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남편의 소설 속 아내 (2)2021.11.15.
미래의 사돈인데……. 다행스럽게도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그런 모습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하긴, 이보다 더한 일들을 많이 당했으니 이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도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는 친절과 유혹을 구분 못 하시는 군요.”
“네가 감히 내 아내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부터가 얼마나 건방진 짓인지 모르나 보군.”
시카르는 음료를 들고 있는 시종을 불러 내게 물을 건넸지만, 이젠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시카르 때문에 놀란 바람에 물을 마시지 않고도 딸꾹질이 멈추었으니까. 한결같이 진중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레이독스는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블레이크 공작부인.”
레이독스는 시카르에게는 전혀 인사를 올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건방진 놈.”
“시카르. 그는, 키안의 스승님이야 나중엔 키안의 장인이 될 거고, 너에겐 사돈이 될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예의 없게 대하면 어떡해.”
“여기선 사돈을 유혹하려 들면 사형감이다.”
사형감인 건 자기 기준이겠지.
“그는 날 유혹하려고 한 게 아니야. 내게 도움을 받은 만큼 날 도와주려 한 것뿐이지.”
“시종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건방지게 네게 직접 물을 건네다니.”
“미래에는 사돈이 될 사이인데 그를 예전처럼 대하면 곤란해. 이젠 조금 예의 있게 대해.”
“내 심기를 먼저 건든 건 그 녀석이다.”
저 악명높은 성질머리가 쉽게 바뀌진 않을 줄 알았지만, 정말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넌 앞으로 나 외에는 그 누구의 친절도 무시해라. 알겠나? 해피는 내가 아닌 남이 주는 것은 단 한 번도 받아먹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나를 애완 아내 정도로 보는 게 확실하네. 확실해.
“그럼, 여자가 주는 친절도 받지 마?”
“여자는 봐주지.”
기준도 성격처럼 자기 멋대로다.
“여자는 왜 봐주는 거야?”
“당연한 걸 묻는군. 같은 성별이니까 봐주는 것이지.”
“근데, 듣다 보니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단 말이지?”
“너, 너는 비카 손 막 잡잖아.”
“내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잡는 거라고 생각하나? 기억을 보기 위해 잡는 것일 뿐이다. 공격을 위해 칼을 잡는 것처럼, 내게는 기억도 그런 것일 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비카에게 질투를 하는군.”
비카는 우리가 있는 쪽에서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귀가 밝은지 잘 알고 있었던 탓에 나는 깜짝 놀라서 기함할 뻔했다.
“시, 시카르! 말조심해. 내가 왜 그녀를 질투하겠어!”
“아무리 봐도 그건 질투인데?”
나는 시카르만이 들을 정도 낮게 속삭였다.
“저기 비카가 다 듣고 있을 거란 말이야. 비카가 오해할 만한 얘기는 하지 말아줘. 제발.”
“어차피 비카는 신경도 안 쓸 것이다.”
“내가 신경 쓰여.”
“그런 쓸데없는데 정신을 쏟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비카 얘기는 그만 하는 게 좋겠지. 말을 돌리자.
“근데 그 남자는 같이 온 거야? 헤르시아의 남자 말이야.”
“물론.”
“그는 지금 어디 있어?”
“위층 접객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지. 테라스 발코니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 일부러 테라스 위에서 기다리라고 한 모양이구나. 오늘 암살자들이 헤르시아를 덮치는 시점에서 그 남자를 대화를 나누다가 모른 척 암살자를 처리하면 아주 자연스러워지니까. 계획을 안전하고도 자연스럽게 잘 짰네. 그때, 내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국왕 전하 듭시옵니다.”
궁내부장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린 후, 연회장의 커다란 내문이 열리며 국왕 길리언과 다이엔느가 들어왔다. 길리언과 다이엔느는 예복을 벗고 제복과 드레스를 갈아입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행렬에 따라 귀족들은 벽에 붙듯 양쪽으로 갈라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리언과의 만남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언제봐도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공기를 내뿜었다. 그것은 왕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카르와 대화를 나누며 조금 진정이 되었는데, 길리언을 보자마자 긴장이 다시 밀려왔다. 속으로 조용히 심호흡을 하는 동안 국왕 부부는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길리언과 시카르는 서로를 향해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길리언의 다음 시선은 나를 향했다.
“두 번째 만남이군요. 블레이크 공작부인.”
정말 이 사람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돼. 나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국왕 전하, 왕후 전하. 레카도르의 가장 경사스러운 영광된 자리에 초대해주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나 외운 대로 한 거 맞나?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시카르의 표정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알려준 대로 잘하긴 한 모양이었다. 길리언은 차분하게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성대한 결혼식을 무사히 치른 것은 모두 블레이크가가 왕실을 굽어 살펴준 덕분이지요. 저야말로 초대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이거 지금 블레이크 가에서 왕실 위에 올라서려고 한다는 것을 비꼬는 말인가. 이런 복잡한 관계는 시카르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니 나는 시키는 대로만 잘하면 되겠지. 왕후는 나를 보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블레이크 공작부인을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는군요.”
