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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악당의 육아 방식 (9) (44/197)

44화. 악당의 육아 방식 (9)2021.11.01.

파인더에게 의뢰를 했을 때 그려준 왕족의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 목 뒤에 새겨져 있고 머리 색도 금발이라고 하니 베로니아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눈동자가 푸른색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눈동자야 마법으로 얼마든 바꿀 수 있었다. 파인더들이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자를 찾은 것은 어느 노예 거래소라고 했다. 노예 제도를 없앤 것이 30년도 더 되었는데도 여전히 노예가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니. 시카르는 베로니아를 찾는 대로 노예 거래소 관련자들을 모조리 붙잡기 위해 블레이크의 사병들을 함께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가는 데만 한 시간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길이 먼 탓에 따분하게 하품을 하던 듀리온은 문득, 제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카르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16549779934428.png“공작님. 그건 왜 그러는 겁니까?”

16549779934436.png“뭘 말이야.”

16549779934428.png“옷깃 말입니다.”

시카르는 은연중에 옷깃을 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렸다.

16549779934436.png“혹시 누군가 네 옷깃을 잡은 적 있나?”

16549779934428.png“있지요.”

그 순간 시카르의 눈빛이 날카롭고도 집요하게 번뜩였다.

16549779934436.png“언제?”

16549779934428.png“음…… 주로 살려 달라 애원할 때인 것 같습니다.”

조금 전 번뜩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시카르가 맥빠진 표정을 지었다.

16549779934436.png“그딴 거 말고, 네가 어딜 나갈 때 누군가 너를 잡은 적이 없냐고 물은 것이다.”

16549779934428.png“나가는 사람을 잡는단 말입니까? 누가 말입니까? 그건 진로 방해 아닙니까?”

16549779934436.png“답답하긴. 가령, 네가 나가는 게 싫어서 잡는다든지. 그런 거 말이다.”

16549779934428.png“혹시, 마님이 공작님을 잡으셨습니까?”

16549779934436.png“마차에 오르려는데 내 옷깃을 잡더군. 너도 알다시피 난 이런 적은 처음이다.”

16549779934428.png“그러게 말입니다. 감히 공작님의 옷깃을 잡다니. 그런 일은 여태 없었죠.”

16549779934436.png“내가 무서워서 누구도 내 털끝 한번 건든 적이 없었지. 폐왕조차도 시타르 족인 내가 있는 공작저는 일체 온 적도 없으니까.”

16549779934428.png“진귀한 경험을 하셨군요. 아마도 마님이 공작님과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셨나 봅니다.”

시카르는 아직도 그 경험이 낯설고 묘했다. 여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으니까.

16549779934436.png“묘한 경험이긴 하군.”

16549779934428.png“아무래도. 저도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마님처럼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으로.”

16549779934436.png“네 모든 것을 알고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 유라는 내가 무서운 사람이란 걸 알고도 날 좋아했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16549779934428.png“하긴 보통은 무서워서 공작님의 눈도 못 마주치는데 그런 공작님을 좋아하다니, 마님은 참 특별한 분이시죠.”

16549779934436.png“유라는 정말, 멋모르는 하룻강아지와 다름없긴 하지.”

시카르는 유라가 정말 해피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해피는 그의 할머니가 우연히 길에서 주워온 강아지였다. 당시, 시카르는 부모를 모두 잃은 탓에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그 조그만 강아지는 시카르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어 대고 쫓아다니고, 잠을 자고 있으면 어느새 곁에 와서 잠들어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싫어서 쫓아낸 강아지였지만, 잠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제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며 시카르는 녀석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다고 느꼈다. 유라에게서 그 느낌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마차 안에서 춥다고 정말 제 품으로 파고 들어왔을 때였다. 하물며 강아지도 아니고 사람이 겁 없이 들러붙더니 이젠 옷깃까지 잡다니. 시카르는 유라가 볼수록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노예시장은 수도의 구시가지 골목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잡화점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낡은 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잠시 서서 지켜보기만 해도 그곳으로 들어가는 귀족들이 많이 보였다. 병사들은 밖에 대기를 시켜놓고 시카르는 듀리온과 함께 건물로 들어섰다. 낡은 문 앞에는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깡마른 남자가 칼을 들고 노끈을 자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노끈을 자르느라 칼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암호를 제대로 못 대고 단속구의 낌새를 보인다면 노끈을 자르는 칼은 언제든 흉기로 변할 수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노끈을 자르면서 건조하게 말했다.

16549779992729.jpg“얼마나 필요합니까.”

암호는 듀리온이 외우지 못해서 파인더에게서 직접 받아 적어온 것을 시카르가 기억해내서 불렀다.

16549779934436.png“오늘은 20미터 3롤이 필요하고, 모레는 30미터 2롤이 필요합니다.”

16549779992729.jpg“30미터는 없습니다.”

16549779934436.png“그럼 15미터 5롤로 부탁하죠.”

노끈을 자르는 문지기는 그제야 길을 비켜주며 들어가라는 듯 문을 밀었다.

16549779992755.png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는 띄엄띄엄 등잔이 보이는 좁고 긴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또 문 하나가 나타났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길게 이어진 복도를 뒤로하고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뚱뚱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시카르와 듀리온을 보자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16549779992729.jpg“입장권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듀리온이 입장권을 꺼내자 시카르가 받아서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이내 남자가 입장권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자 시카르는 삐끗 넘어지는 척을 하며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남자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노려보자 시카르는 능청스럽게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16549779934436.png“발이 삐끗했군.”

