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남편의 소설 속 아내 (1) (47/197)

47화. 남편의 소설 속 아내 (1)2021.11.11.

나는 너무 감동해서 ‘당장 카네이션을 구해올게!’라고 오두방정을 떨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엄마로서 품위를 지키느라 애를 써야했다.

16549780835398.png“벌써부터 너무 감동인데. 공작님께서 카네이션 씨앗도 구해오실 거야. 그렇죠? 공작님?”

화분 위에 무심하게 씨앗을 뿌리던 시카르는 이쪽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16549780835402.png“씨앗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떻게 키우냐가 어려운 것이지.”

꽃을 키우는 법은 나도 몰랐기 때문에 그날 우리 세 식구를 도란도란 모여 앉아 꽃 도감을 찾아보고 있었다.

16549780835406.png“어머니. 온실에서는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가 있대요.”

16549780835398.png“그래?”

라고 대답한 후 나와 키안은 모두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한마디로 공작저에 온실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었다. 시카르는 우리의 표정을 보고 콧방귀를 꼈다.

16549780835402.png“구태여 온실을 만들 필요 없이 신성수를 쓰면 어떤 식물이든 잘 자란다.”

16549780835398.png‘맞아 전에 그랬지. 신성수를 쓰면 된다고.’

16549780835406.png“그럼 신성수를 쓰면 사계절 내내 꽃이 자라는 거예요?”

16549780835402.png“신성수를 제때제때 잘 줘야 죽지 않고 잘 자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그런 건 하녀들에게 맡겨라.”

키안은 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시카르의 말대로 지금 그런데 신경 쓸 여지는 없었다. 앞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 주인공이 카네이션을 키우는 일에 시간을 쏟으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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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즈마리의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 우리는 매일 다양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카르와 키안의 사이는 아직도 데면데면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데에는 꽤나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도 그 무엇보다 셋이 함께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6549780835398.png‘왜냐면 길리언의 결혼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길리언의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키안이 잠든 저녁 시간에 미루었던 얘기를 꺼내 들기 위해 시카르의 서재를 찾았다. 이 시간에 그의 서재를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카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16549780835402.png“이 시간에 서재엔 무슨 일이지? 혹시 길리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힘들다는 등의 떼를 쓰러 온 것이라면…….”

16549780835398.png“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16549780835402.png“그럼?”

16549780835398.png“혹시 헤르시아가 누군지 알겠어?”

시카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6549780835402.png“글쎄.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인가?”

네 소설 속 아내란다. 라고 그냥 확 말해버릴까. 싶었지만 ‘그래서?’라는 뻔한 답변이 날아올 것 같아서 관두었다.

16549780835398.png“길리언의 사촌 여동생이야.”

16549780835402.png“길리언의 사촌 여동생이라면 예전에 본 적이 있다. 근데 그 얘긴 왜 하는 거지?”

16549780835398.png“그녀가 길리언의 결혼식 날 죽어.”

16549780835402.png“그렇군.”

이것이 만화라면 내 뒤로 새들이 지나갈 것만 같은 민망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16549780835398.png“그, 그러니까 그녀를 살렸으면 해.”

16549780835402.png“이유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게 너무 억울하잖아! 소리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래서 나도 준비한 것이 있었다.

16549780835398.png“헤르시아를 도와주면 길리언이 널 좋게 볼 테니까.”

16549780835402.png“나쁘게 봐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나를 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16549780835398.png“우리가 아이도 키우고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명목상이라도 잘 지내면 좋으니까.”

16549780835402.png“그러고 보니 헤르시아가 누군지 기억나는군. 소설 속에서 내 아내가 되는 여자였던가?”

16549780835398.png“맞아. 그녀야.”

16549780835402.png“소설 속이라도 내 아내가 되는 여자에게 꽤 질투가 날 텐데도 날 위해 그녀를 살려주고 싶은가 보군.”

그것은 너의 착각이란다. 하지만, 이것은 마침 내게 필요하던 착각이었다. 너의 착각이라도 이용해서 난 그녀를 살려야겠으니까.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며 소설 속 내용을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16549780835402.png“헤르시아를 제거하는 목적은 단순히 길리언에게 경고하려는 의미군. 소설 내용 그대로 구현하면 되는 건가.”