“부족한 저를 환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왕후 전하.”
왕후는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별다른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오고 가는 시선에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후. 이런 건 내게 정말 살벌하고 숨 막히는 일이었다.
“참, 이번에 블레이크 공작께서 직접 구빈원 원장의 횡령 사실을 밝혔다지요?”
시카르는 너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려서……라고 말하듯 나를 한 번 노려보고 대답했다.
“어쩌다 발견한 것뿐입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공작께서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으니까요.”
“국왕 전하의 신하 된 도리로, 눈앞에서 일어난 추악한 사건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원래라면 대충 둘러댔을 성격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룬 공을 길리언의 은혜라고 포장하는 것을 보면 이번에는 시카르가 조금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조금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공작이 레카도르와 함께 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블레이크 가는 레카도르 왕국에 충직한 신하로 언제나 국왕 전하와 함께 할 것입니다.”
저런 말도 원작에서는 결코 하지 않는 말이었다. 시카는 항상 길리언의 앞에서 콧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길리언의 눈 밖에 난 인물이었으니까. 왜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것처럼 구는 거지? 그때, 헤르시아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의 안내를 받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헤르시아를 발견한 길리언은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맞이하듯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너라, 헤르시아.”
길리언이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를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헤르시아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길리언이 내민 손을 잡으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입니다. 국왕 전하.”
길리언과 인사를 나눈 헤르시아는 곧장 왕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결혼식을 축하드립니다. 왕후 전하. 국왕 전하의 어머님 되시는 대공비 전하의 가문인 모비아트 백작가의 헤르시아 모비아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군요. 헤르시아.”
시카르의 전부인도 아니고, 시카르의 소설 속 전부인 헤르시아는 소설 속에 묘사된 것보다 더 작고 귀여운 외모였다. 낯을 많이 가려서 수줍어하는 모습이 나와 많이 닮아 보였다.
“여기는 블레이크 공작과 공작부인이다. 인사드려라.”
헤르시아는 정신이 없는 듯 붉어진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공작님 공작부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왕 전하의 어머님 되시는 대공비 전하의 가문인 모비아트 백작가의 헤르시아 모비아트라고 합니다.”
소개가 나보다 더 긴 것을 보며 나는 모종의 동지애를 느꼈다. 사실 소개 인사 말고도 시카르라는 사람에게 갇혀 산 것에 대한 동지애도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소설 속에서나 일어난 일일 테지만.
“왕후. 전 블레이크 공작과 할 얘기가 좀 있으니 공작부인과 얘기 좀 나누고 있으시지요.”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시카르는 내게 다녀오겠다는 눈짓만 주고는 어디로 간단 말도 없이 길리언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떼어놓고 싶은 시카르였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의지할 사람이 그뿐이었기에 난감하기만 했다. 나도 데려가라고 말하고 싶어도 함께 가는 상대가 길리언이라 낄 수도 없는 자리였다.
“또 정치 얘기를 하러 가는 모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
후. 불편해. 어쩌면 나 혼자 왕후와 함께였다면 숨이 막혔을지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헤르시아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기에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렇게 떨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겠지. 그녀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헤르시아께서는 낯을 많이 가리시는 모양입니다.”
“데뷔당트 이후로 이런 큰 자리에 온 적이 없다 보니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헤르시아는 비록 몸은 덜덜 떨고 있었어도 말은 또박또박 잘하고 있었다. 왕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덜덜 떨고 있는 헤르시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국왕 전하의 사촌인데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전하의 자애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도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겉으로 웃음을 짓고 있긴 했지만, 헤르시아 만큼이나 어색한 모습일 게 눈에 훤했으니까.
“블레이크 공작부인.”
“네. 전하.”
“두 분이 비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공작께서 이국인인 공작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결혼식을 올렸다죠?”
소문은 잘 날조된다고 하지만 이번 소문은 제대로 날조된 듯 같은데. 아니, 너무 과대포장 되었다. 지금까지 ‘여긴 어디 난 누구’를 일관하고 있던 헤르시아마저도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그게 소문이 아니라 정말이란 말이에요?”
“맞아요. 헤르시아.”
아무래도 과잉 날조된 우리의 이야기가 헤르시아의 낯가림까지 없앤 모양인데. 나는 낯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부채질이 절실했지만, 최대한 겸손한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저를 보호하려고 한 일이 아니라 제가 이국인이다 보니, 하객들이 저를 낯설어할까 봐 공작님께서 하객분들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전하.”
“공작님께서 부인의 그런 겸손한 모습에 반하신 모양입니다.”
반했다라. 시카르가 나를 애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알면 깜짝 놀라겠지. 그러고 보니 귀족 부인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이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