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악당의 육아 방식 (5)2021.10.18.
레이독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탈한 얼굴로 탄식했다. 제 친구가 마법사라고 해도 이런 걸 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이 세상 속에서 유일무이하게 이곳 수련의 방에서만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 유래와 역사를 얘기하자면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장황한 설명을 나열해야 할 만큼 깊은 사연이 있었다.
“공작님께서 준비하신 겁니까?”
“네. 제르미 님께서 도와주셨다고 했어요.”
“허. 공작님께서 정말 부모가 다 되셨군요.”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그 악역이 아이들을 위해 이런 공간을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오늘 쌍둥이를 부른 거예요. 이곳이라면 키안과 더 좋은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후작님이 보시기엔 어때요? 쌍둥이가 좋아할 것 같은가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본 질문이었고, 레이독스는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했다.
“매우 기뻐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당장 아이들을 불러오죠.”
쌍둥이들은 그 짧은 거리를 걸어오면서도 정신없이 폴짝폴짝 뛰어왔다. 쌍둥이들이 저렇게 발랄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은 모두 레이독스가 애정을 듬뿍 쏟으며 키운 탓이었다. 그에 비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점잖은 키안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한창 철이 없는 게 너무나 당연한 나이에 키안은 너무 어른스러워 보였으니까. 쌍둥이들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기다란 복도에 들어서자 ‘여긴 어디지?’ ‘여기 뭐야?’라고 하며 멀뚱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해줄 목적으로 수련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란 탓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만 깜빡깜빡거리며 방 안을 보고 있었다. 그건 키안도 마찬가지였다. 키안도 ‘이게 대체 뭔가.’ 하는 얼굴로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루이드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살금살금 걸어가서는 수련의 방 안으로 발 한쪽을 넣었다가 다시 뺐다가, 다시 발 한쪽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너 뭐 하는 거야?”
정말 그러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는 루시의 말에 루이드는 잔뜩 의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니까, 위험한 건 없는지 보는 거잖아!”
루시는 그런 루이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루이드가 또 한 발을 내디뎠을 때 뒤에서 등을 확 밀어 버렸다. 졸지에 수련의 방 안으로 들어간 루이드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쪼그려 앉았다.
“으아! 뭐 하는 거야! 아! 아빠!!! 아빠!! 살려줘!!”
레이독스는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 루이드를 들어 안았다. 그러자 루이드는 레이독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봐. 루이드. 여긴 위험한 곳이 아니야. 너희들이 놀게끔 만들어 둔 놀이 공간일 뿐이지.”
레이독스의 포근한 말투에 루이드는 고개를 들어 레이독스를 따라 드넓은 초원을 쳐다보았다. 눈부시게 오색찬란한 햇살이 아직 눈가에 눈물이 고인 루이드의 얼굴을 비추었다.
“정말이에요? 아빠?”
“그럼. 이곳이 위험한 곳이면 아빠가 너희를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그제야 루이드는 안심이 되는 듯 환하게 웃었고 레이독스는 루이드를 잔디밭 위로 내려놓았다.
“마음껏 뛰어놀아라. 이곳은 안전하니까.”
루이드는 달려가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는 무당벌레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당벌레다!”
레이독스는 이번엔, 멀뚱멀뚱 서 있는 루시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키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싸우지 말고 놀란 뜻으로 공작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간이야. 키안.”
키안은 쌍둥이만큼 놀란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안으로 걸어갔다.
“집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 몰랐어요.”
나중에 키안도 더 많이 크면 시카르와 함께 이곳에서 수련을 같이하겠지. 그때쯤이면 내가 이곳에 없을 수도 있겠고.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기분이 묘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이곳에 정이 든 건지도 모르겠고.
“비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건 모두 비카에게 말하도록 해. 그럼 재미있게 잘 놀아.”
레이독스도 루시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이미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초원을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나는 비카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고 비카는 언제나처럼 비릿한 미소로 고개만 슬쩍 까닥거리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레이독스는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기서는 안 싸우고 잘 놀았으면 좋겠군요.”
“쌍둥이 때문에 후작님께서 정말 매일 정신이 없겠어요.”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의 혼을 쏙 빼놓죠.”
“그건 그래요.”
“그래도 덕분에 오늘 같은 날 쉴 수 있게 됐군요.”
“저희는 그럼 가서 차나 한잔할까요?”
“이 시간에 느긋하게 차를 즐길 수가 있다니. 얼마 만에 갖는 티타임인지 모르겠군요.”
*** 레이독스와 나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차를 마셨다. 내가 레이독스와 티타임을 하려는 이유는 키안 때문이었다. 키안의 수업 태도나 경과가 너무 궁금했으니까. 확실히 부모의 입장이라 그런지, 그는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왕손 저하의 학습능력이 궁금하시겠죠?”
“네. 사실 매우 궁금해요. 물론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요.”