16549780835398.png“맞아. 그대로만 하면 돼.”

16549780835402.png“그런데, 소설 내용을 보니, 걸리는 게 있군. 그전엔 별생각이 없던 길리언이 이때, 내가 헤르시아를 구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사촌 여동생과 나를 결혼시키려고 마음 먹는군? 내가 헤르시아를 구하는 게 길리언에겐 영원히 나를 묶어둘 수 있다는 영감을 얻는 계기가 되는 것 같은데…… 괜찮겠나?”

16549780835398.png“뭐가?”

16549780835402.png“내가 헤르시아와 엮이게 될 텐데, 괜찮겠냐는 말이다.”

16549780835398.png“그런 거라면, 넌 이미 결혼해서 헤르시아와 결혼을 할 수가 없잖아? 혹시 길리언이 헤르시아를 정부로 들이라고 할까 봐 하는 말이야?”

16549780835402.png“그런 단순한 발상으로 접근하는 건 꽤 위험한 일이지. 길리언은 다른 식으로 단순하게 처리를 하겠지만.”

16549780835398.png“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 듣게좀 말해줄래?”

16549780835402.png“네가 죽게 되면 헤르시아는 나와 결혼 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살벌한 소리야.

16549780835398.png“내가, 왜 죽어……?”

16549780835402.png“헤르시아를 내 아내로 엮기 위해 길리언이 어떻게든 널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

나는 한동안 돌처럼 굳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카르의 말처럼 길리언이 날 죽이고 그 자리를 헤르시아로 대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16549780835402.png“그러니 네가 살고 싶다면 헤르시아는 죽게 내버려 둬라. 어차피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 신경을 끄는 게 좋겠지.”

나도 시카르처럼 저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소설 속 그녀의 가여운 삶에 연민을 느낀 탓에 어딘가 찜찜했다. 그렇다고 시카르의 말대로 그녀를 살리고 내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549780835398.png“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16549780835402.png“헤르시아에게 남자가 있는 것 같던데, 그것도 나중에 키안을 돕는 민병대 대장이 되더군. 그만큼 언변도 화려해서 사람들도 잘 설득하고 말이지.”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민병대가 헤르시아를 해친 것을 알고 자결하는 비운의 인물 중 하나였다.

16549780835398.png‘그 대목을 떠올리니 또 짠해지는구나.’

16549780835402.png“그놈을 쓰도록 하지.”

16549780835398.png“어떻게?”

16549780835402.png“결혼식 때 자기 여자를 자기 손으로 구하게 하는 것이지.”

16549780835398.png“하지만 그 남자는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잖아. 어떻게 들여보내?”

16549780835402.png“물론 왕실의 경비는 삼엄하나, 나와 함께라면 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지. 듀리온을 대신해서 들여보낼 것이다. 그놈은 후에 쓸만한 인재가 되니 지금부터 포섭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이 방법이 가장 좋겠군.”

음…… 머리 잘 쓰는 건 인정해야겠는데.

16549780835402.png“내일 녀석을 만나보도록 하지.”

16549780835398.png“근데 만나서 뭐라고 해? 또, 내가 미래를 보는데, 네 여자친구가 그날 살해를 당할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16549780835402.png“내가 폐왕의 목을 친 것을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지. 나도 그날 봤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니 또 섬뜩해졌다. 무서운 놈.

16549780835402.png“그러니 폐왕의 잔재들에 관한 정보라고 알려주면 될 일이지.”

그럼 정말 해피엔딩이겠는데? 과연 잘 될까. 하지만, 기대보단 걱정이 8할이었다. *** 나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다 되지 않았지만, 결국 길리언의 결혼식은 오고야 말았다. 악역들의 축제 마당이 되는 대망의 결혼식 날이 되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6549780835398.png‘내가 지금 떨고 있니.’

내 결혼식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떨었는데. 키안을 길리언과 자주 마주치게 해서 좋을 게 없었기에 키안은 듀리온과 함께 공작저에 남았다. 사용인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집 안에 키안만 홀로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결혼식에는 나와 시카르, 비카만 참석했다.

16549780835398.png‘사람이 많다는데…….’

첫날에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봐도 구토가 몰려왔었다. 내가 그 인파 속에 있지 않아서 다행히 지나쳐 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그 인파 속에 있으려니 벌써부터 아찔했다. 내가 현기증을 느끼는 게 보였는지 시카르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16549780835402.png“걱정 마. 비카가 재워 줄 테니까.”

