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악당의 육아 방식 (6)2021.10.21.
데스나이트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오금을 저릴 만큼 무섭다고 했으니 루시가 꽤 많이 놀랐을 것이다. 루시는 나중에 검술천재 여자주인공이 되지만, 지금은 엄마를 그리워하고 겁 많고 울음 많은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잠깐, 루시는 키안이 눈을 가려줬다 치지만 루이드는? 루이드도 겉으로는 개구쟁이였지만 겁이 꽤 많았다. 쌍둥이가 매일 그렇게 싸우면서도 잘 붙어 지낸 이유 중 하나가 겁이 많아서였다. 금방 싸웠다가도 천둥소리에 부둥켜안고 울고 했으니까. 저 겁많은 루이드도 많이 놀란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되었다.
“키안. 루이드는? 루이드는 어떻게 됐어? 혹시 울지 않았어?”
키안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길래 민망해하는 거지.’
싶던 찰나, 키안이 조심스럽게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 그게…… 루이드는 제 등 뒤에 숨어 있었어요…….”
나는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키안은 비밀을 조심스럽게 폭로라도 하는 사람처럼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자존심에 키안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니. 루이드 인생의 흑역사를 남긴 사건이 될 것 같은데. 키안도 루이드가 창피해할 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내 귓가에 대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런데, 이건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루이드가 창피해할 거예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우리 주인공이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키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검지를 입술 위로 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야. 절대 비밀로 해줄게. 절대 쉿.”
키안도 나를 따라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검지를 입술 위로 올렸다.
“절대 쉿.”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절로 웃음이 났다. 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서일까? 키안도 만족스러운 듯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수련의 방 사태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루시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짜증스러운 얼굴로 귀를 막고 있던 비카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내게 와서 물었다.
“마님? 제가 저 꼬맹이의 시끄러운 입을 좀 다물게 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그냥 재우겠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 거 같은데. 유난히 비카의 말투가 더 거칠어진 것을 보면, 정말 짜증이 많이 난 듯했다.
“네. 좋아요. 하지만 루시가 놀라지 않게 부탁드려요.”
비카는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띠며 나를 지나쳐 레이독스에게 안겨 있는 루시에게 다가가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어둠의 정령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럽고 소리 없는 비카의 접근에 놀란 레이독스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그 아이 좀 재울까 해서요. 아, 마님께는 허락을 받았고, 후작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그 아이 좀 재우죠? 계속 울게 두면 아이도 경기 일으킬 것 같은데?”
레이독스는 비카의 손바닥 위에 있는 어둠의 정령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도와주려 한 게 맞습니까?”
레이독스의 경계가 재미있는 모양인지 비카는 어둠의 정령을 날카로운 장검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레이독스의 목 부근을 베어내려는 듯 갖다 대고는 냉소적인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렸다.
“그럼, 내가 여기서 애들을 해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건가?”
비카의 그런 행동이 조금은 먹혔는지 루시는 울음을 뚝 그치고 딸꾹거리며 비카를 쳐다보았다. 비카가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레이독스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소설 속에서 철저하게 공격적인 악역으로 설정된 까닭에 매사에 저렇게 상대를 위협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시카르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렇게 위협했겠지. 하지만, 레이독스는 그런 비카의 행동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서라기보단 그동안 늘 비카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루시가 놀라는 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루시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 방향으로 끌어안아 시야를 완전히 가려놓았다. 레이독스는 비카를 보고 놀란 듯 딸꾹질을 하고 있는 루시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덕분에 루시가 울음을 그친 것 같군요.”
비카는 그제야 레이독스의 목 아래에 있는 정령을 거두며 두 손을 깍지 낀 후 제 뒤통수를 짚었다.
“이제 조용하네.”
그러곤 이제야 마음이 평온하다는 듯 유유히 걸어 나갔다. 루시가 비카의 행동에 조금 겁을 먹어서 눈물을 그쳤다고는 해도, 어쨌든 비카 덕분에 귓가를 울리던 루시의 울음소리가 멈추니 갑자기 공작저 전체가 평안해진 느낌이었다. 레이독스도 비카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그 점에 대해선 고마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곤혹스러워하던 레이독스의 얼굴이 엄청나게 평온해졌으니까. 루시가 조금 딸꾹질을 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말이다. 루이드는 오늘 키안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아니면 데스나이트를 보고 너무 놀란 탓인지 여전히 레이독스의 다리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 손에는 루시를 안고, 다른 한 손은 루이드의 손을 잡고 있느라 두 손이 모두 묶여 있는 레이독스는 고단해 보였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 오늘 티타임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또, 이런 티타임을 가지게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쌍둥이를 돌보고 있다 보면 어른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거든요.”