사실, 시카르는 남자의 어깨를 짚는 동안 그의 기억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이 경매장 직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경매에 팔린 사람들은 이들이 들어왔던 출입구가 아닌, 다른 출입구를 통해 거래되었다. 이들을 노예로 다른 출입구로 빼내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이 뚱보는 아니었다. 시카르는 다시 입장권을 건넸고 뚱보는 입장권에 빨간펜으로 뭐라고 적은 후 방을 안내했다. 남자가 안내해준 방은 마치 오페라 객석과도 비슷한 곳으로 방은 어두웠지만, 앞으로는 노예 경매가 한눈에 보이는 단상이 보이게 뻥 뚫려 있었다. 옆으로는 벽이 막고 있어서 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16549779934436.png“우리가 왔던 길 반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면, 또 문 하나가 나타날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덩치가 제법 큰 털보 놈을 포함해서 여기 직원들이 거기 모여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털보 놈을 압박해서 노예를 거래하는 출입구를 찾아라. 그리고 출입구에 병사들을 포진시켜라.”

16549779934428.png“맡겨 주십시오!”

듀리온이 방을 나간 후 시카르는 경매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다행히 경매 시간에 늦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경매에 나온 사람이 없었다. 대략 수십 분이 지난 후에야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는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한 사람씩 나와 진행되었고, 마음에 드는 노예가 있으면 금액이 적힌 팻말을 들어 올리면 되는 방식이었다. 진행자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시카르는 파인더가 말한 대로 목덜미에 왕족의 문장을 하고 있는 여성을 찾아냈다.

16549779934436.png‘저 여자인가? 손을 잡아 보면 알 수 있겠지.’

시카르는 곧장 경매에 들어갔다. 경쟁이 붙긴 했지만, 20만 실링을 부른 탓에 시카르는 쉽게 낙찰에 성공했다. 노예 거래가 모두 끝난 후 사카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듀리온이 한바탕 쓸고 간 자리엔 죽지 않을 만큼 반쯤 죽어난 인간들로 가득했다. 그중 털보는 보이지 않았다. 한 사내를 잡은 시카르는 사내의 기억을 통해 나가는 길을 확인했다. 확인한 기억을 토대로 바닥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자 그 방에는 노예로 팔려갈 대기를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들 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시카르는 그곳에서 조금 전에 보았던 베로니아로 짐작되는 여자를 찾았다. 하지만 여자의 손을 잡자마자 그녀가 베로니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듀리온이 불법 노예상들을 수도 경비들에게 이송하는 동안 시카르는 여자의 기억을 더듬었다. 노예로 끌려온 여자는 어느 지하 감옥에서 베로니아의 수발을 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는 길에 놈들이 두건을 씌운 탓에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베로니아의 아름다운 금발에 반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베로니아의 왕족 문장을 예쁜 문신이라고만 생각해서 그 문신을 따라 새긴 것이었다. 비록 파인더가 찾은 여자가 베로니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수확은 있었다. 바로 기억을 통해 베로니아의 얼굴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 시카르가 늦게 온다고는 했지만, 베로니아를 찾아서 데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초조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밖을 쳐다본 모양이었다. 키안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16549780025669.png“어머니…… 공작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보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키안이 오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16549780025674.png“아니, 공작님께서 반짝이는 걸 사주겠다고 해서 그걸 기다리고 있었어.”

16549780025669.png“반짝이는 거요?”

16549780025674.png“응. 반짝이는 거.”

키안은 그 반짝이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왜냐면, 곧 키안이 나를 보며 손에서 반짝이는 불씨들을 만들어 냈으니까.

16549780025669.png“이런 거요?”

16549780025674.png“아니, 그런 거 말고.”

나는 손등을 들어 내 손에 있는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16549780025674.png“이런 거 말이야.”

16549780025669.png“아…… 저도 나중에 이런 걸 해드릴게요!”

그렇지. 키안이 나중에 크면 왕이 될 텐데 이런 것쯤이야 나에게 얼마든 선물해 줄 수 있겠지. 그러니 굳이 괜찮다고 할 필요는 없는 거야.

16549780025674.png“고마워. 키안. 넌 정말 여러모로 멋진 아이야.”

키안은 흐뭇한 듯 환하게 웃더니 이내 민망한 듯 헛기침을 조금 하다가 다시 손에 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보고 또 봐도 너무 똑똑하단 말이지. 나는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늘 시카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창 밖으로 시선이 갈 것 같았다. 그때, 문지기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카르가 도착한 건가?! 나는 반가운 얼굴로 현관으로 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는 문지기에게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16549779992729.jpg“헉헉. 마, 마님.”

16549780025674.png“그래. 말해. 왜? 무슨 말이야?”

16549779992729.jpg“레, 레이독스. 후,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레이독스가? 갑자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갑자기 레이독스가 공작저를 찾아오니 뭔가 불길했다. 설마, 데스나이트 때문에 쌍둥이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거 아냐? 그래서 쌍둥이 일 때문에 따지러 온 거면 미안해서 어떡하지?!

16549779992729.jpg“어, 어떡할까요. 마님. 무, 문을 열어 드릴까요?”

불안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허락했다.

16549780025674.png“그래. 어서 손님을 들여보내도록 해라.”

16549779992729.jpg“예. 마님.”

설마, 틀어져서 더는 우리 키안을 돌볼 수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생각에 한 자리를 맴돌고 있으니 레이독스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본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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