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악당의 육아 방식 (8)2021.10.28.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라고 생각한 순간, 시카르는 들었던 단검으로 휘리릭 빠르게 잔디를 깎아내렸다. 시카르가 깎아 놓은 잔디로 인해 잔디 위에는 LOVE라고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시카르는 이보다 더 세련될 수 없다는 듯 단검을 검집에 넣으며, 당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잔디 위에 새기겠다는 말이었어? 나름 애는 썼네.’
딴에는 최대한으로 애를 쓴 것일 테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시카르. 이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야. 이건 말이 아니잖아. 나는 네 말을 듣고 싶다고.”
“그러니까 넌, 꼭, 굳이, 내 입에서 그, 사…… 어쩌고를 듣고 싶다는 거군.”
“응. 난 네 입에서 꼭 그 사…… 어쩌고를 들어야겠어.”
“하지만, 그 사…… 어쩌고를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무슨 소리. 난 그 사…… 어쩌고를 꼭 말로 들어야겠어. 그게 이 게임의 법칙이니까.”
“벌칙에 걸렸다 해도 벌칙자가 응용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 꼭 그 벌칙이 네가 만든 틀에 맞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난, 그 사…… 어쩌고를 이렇게 대체하겠다.”
시카르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저런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곧 죽어도 내 벌칙을 따를 수 없단 소리였다. 그리고 나도 이번만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시카르에게서 사랑한단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키안이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카르가 규칙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키안이 시카르에게 규칙을 잘 지켜서 사랑한단 말을 했으면 했으니까.
“이 게임의 규칙을 만든 사람으로서 난 네 벌칙 인정 못 해. 그러니까 나한테 사…… 어쩌고를 말해.”
“아무래도 내게 그 말을 꽤 듣고 싶나 보군.”
“응. 매우 듣고 싶어. 그래서 난 들어야겠으니까. 말해줘. 그, 사…… 어쩌고를.”
시카르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싫다.”
“시카르 블레이크! 약속을 지켜주지 않을래?”
내가 이를 으드득으드득 갈자, 시카르는 날 보며 냉소적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저렇게 한쪽이 올라갈 때에는 비웃음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화내면 안 될 텐데?”
그랬다. 시카르가 저렇게 비릿하게 웃을 때는, 어떤 꿍꿍이가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늘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건 바로 시카르가 이곳에서 사람들이 싸우거나 화를 내면 나타나도록 설정해둔 데스나이트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하늘이 꺼질 것처럼 갑자기 사위가 어둡게 내려앉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낮도 밤이 아닌 먹구름이 가득한 어두운 공간으로 바뀌며 공기마저 사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더니 어떤 육중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자!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살아 있는 자!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자!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모두 죽게 된다니. 저런 쇳소리로 부르짖는 말은 정말로 죽음의 주문처럼 들려와서 어깨를 펼 수 없을 만큼 소름이 돋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악마라도 찾아온 듯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것은 손에 망치를 들고 있는 데스나이트였다. 그 망치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망치였다. 데스나이트의 몸집도 시카르의 5배는 되는 것 같았다. 아니, 저런 건 거인이 아닌가? 철갑옷을 두르고 철 투구를 쓴 얼굴에서 시퍼런 빛을 내는 눈빛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죽음으로 인도할 것 같은 그 눈은 나를 바라보는 듯 나를 향해 걸어와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공포스러워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려는 그 찰나에, 시카르의 품이 내 시야를 가렸다. 그는 곧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온몸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 품에 안기자 모든 것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려움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은 그저 안락한 어둠만이 있었다. 이내 시카르가 다시 손을 내렸을 땐 모든 게 그대로였다. 데스나이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시카르가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놓자 카안이 내게 안겨 왔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놀라셨죠?”
“어? 어. 난 괜찮아.”
아직 정신이 조금 혼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절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은 거겠지.
“제가 눈을 가려주려고 했는데 공작님이 먼저 가려주셨어요.”
나도 알고 있다. 내가 키안이 루시의 눈을 가려준 것이 멋지다고 했더니 그것 때문에 가려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심장이 조금 뛰었다. 데스나이트를 보고 놀라서 뛰었는지 시카르가 갑자기 놀란 내 눈을 가려주고 나를 지켜주는 듯해서 가슴이 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지금 시카르와 눈이 마주치자 또 가슴이 뛰었다.
‘하도 목숨의 위협을 많이 받다 보니 이젠 잘해줘도 무서워서 심장이 뛰는 건가.’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키안은 인상을 조금 쓰더니 시카르를 노려보듯 고개를 획 들어 올렸다.
“앞으로 어머니는 제가 지킬게요.”
“내 아내를 왜 네가 지킨다는 거지?”
“제 어머니이니까요.”
“네 손은 작아서 유라의 눈이 가려지지도 않는다.”
“어머니 얼굴이 작아서 충분히 가려져요.”
‘잠깐 이 사람들 지금 뭐 하는 거지? 마치 나 두고 싸우는 거 같잖아?’
