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악당의 육아 방식 (7)2021.10.25.
“그 쌍둥이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데스나이트 일루전을 소환하게 했는데 그 눈을 가리다니. 한심하긴.”
“놀라니까 가려준 거지.”
“놀라라고 한 거니 놀라게 뒀어야 했다.”
“루시가 키안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가 항상 자신을 지켜줬기 때문이니까. 키안도 루시를 보면 본능적으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 거야. 그래서 전에도 루시의 얼굴에 있는 낙서를 보고 루시가 부끄러워할까 봐 키안이 모른 척해준다고 곧장 등을 돌렸었거든. 그렇게 멋있으니까 주인공이겠지.”
“겨우 그런 게 멋지다고? 진짜 멋진 건 그때 데스나이트를 향해 칼이라도 뽑아 들어야 멋진 거지.”
“물론 그런 것도 멋지지만, 키안의 방식으로 지켜주는 것도 멋있어.”
“누군가 지켜주길 바라는 건 약골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아직 어리니까. 루시는 후에 매우 뛰어난 검술천재가 되는데 데스나이트를 보고 놀라서 미래가 틀어질까 봐 걱정된다고.”
“그런 약골이라면 여주인공의 자리에서 물러서야겠지.”
시카르가 쌍둥이를 싫어하는 건, 후에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키안이 블레이크가의 소공자이기 때문일까? 후자라면, 시카르가 키안을 온전히 제 가문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까.
“시카르 쌍둥이들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뭔지 물어도 돼?”
“당연한 걸 묻는군.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렸으니까.”
이 말인즉 키안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주인공이 아닌, 가문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시카르가 마음을 열진 않았다 해도 가문의 일원으로 키안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처음엔 별다른 선택이 없어서 키안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지금은 가문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들떠 조금 흥분이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오늘 일로 인해 쌍둥이들 버릇이 좀 고쳐졌으면 좋겠군.”
“아이들에겐 좋은 기억만 심어 줘야 하는데, 이번 일은 네가 심했어.”
“심하다고? 이곳은 엄연한 신분 사회다. 아이라 해도, 상위가문의 자제를 얕보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감히 후작의 자식들 주제에 공작인 내 자식을 건든 대가가 겨우 그런 일루전 따위인 것에 안도해야 할 것이다.”
아 그렇지. 여기 신분 사회였지. 하지만, 너희는 그런 거 무시하잖아. 제힘을 믿고 왕을 우습게 아는 시카르와, 후작의 멱살을 잡는 기사 듀리온과, 예의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혼종 비카. 이 세 사람은 왕이고 뭐고 없는 사람들이었다. 길리언도 이들에게서 예의를 찾는 건 포기했고 이들을 이용하다 버리는 용도로만 썼으니까. 원작이 그렇다 한들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키안의 양육과 관련해서는 내 말을 들어주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지?”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쌍둥이들 문제도 내게 맡겨줘.”
“키안이 또 얻어터지고 오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란 건가?”
“그런 건 내게 맡겨 달라는 거야.”
“허수아비 같은 아비가 되란 거군.”
“나는 네가 키안을 잘 양육하는 데에만 몰두했으면 해. 이를테면,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그런 거 말이야. 전처럼 같이 낚시를 해도 좋고 같이 공놀이를 해도 좋아.”
시카르는 마치 동의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항상 평화적인 게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잘 해결해 보려고 하는 네 의지를 높이 사도록 하지.”
그 말을 하고 시카르는 등을 돌리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알겠다는 말이네?’
나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 키안에게는 수련의 방이 꽤 괜찮았던 모양인지 다음 날 뭘 하고 놀지 물었더니 수련의 방에 가고 싶다고 했다.
“거기 데스나이트가 나오는데 괜찮겠어?”
“그건 아무 감정이 없었는걸요. 사물과 같은 느낌이라서요. 사물은 저를 해치지 않거든요.”
그래서 키안은 덤덤하게 루시의 눈을 가려주었던 모양이었구나.
“그곳에서 노는 게 재미있었어?”
키안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매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태어나서 그런 동산은 처음 봤어요. 항상 설산에만 있다가 이곳에 내려왔을 때도 온통 눈뿐이어서…… 잔디가 그렇게 초록빛인지 알았지만 그건 동화 속에서만 본 게 다여서……. 물론 그것도 모두 마법이겠지만…….”
키안은 머쓱한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짠했다. 주인공이라 모든 걸 가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못 누리고 자랐으니까.
‘여름이 오면 정말 푸릇푸릇한 잔디가 살아 있는 곳에서 곤충들과 놀게 해줘야겠어!’
이런 다짐을 하고 있는데 시카르는 내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해댔다.
“그럼 이왕이면 진짜 수련을 하는 건 어때? 허상과 실제를 구분한다고 하니, 얼마나 어디까지 구분하는지 궁금하군.”
“오늘 수련은 없어. 오늘 우리 세 식구는 오직 키안과 함께 즐겁게 놀기만 할 거니까.”
시카르는 김빠지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내게 한 약속을 어기진 않았다. 수련의 방에는 우리 세 식구만 들어가기로 했기에 비카는 쉴 수 있어서 좋아했다. 듀리온은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오늘은 우리 세 식구의 알콩달콩한 정을 쌓기로 한 날이라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무지개가 뜨는 동산이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리 그려온 로즈마리를 중앙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로즈마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지난 밤에 종이에 로즈마리 꽃들을 그려서 오려놓았다.
