악역이 아닌, 선역처럼 보였다.
“이게 정말 다 내 거란 말이야?”
“물론이지. 네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비싼 것들로만 모두 골라왔다.”
그래. 오늘은 이 보석을 봐서라도, 내게 뭐라고 말하든 다 받아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