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악당의 육아 방식 (4)2021.10.14.
“또 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시카르는 레이독스를 겁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레이독스는 별로 겁을 먹진 않았다. 시카르가 아무리 악역이라 해도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레이독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그날까지만 해도 키안을 맡기고 다시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공작저로 돌아온 키안과 저녁을 먹으며 시카르는 한 가지를 당부했다.
“네게 당부할 게 있다. 앞으로는 맞지만 말고 때려라. 머리카락을 뜯든지 주먹을 날려버리든지.”
키안도 어이가 없는지 수프를 먹기 위해 들어 올리던 스푼을 입에 넣으려다 말았다.
“여자아이를요? 그럴 수는 없어요.”
“너희 나이 때는 어차피 다 같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키안은 입맛이 완전히 떨어졌다는 듯 테이블 위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공작님과는 말이 안 통해요. 입맛이 없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애가 어른보다 낫네.’
시카르도 크게 진노하진 않았는지, 한쪽 눈꼬리를 올리며 ‘주인공이라고 폼은 잡는군’이라고 말하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다음 날, 키안이 얼굴에 멍이 들어서 오자 그때는 완전히 진노해버리고 말았다.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이번에는 얼굴이 멍이 크게 들은 탓에 키안도 조금은 신경 쓰였는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애들 말리다 넘어졌어요.”
얼굴을 보니 맞은 거 같진 않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재빠른 키안이라 아이들이 때린다고 해서 저렇게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맞을 일도 없었기에 넘어진 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시카르가 키안에게 행여라도 ‘이번엔 칼로 목을 베어라!’와 같은 망발을 하진 않을까 싶어서 키안을 방으로 올려보냈다. 시카르는 자신의 가문에 큰 흠집이라도 생긴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일 당장 유카나다르로 가야겠다.”
“내일은 키안이 비카에게서 정령 수업을 듣는 날이잖아. 그래서 유카나다르에 안 가. 굳이 내일 수업도 없는데 갈 필요는 없잖아.”
키안이 후작저로 가는 건 일주일에 삼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은 이곳에서 정령 수업을 받았다. 한창 놀기만 해야 할 시기이긴 하지만, 신분이 신분인 만큼 마냥 놀게 할 수만은 없었기에 원작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 일정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할머니가 오시는 날이기도 하고.”
“할머니는 내일 못 오신다.”
“왜?”
“아직 신전을 나오면 치매 증상이 나타난다는군. 그래서 보류됐다.”
말은 덤덤하게 하고 있었지만, 시카르의 낯빛이 꽤 어두웠다. 하나뿐인 혈육이니 마음이 좋지 않겠지.
“그럼 우리가 갈까?”
내 질문에 시카르는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할머니가 있는 대신전까지 가겠다고?”
“응. 할머님이 이곳에 오시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야 하잖아. 할머니께서 얼마나 네가 보고 싶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할머니께서 치매 증상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닌데도 오신다는 건 네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그런데 막상 신전을 나오니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못 오시는 거고…….”
“정말 그렇게 걱정되는 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연히 걱정되는 거야.”
“그렇다면, 네 말대로 우리가 할머니를 만나러 가도록 하지. 대신전 후원금도 넘겨주고 겸사겸사 가면 되겠군.”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뜨개질 용품도 사 들고 가면 더 좋아하실 거 같아.”
시카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건 강아지들이 기특할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행위였다.
“기특한 소릴 하는군.”
기분 나쁘니 이 손을 당장 치워내라. 라고 말하듯 인상을 쓰고 있는 내 표정을 읽어낸 건 아니겠지만, 시카르는 금세 내 머리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내렸다.
“그럼, 길리언의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할머니를 찾아 뵙도록 하지. 지금은 결혼식 참석이 우선이니까.”
‘아 그렇지. 길리언의 결혼식이 남아 있었지.’
“그렇다면, 아이들은 내일 이곳으로 초대하도록 하지.”
“응? 아이들을 이곳으로 초대한다고? 왜?”
아이들한테 뭐라고 하려고?!
“네 말대로 수련의 방을 놀이동산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럼 제르미 님께 부탁한 거야?”
“지금도 제르미가 와서 작업 중이지. 요즘 돈이 많이 필요하던 차라며 꽤 좋아하더군.”
그러니까 이미 제르미는 어제부터 수련의 방에서 각종 시뮬레이션 작업을 마친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준 시카르가 내심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상했다. 그가 갑자기 왜 내 말을 잘 들었을까. 사실은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공포의 집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 놀이동산을 만들었다고 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고마워, 시카르. 아이들이 정말 감동할 거야. 덕분에 키안이 아이들에게 꽤 좋은 인상을 받을 거 같거든. 근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내가 가서 구경 좀 해도 돼?”
“물론이지. 먼저 제르미의 작업이 다 끝났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군.”
알아본 결과 제르미는 모든 일을 마치고 이미 공작저를 나섰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무서워서 가지 않으려고 했었던 곳이었다. 소설에 나와 있기론 그 방은 시카르가 수련을 위해 온갖 무서운 시뮬레이션을 설치해둔 곳이라고 했으니까. 그곳은 현실과 가상이 구분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매우 실감 나는 3D 공포게임보다도 더 무서운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련의 방은 저택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있었다. 보통의 귀족가에서는 온실 정원을 가꿀 위치에 시카르는 수련장을 두고 있었다. 수련의 방 크기는 저택에 비하면 형편없을 만큼 작았다. 겉으로 볼 때는 한 30평 남짓 크기만 한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저 작은 공간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수련장은 대기실 겸 복도와 수련의 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하나가 전부였다. 대기실 의자에 드러누워 있던 듀리온과 비카는 나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어,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마님.”