“우리가 지금부터 할 놀이는 바로 이거야.”
나는 시카르와 키안에게 각각 그려온 로즈마리를 건네주었다.
“로즈마리의 꽃말은 가정의 행복이야.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 줄기에서 순서대로 피어 있는 꽃을 하나씩 떼서 마지막 꽃까지 모두 떼어 낸 사람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키안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카르였다. 키안은 오른쪽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가 왼쪽에 있는 나를 보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나부터 시작해서 줄기에서 꽃을 하나씩 떼어 내 볼까?”
그렇게 시작한 놀이었다. 나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차례로 돌아가며 꽃을 하나씩 떼다 보니, 계획대로 키안이 걸렸다. 키안은 남은 꽃을 떼기 전에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사…….’ 까지만 하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랑해요. 어머니!”
이러면 안 되는데…… 키안이 룰을 어긴 걸 뭐라고 해야 하는데……! 수줍은 복숭아처럼 분홍으로 물든 키안의 볼이 너무나 귀여웠다. 화는커녕 키안이 나에게 ‘랑해요. 어머니!’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이성적인 회로가 모두 마비되고 입이 먼저 헤벌레 벌어졌다. 이 벅찬 감동을 어쩌지 못하고 키안을 꼭 끌어안을 뻔했다가, ‘이런 유치한 걸 놀이라고’라며 로즈마리를 내려놓는 시카르 덕분에 정신을 다시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놀이를 하게 된 건 놀이를 빙자해서 서로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하다 보면 닫혀있던 마음도 열린다는 말이 있다. 먼저 키안으로부터 시카르에게 사랑한다는 말문을 트이게 하고 자리를 또 바꿔서 놀이를 계속하다 보면, 시카르도 키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만드는 형국을 노릴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키안에게 조금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안. 게임규칙은 지켜야 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지?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잖아. 이번은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는 꼭 규칙대로 하기다?”
키안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내리깔기만 했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은 모양인 듯해서 나는 키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게임이잖아. 키안.”
게임이란 말에 조금은 설득이 된 듯 키안은 나를 보며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다시 놀이는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내가 걸렸다. 그러자 키안의 얼굴이 정말 조금 전과는 달리 활짝 펴졌다. 키안은 매우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었고 시카르는 재미없다는 듯 로즈마리를 이리저리 까닥거렸다. 그리고 나는 키안이 듣고 싶어 할 그 말을 속삭였다.
“키안. 사랑한단다.”
행복한 미소로 입을 쩍 벌리던 키안은 귓불까지 벌게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환호했다.
“흐앗!”
나는 키안의 팔을 잡으며 더 장난을 걸었다.
“왜 그래. 키안. 부끄러워서 그래?”
“흐앗! 모, 몰라요!”
사랑한다는 말에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귀여운 아들을 어쩌면 좋냐고. 입이 귀까지 걸리는 걸 참을 수가 없던 나는 다리까지 동동 굴리며 웃었다.
“이제 게임은 끝인가?”
시카르가 ‘이제 그만 이런 유치한 놀이는 집어 치우지’라고 할까 봐 나는 곧장 키안과 치던 장난을 멈추었다.
“아니야! 계속할 거야. 이건 우리 세 식구의 화합을 위한 가족 놀이니까.”
“그러지.”
시카르는 들고 있던 로즈마리를 찢어버릴 것처럼 굴다가 다시 바로 들었다. 나는 옆에 있는 로즈마리를 들어 다시 나누어 주며 이번엔 시카르부터 시작하게 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보며 꽃을 하나씩 떼어 냈다. 이번엔 제발 키안이 걸려라, 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엉뚱하게도 이번엔 시카르가 걸렸다. 시카르가 과연 내게 사랑한다고 말할까? 시카르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그게 더 이상했으므로 나는 그가 대충 얼버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카르는 온몸에 저주가 발현된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물론 실제로 저주가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걸릴 줄 몰랐다가 정말로 걸려 버리니 난감해서 저러는 것일 뿐. 저렇게 굳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그 말을 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내 장난을 더 자극시킬 뿐이었다. 그동안 툭하면 내게 칼을 들이대고 협박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시카르? 뭐 하는 거야? 규칙을 지켜야지?”
시카르는 난감한 듯 주먹으로 입술을 막으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갑자기 저주가 발동됐는지 발음이 잘 안 되는군.”
“아주 정확하고 명료하게 잘만 말하고 있는데?”
‘안 하던 말을 하려니 혀가 마비되는 것 같지?’
나는 은근히 너무 고소했다. 시카르의 인생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지?
“시카르. 키안도 보고 있는데 규칙을 어길 셈이야?”
“누가 규칙을 어긴다고 했나? 한다. 다만 조금 더 세련된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겠지.
“그 세련된 방법을 빨리 봤으면 좋겠네. 시카르. 우리가 기다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내가 재촉을 한 탓인지 시카르는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단검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단검은 왜 꺼내 드는 거야?!”
“새기려고.”
‘뭘 새겨?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