비카가 집에 남고 싶어 했지만, 남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를 재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비카 뿐이어서.

16549780835398.png‘이왕이면 지금 기절하듯 재워 줬으면 좋겠는데, 자꾸 긴장되고 초조해서 속이 울렁거리니까.’

마차가 레카도르 시내까지 들어서자 시카르는 비카에게 말했다.

16549780835402.png“이제 재워라. 그렇다고 너무 깊게 재우진 말고 길리언에게 인사는 해야 하니까.”

16549780980211.png“알았어.”

나는 마치 수면 마취를 당하듯이 기억도 없이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 잠들기 전 내 마지막 기억은 비카의 ‘알았어’였다. 그리고 눈을 뜨니 나는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이곳은 연회장이라고 하기엔 작은 공간이었지만 접객실이라고 하기엔 연회장 같은 공간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곳이 소형 연회장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파티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얼굴을 가리는 면사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잠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들자 시카르는 나에게 곧장 물을 건넸다.

16549780835402.png“아주 푹 잘 잔 것처럼 보이는군.”

비카 덕분이긴 했다. 불면증에라도 걸린다면 정말 도움이 될 거 같은 수면 요법인데?

16549780835398.png“참, 헤르시아는 어떻게 됐어?”

16549780835402.png“저기 구석에 침울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여자가 헤르시아다.”

시카르가 눈짓한 곳을 보니 한없이 여리게만 보이는 한 여자가 사람이 몇 있지도 않은 연회에 끼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앉아 있었다. 헤르시아는 아들을 원하는 집안에서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난 탓에 갖은 구박을 들으며 외롭게 자랐었다. 그래서 매우 소심한 성격으로 자란 탓에 낯선 곳에 가면 잘 적응하지 못 했다. 마치 나처럼. 성격이 그랬기 때문에 길리언의 강압에 반항하지 못하고 끌려가듯 시카르와 결혼도 올린 것이겠지.

16549780835402.png“아직 폐왕의 잔재들이 나타나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으니 너무 초조해하진 말고.”

그것보다 나는 길리언과 또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조했다. 거기다, 길리언의 아내가 되는 다이엔느 빌리트는 보통이 아니었다. 정령사 라페의 여동생으로 그녀도 정령사였다. 겉으로는 품위 있고 교양 있어 보이기만 하지만, 그녀는 계략 악녀였다. 왕후가 정령사라는 이유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자 그 말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처단할 만큼 가차 없는 인물이었다. 길리언과 다이엔느를 만날 생각에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16549780835398.png“딸꾹. 딸꾹.”

시카르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16549780835402.png“연회장에서 딸꾹질이라니. 그것도 공작부인이?!”

16549780835398.png“미…… 딸꾹. 미안…… 딸꾹.”

시카르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팔짱을 끼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16549780835398.png“긴장해서…… 딸꾹. 그런지 딸꾹…….”

16549780835402.png“정말 골치군.”

16549780835398.png‘시카르가 준 물을 괜히 다 마셨어.’

물을 좀 더 마셔야겠다 싶어서 자리를 뜨려는데 누군가 내 앞으로 물컵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독스였다.

16549781007619.png“딸꾹질이 나올 땐 물을 한 번에 들이켜주면 좋습니다. 그때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끊어 마실 필요가 없죠.”

16549780835398.png“감사…… 딸꾹. 해요. 후작님…….”

레이독스에게 고맙단 인사도 했겠다. 이제 물컵을 받아 들고 물을 마시려는데, 시카르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물을 마시면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레이독스가 주는 물을 마시려 해서 노려보는 게 아니겠지? 딸국질을 해서 저렇게 노려보는 거겠지? 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려고 했던 그 순간, 시카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49780835402.png‘해피는 나밖에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딸국질을 계속할 바엔 그냥 물을 받아 마셔 버릴까 싶었던 찰나였다. 시카르는 레이독스가 내민 물컵을 ‘확’ 낚아채더니 옆에 있는 화분에 ‘촥’ 뿌려 버렸다. 그리곤 살벌한 눈으로 레이독스를 보며 말했다.

16549780835402.png“내 아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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