“수련의 방을 구경시켜줄까 해서 왔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시카르의 말에 나는 미소를 방긋 지었다.
“네. 그래서 왔어요.”
시카르가 수련의 방문을 열려고 하자 비카가 폴짝 벽을 한 번 짚더니 곧장 뛰어와 앞으로 서며 말했다.
“여기 지금 마님이 들어가시면 꽤 놀랄 텐데?”
“그래서 환경을 맞추는 중이니 비켜.”
이 사람들이 수련할 때 세팅하는 배경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카가 왜 갑자기 내가 들어가는 걸 막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해놓는 배경은 발록이 나오는 미궁이라던가. 용트림을 하는 드래곤이 있는 화룡의 둥지라던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태풍의 산이라던가. 그런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둔 곳이기에 적에게 목을 베인다고 해도 죽진 않지만, 보통 시간을 맞추고 들어가기 때문에 평범한 방으로 공간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 상태 그대로 꼼짝없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지옥불에 떨어졌다면 뜨겁진 않아도 세팅 시간이 끝날 때까지, 혹은 걸어서 방문을 열고 나오기 전까지는 지옥불에서 헤엄을 치고 다니는 이색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 시각적 공포에 몸서리치거나 기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었다. 시카르가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맞추는 것을 보자 비카는 들어가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럼 우린 들어갈까.”
시카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곧장 따라가지는 못했다. 문을 잡고 고개를 슬쩍 내밀어 안을 조금 본 뒤에 들어가려고 했다. 사실상 소설에서 이렇다, 저렇다 나와 있는 것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살짝만 내밀어 보려고 하는데 시카르가 내 손을 잡고 안으로 확 잡아당겼다.
“으악……!”
고함을 지르며 안으로 끌려 들어간 나는 주변의 풍경에 감탄했다. 수련의 방 안은 동심으로 가득한 놀이동산 같았다. 푸른 하늘과 초록이 깔린 잔디밭 뒤로 동산이 있고, 그 너머 수평선으로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낮이지만, 하늘에는 태양과 초승달과 별이 모두 떠 있고 잔디 위로는 색종이로 접어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바람개비들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적당한 온도에 잔잔한 바람이 부는 공간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어딜 가나 온통 겨울인 곳에서 이렇게 싱그러운 봄 햇살이 가득한 잔디밭을 보니 더 이색적이었다.
“어때? 괜찮나?”
“응.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거 같아.”
“여기에 돗자리 하나만 깔아두면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지. 마침 요즘 아이들이 즐겨한다는 각종 블록 장난감과 잰가, 구슬 따위들도 모두 준비해놨다. 네 기억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지.”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기에 시카르가 조금은 달리 보였다. 그러니까, 아주 약간은 그에게서 부모의 모습이 보였다.
“준비 많이 했구나. 정말 고마워 시카르.”
동요 없이 나를 쳐다보던 시카르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일 아이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니 나도 흡족하군. 이만 나가지.”
그때, 돌아서는 시카르의 뒷모습이 어딘가 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늘 싸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였기에 크게 동요되진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가 말한 그 ‘흡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 다음 날 유카나다르의 쌍둥이들이 공작저를 방문했다. 비카를 본 쌍둥이는 신기한 듯 입을 쩍 벌렸다.
“다크 엘프다!”
비카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쌍둥이를 향해 제 귀를 보여주었다.
“너희들 이런 귀를 가진 다크 엘프를 본 적 있어?”
“어…… 이상하다…… 피부색과 머리 색은 다크 엘프가 맞는데…….”
혼란스러울 만도 했을 것이다. 레이독스는 쌍둥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난 후 내게 다가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혼자서 쌍둥이를 돌보기에는 매우 힘드실 겁니다. 그렇다고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저희는 그저 차나 한잔할까 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어디 가셨는지요?”
“아. 시카르는 지금 일 때문에 출타 중이에요.”
“혹시 블레이크 전역으로 퍼진 정령들을 조사하러 나간 겁니까.”
“아, 네. 맞아요.”
“공작님께서도 고생이 많으시군요.”
길리언이 키안을 찾기 위해 블레이크는 물론이고 레카도르 왕국 전역에 정령을 퍼트리고 있는 중이었다. 시카르의 정신력은 정령을 통제했고, 듀리온의 칼은 정령을 베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출몰이 잦는 정령을 일일이 잡으러 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정령을 잡을 트랩을 설치하고 다녔다.
“유카나다르도 정령들 제보가 많죠?”
“일전에 공작님께서 설치해주신 정령 트랩들 덕분에 괜찮지만, 트랩이 수명을 다하고 나면 또 바빠지겠죠.”
“그럼 이제 절 따라오시겠어요?”
나는 레이독스를 데리고 수련의 방으로 향했지만, 겉보기에는 온실 정원을 연상시키는 수련장이었기에 티타임을 나누는 가벼운 동작으로 나를 따라왔다.
“공작부인께서도 온실 정원을 가꾸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은 일이다 보니, 아무리 절친이라 해도 제르미가 레이독스에게 수련의 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한 모양인데.
“정원이라기엔 매우 클 거예요.”
나는 수련의 방문을 열어주었고, 레이독스는 멍한 눈으로 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복도를 한 번 둘러봤다가 다시 방 안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겠지. 분명히 밖에서 볼 때는 그저 온실 정원 크기만 한 정도의 공간인데, 그 안에는 엄청나게 드넓고 오색찬란한 놀이동산 같은 공간이 존재하니 믿기 힘들 것이다.
“이…… 이것은…….”
나는 너무 놀라 그저 입만 쩍 벌리고 있는 레이독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이 놀기에 이만한 곳은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