주인공과 악역이 날 두고 싸우고 있다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니, 완전히 기분이 좋았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를 지켜주겠다고 싸우고 있으니 이보다 흐뭇한 싸움은 없겠지. 그런데, 그 순간 이렇게 싸우면 또 데스나이트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흐뭇한 기분도 잠깐밖에 느끼지 못했다.
“잠깐, 두 사람 싸우지 마! 데스나이트가 또 나타나겠어!”
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말렸을 때는 이미 늦은 듯했다. 그 망할 데스나이트가 또 나타났으니까.
“시카르, 제발 저 설정 좀 바꾸라고!”
“이곳에선 평정심을 갖는 게 좋을 텐데.”
괜히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데스나이트만 하나 더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로는 여기서 더는 놀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키안의 작은 두 손이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 순간, 일전에 시카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안이 나를 보호하게 해줘야 아이가 발리제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 거라는 말이. 그래서 나는 키안이 나를 완벽하게 보호해주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키안이 눈을 가려주니까 정말 무섭지 않은데?”
“……정말요?”
아주 없는 말은 아니지. 정말로 키안이 내 눈을 가려주는 그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며 조금 전 느꼈던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졌으니까. 키안은 자신 없는 말투였지만, 그 목소리에서 작게나마 기분 좋은 음성이 들렸다. 내 뒤에 서서 내 두 눈을 꼬옥 가려주고 있는 키안을 상상하니 그 모습이 너무 귀였다. 나를 보호해주는 어린 주인공은 꽤 든든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키안은 내게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이제 없어요. 어머니. 또 나타나면 제가 또 눈을 가려드릴게요.”
내가 한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사이에 키안의 목소리에는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나를 한 번 지켜냈으니 또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이 붙은 것처럼. 정말. 너무 귀엽고 멋지잖아?! 하지만 이제 이곳은 그만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계속 싸울 것만 같았고 저 망할 데스나이트를 하루 종일 보고 있어야만 할 것 같으니까. 물론 데스나이트가 나타날 때마다 키안을 나를 매우 잘 지키고 있다는 확신을 계속 받게 되겠지만 그전에 내가 기절하면 안 되니까.
“키안. 오늘은 여기서 그만 나가보는 게 좋겠어.”
키안이 실망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의외로 생각도 못 한 말로 나를 놀래켰다.
“안 그래도 나가자고 할 참이었어요. 전 어머니가 편안한 게 좋거든요.”
또, 감동을 주는구나. 아이를 키우면 매일이 감동이라더니, 내가 정말 그랬다. 키안을 키우며 아이의 모든 사랑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뭉클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일어선 키안의 엉덩이를 털어주며 말했다.
“시카르. 우리 이제 그만 나가도록 해.”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시카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 수련의 방문이 열리며 동시에 듀리온이 들어왔다.
“공작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듀리온의 목소리는 매우 다급했기 때문에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혹시라도 발리제의 시신을 찾은 건 아닐까 하는 기대였다. 듀리온과 잠시 귓속말을 주고받던 시카르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로 다가왔다.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그 표정 없던 시카르도 무슨 일이 있는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답답했던 탓에 나는 키안을 저택에 먼저 들여보낸 후 현관 달려나가 이제 막 마차에 오르는 시카르를 붙잡았다.
“시카르. 가면 언제 와?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마차에 한 걸음을 올리던 시카르가 고개를 돌리곤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아, 본래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 나는 곧장 그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 미안. 다급해서 나도 모르게 붙잡은 거야.”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던 시카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좀 늦을 것 같군.”
“혹시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어쩌면, 베로니아 공주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거야말로 고대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게 정말이야?”
“확실하진 않다. 파인더에 의뢰했는데 베로니아와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고 해서 확인하러 가는 것뿐이니까. 혹시 몰라 비카는 두고 가니 안심해도 된다.”
그러곤 곧장 시카르는 마차에 올랐다. 베로니아를 찾을 지도 모른다니 오랜만에 심장이 너무나 쿵쾅거렸다. 베로니아를 찾는다면 키안이 얼마나 기뻐할까. 겉으론 말하지 않아도 분명히 저를 낳아준 엄마가 그리울 것이다. 반드시 베로니아를 찾아서 키안에게 엄마를 찾았다고 말해줄 수 있기를.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그러트리며 저택으로 들어서자 손을 씻고 나오는 키안이 보였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키안에게 달려갔다.
“키안!”
그러자 비카가 팔짱을 끼고 나와 눈을 반쯤 뜨고 나를 보며 말했다.
“마님. 마님이 그렇게 뛰어다니면 어떡합니까. 사용인들도 있는데 교양을 지키셔야죠.”
대충 알겠다고 말하려는데 키안이 날선 눈으로 비카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그런 비카 님은 집사가 마님에게 그렇게 훈계하는 투로 말해도 되는 거예요?”
“집사니까 마님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거야. 도련님.”
나에게만 저러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저게 비카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사실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키안이 보기엔 그냥 봐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교양 있는 집사는 마님을 가르치지 않아요. 비카님 부터 교양과 예의를 배우도록 하세요!”
똑 부러지기도 해라. 베로니아를 찾게 되면 이제 키안의 이런 사랑도 받지 못하겠지?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키안을 위해 시카르가 베로니아를 반드시 찾길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