“어디까지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상상하시는 것 그 이상으로 잘하고 계십니다. 저하께서는 집중도부터가 남다르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빨리 배우죠. 벌써 글씨도 꽤 많이 익히셨습니다.”
“아, 벌써 글을 배우고 있나요?”
레이독스는 마치, 제 자식이라도 자랑하는 듯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네. 물론입니다. 글을 빨리 배우는 건 물론이고, 역사, 사회, 경제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쌍둥이들은 옆에서 모두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와중에도 저하의 눈빛은 언제나 초롱초롱 빛나고 계시더군요.”
침을 흘리며 자고 있을 루시와 루이드를 상상하니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리고, 그 곁에서 총명한 눈빛으로 수업을 듣고 있을 키안을 떠올리니 이제 일곱 살 된 아이라 해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주인공아, 너는 어디까지 얼마나 더 멋져지려고 하는 거니! 레이독스는 마치 제 자식 자랑하듯 뿌듯한 한숨을 내쉬며 차를 들이켰다.
“정말 왕손 저하께서는 타고난 군주이신 듯합니다.”
그 사람이 미래의 당신의 사위가 된답니다. 어쨌든 레이독스과 키안의 관계는 이제 원작처럼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레이독스가 키안을 아주 잘 가르치고 키워내고, 키안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 나라의 국구까지 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거겠지. 그때가 되면 시카르도 왕부가 되어 있을까. 너무 보기 좋은 사위와 장인이구나. 한껏 밝은 표정을 짓던 레이독스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금세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헌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걸리는 거요?”
“간혹…… 저하의 표정이 너무나 어둡습니다.”
발리제 때문이겠지. 얼마 전 죄책감으로 인해 힘들어하던 키안의 꿈이 떠올랐다.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졌을지를 생각하면 나도 가슴이 아팠다.
“발리제 님의 시신을 찾기 전까지는 키안의 얼굴에서 그늘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공작님께서 발리제 님의 시신을 찾고 계시니, 마음 약해지지 마시고 키안이 더 훌륭하게 자랄 수 있게 잘 부탁드려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하를 보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잘 교육시키고 보필할 것입니다.”
“후작님께서 도와주시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답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님과는 얽히기 싫었습니다.”
그렇겠지. 원수 같은 사이니까.
“그런데, 제르미가 공작저에 왔던 날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더군요. 제가 왕손 저하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제르미가 미래도 볼 수 있었나? 미래를 보는 수정구라도 얻은 건가?
“그게 정말이에요?”
“네. 제르미가 그날 그런 말을 하며 그편이 이 왕국의 미래를 위해 좋다고 하더군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녀석인데 신기했죠.”
제르미가 원작의 내용을 조금 알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그저 원작에서는 이미 제르미가 미래를 어느 정도 내다보고 있었지만, 내가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레이독스와 키안에 대해 더 얘기를 나누는 동안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저 해맑게 웃으며 들어올 것 같던 루시는 넋이 나간 얼굴로 들어왔고, 루이드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얼굴에 시커먼 그늘이 져 있었다. 오직 키안만이 한숨만 조금 내쉬며 들어왔다. 루시는 레이독스를 보자마자 엉엉 울며 품에 안겼다.
“아빠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앙!!”
“왜 그래. 우리 공주님.”
레이독스가 우쭈쭈 안아주자마자 루시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으아앙. 으허허헝. 으어어엉!!”
루시의 울음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거지?’
레이독스는 루시를 달래느라 무슨 일인지 물어볼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침착하게 서 있는 키안에게 슬쩍 물었다.
“키안. 루시가 왜 저렇게 서럽게 우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게…….”
처음엔 아이들끼리 구슬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루이드가 장난을 치다가 루시와 둘이 싸우게 되면, 그때마다 망치를 손에든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단다. 그래서 루시와 루이드는 데스나이트를 보고 너무 놀라서 지금 저렇게 우는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시카르가 순순히 놀이동산을 만들어 주더라니. 애들끼리 싸우면 데스나이트가 등장하게 설정을 했기 때문이었구나. 그제야 루시가 왜 저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알 것 같았고, 시카르의 그 흡족했던 표정의 의미도 알 것 같았다. 마치 ‘내 자식 건들면 다 죽는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거 정말 너무 극성 아빠잖아? 데스나이트라니. 그것도 저런 쪼꼬미들에게!
“키안.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너도 놀라지 않았어?”
“음…… 전 그렇게 놀라진 않았어요.”
하긴, 설산에서 툭하면 늑대들을 보고 살았으니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주인공이니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설정돼 있을 것이고.
“너라도 놀라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기특하네.”
“네. 전 놀라진 않았지만, 루시가 너무 무서워하길래 루시의 눈을 가려줬어요.”
키안은 조금 부끄러운 듯 코를 긁적거렸지만, 내 눈엔 저 어린 주인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멋질 수가 있나! 키안! 역시 넌 주인공이구나!’
이러니 여자주인공이 반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제 겨우 일곱 살일 뿐인 주인공에게서 아우라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