아내도 곁에 없는 데다 친구라곤 제르미 뿐인데 그는 총각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후작저에 있는 사용인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성격도 못됐으니 고립된 양육을 하고 있었겠지. 안 봐도 눈에 훤하군.
“저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 물어봐도 되겠죠?”
“그럼요. 물론 쌍둥이를 키우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얼마든 물어보십시오.”
사실상 우리 집 아이 자체는 문제가 없지. 시카르와 부딪힐 때가 문제인 것이지. 그러고 보니 시카르와 키안 사이가 쌍둥이처럼 앙숙과 다름없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레이독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난 후 하나 남은 손으로 루이드까지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두 아이를 양손에 안아 들고 나가는 레이독스의 어깨가 매우 무거워 보였다.
*** 오늘 시카르는 일이 많은지 꽤 늦었다. 그래서 모처럼 키안과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되어서 비카도 불렀다. 비카는 귀찮은 얼굴로 나와 키안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마님. 제가 식사 예절이 좀 없는데, 괜찮겠어요?”
비카는 냉소적으로 빙긋 웃었지만, 나는 습관처럼 나오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비카가 말하는 식사 예절은 현대의 예절에서는 속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비카는 정말 맛없어서 먹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나온 고기를 대충 썰어서 먹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비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고기라는 것을. 그녀는 고기라면 자다가도 깨서 먹을 정도로 고기를 좋아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그녀가 가리는 고기는 없었다. 비카는 식사가 나오면 그 고상한 외모와는 달리 살벌한 얼굴로 식사를 빨리 끝냈기 때문에 나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얼른 비카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기, 비카 님.”
“네.”
“키안과의 정령 수업은 어떤가요? 물론 키안이 잘 따라 가주고 있겠지만, 다른 일은 없는지 궁금해서요.”
사실 나는 레이독스에게서 키안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비카도 과연 키안을 칭찬해줄지가 궁금했다. 정말 티끌만 한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으로 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비카의 입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할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키안은.”
비카의 첫마디의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린 것이 무색하게 비카는 콧방귀를 한 번 뀌며 말했다.
“애너지와 잠재력은 있는데 기술이 없어요. 한마디로 바보…….”
키안이 급하게 옆에 있던 빵을 비카의 입안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비카의 볼이 빵빵해졌다.
“지, 그…… 무어 하는 그어야! 어르드 기리 므하고이자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른들끼리 말하고 있잖아!)”
키안은 비카를 노려보며 그녀의 앞으로 우유를 갖다 놓았다.
“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어머니 앞에서 제 흉을 보는 건 용납 못 해요.”
키안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또다시 키안에게서 주인공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멋있어라. 이 모습을 루시가 봤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아까워.’
목이 메는지 비카는 키안을 노려보며 우유를 들이켰다. 듀리온을 보며 늘 하는 것처럼 속으로 시카르면 아니면 죽여버리는 건데, 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비카는 급하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먼저 일어섰다. 비카가 너무 빨리 식사를 끝내는 바람에 나는 키안과 오붓하게 식사를 끝내고 씻고 나온 후, 함께 블록 놀이를 좀 하다 키안을 재우기 위해 동화책을 손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키안은 하품을 하면서도 잠을 자지 위해 버티듯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매일 재울 때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키안. 졸리면 그냥 자도 괜찮아.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그게 아니고…… 좋아서…….”
“응?”
“어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게 좋아서요…….”
아, 이 말이 왜 이렇게 가슴 아프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제서야 키안이 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자고 싶지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키안의 눈꺼풀은 한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동화책을 내려놓고 키안의 손을 꼭 붙잡았고 애써 버티던 키안은 결국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인다 해도 어린 키안이 의지할 곳이라곤 부모 뿐일 텐데, 내가 너무 몰라줬구나 싶은 생각에 나는 잠든 키안의 곁을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 잠든 키안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난 후 메이리에게서 시카르가 도착했다는 말에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내가 방을 나오기 전에 시카르가 들어와 흡족한 얼굴로 잠든 키안을 쳐다보았다.
“유일하게 울지 않았다지? 후후. 블레이크가의 소공자다운 행동이었다.”
“쉿-”
나는 검지로 입술을 막으며 시카르의 옷깃을 슬쩍 잡으며 그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시카르는 불편한 얼굴로 나를 따라 나오는가 싶더니 내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뭐? 키안이 루시의 눈을 가려줬다고?”
그새 내 기억을 읽고 있었군. 매우 못마땅한 듯 금세 시카르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