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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로맨틱 악역님 (1) (49/197)

49화. 로맨틱 악역님 (1)2021.11.18.

내 소문을 듣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왕후와 헤르시아의 과한 관심에 자리를 잠시 피하기 위해 손을 씻고 오는 길에 귀부인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16549781358707.jpg“아까, 블레이크 공작님 보셨어요? 유카나다르 후작님이 공작부인께 물을 건네니까 그 물을 화분에 뿌려 버리지 뭐예요?”

16549781358707.jpg“어머, 정말이요? 블레이크 공작님이 공작부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봐요.”

그건 애정이 아니고, ‘우리 강아지에게 함부로 밥 주지 마세요.’와 비슷한 건데. 대화를 나누는 부인들이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대체로 젊은 부인들이었다. 어쨌든 사교계에서 내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몰래 더 듣고 있었다.

16549781358707.jpg“글쎄. 블레이크 공작님이 공작부인을 아끼는 마음에 결혼도 비공개로 했잖아요.”

16549781358707.jpg“정말, 블레이크 공작님 얘기가 맞는 거예요? 블레이크 공작님이라면, 폐왕을 처단했던 그 공작님이잖아요!”

16549781358707.jpg“블레이크가 둘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폐왕을 처단하신 그 공작님이 맞아요.”

16549781358707.jpg“세상에! 늘 허리에 장검을 차고 다니며 툭하면 장검을 꺼내 들어 ‘죽고 싶나?’를 외치는 그 블레이크 공작님께 그런 로맨틱한 면이 있었다고요?”

조금 전까지 설레는 듯 얘기를 나누던 부인 한 명이 금세 기운이 빠진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목을 늘어트렸다.

16549781358707.jpg“사람은 모르는 건가 봐요. 우리 백작님께서는 만인에게 친절하시고 나에게만 무뚝뚝하신데.”

16549781358707.jpg“그러게 말이에요. 늘 장검을 허리에 차고 계셔서 블레이크 공작님이라면 다들 무서워만 했잖아요. 공작님이 그렇게 로맨틱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네. 그 장검을 집에서까지도 차고 다닌답니다.

16549781358707.jpg“일전에는 직접 구빈원 아이들을 구했다더군요. 공사다망하신 공작께서 직접 그런 일에 관여한 것이 놀랍지 않나요?”

16549781358707.jpg“그때, 공작부인께서도 같이 계셨다는 말이 있어요.”

16549781358707.jpg“어머, 어머, 그럼 공작부인께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말이에요?”

16549781358707.jpg“말해 뭣해요. 공작부인이 낳은 아들까지도 친양자로 입양하신 분이신데요.”

아, 저 일 때문에 시카르가 로맨티스트가 된 건가?

16549781358707.jpg“그건 그냥 소문 아니에요? 오늘 결혼식 때도 공작부인의 아들은 안 나타났잖아요.”

16549781358707.jpg“국왕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셨는데, 정말 공작부인의 친아들이 맞대요.”

16549781358707.jpg“아이 아빠는 누군지 모르고요?”

16549781358707.jpg“모르죠. 듣기로는 이름도 없는 변방 어디에 있는 나라에서 오셨다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16549781358707.jpg“그럼 출신이 귀족인지 평민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한 거예요?”

16549781358707.jpg“말조심해요! 행여라도 그런 얘기했다가 공작님 귀에 들어가면 목숨 부지하기 힘드니까.”

음……. 로맨틱하다고 말은 해도 이들도 시카르가 무섭긴 무서운가 본데.

16549781386505.png“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지.”

모퉁이 뒤에 숨어서 귀족 부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나는 시카르의 섬뜩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16549781386505.png“사람들 속에 있기가 두려워서 여기 숨어 있는 건가? 그, 광장공포증 증상이 나타나기라도 한 건가?”

16549781413677.png“아니, 아니야. 사람들이 이 정도 많은 걸로는 나도 괜찮아. 그냥 손 좀 씻고 왔…….”

16549781386505.png“됐다. 직접 보도록 하지.”

시카르는 곧장 내 손을 잡으며 계단 모퉁이에서 빠져나와 복도로 걸어갔다. 그러자 복도에 서 있던 부인들의 설레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16549781358707.jpg“어머. 어머!”

16549781358707.jpg“너무 로맨틱해!”

16549781413677.png‘여보세요들. 이거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로맨틱한 거 아니라고!’

그가 내 기억을 읽느라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지그시 눈을 내리까는 로맨틱한 남편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시카르의 눈매가 예전에 비해 선해졌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를 부러워하는 이 시선들 때문에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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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좀 읽어라. 방금 별일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읽는 거지.

16549781413677.png“이제 다 봤으면 손 좀 놓는 게 어때.”

16549781386505.png“아직.”

16549781413677.png“왜, 아직이야?”

16549781386505.png“부인들이 부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서 조금 더 보는 것이지.”

16549781413677.png“설마 그런 걸 즐기는 건 아니지?”

16549781386505.png“물론 즐기는 중이다.”

16549781413677.png“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16549781386505.png“사람들이 내가 널 깊게 사랑한다고 믿을수록 내가 키안을 입양한 게 더 자연스러워지니까.”

아. 다 계획이 있구나.

16549781386505.png“하지만 그래서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기억을 보기 위해 잡은 거지. 이왕 손잡은 거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지. 남들 보기에 더 로맨틱하게 보일 수 있게.”

16549781413677.png“…….”

대개는 부부가 팔짱을 끼고 들어가기 때문에 시카르가 내 손을 잡고 들어가자 부인들은 도저히 내게서 눈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시카르의 손을 보며 말했다.

16549781358707.jpg“공작부인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헤르시아는 완전 시카르의 팬이 된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16549781446542.png“그러게요.”

그리고 나는 얼굴이 불타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얼굴이 빨개지고 있다는 소리다. 나는 낯뜨거운 얼굴을 푹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시카르는 왕후 앞으로 가서야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16549781386505.png“아내가 왕궁은 처음이라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하여 에스코트한 것뿐입니다.”

시카르는 일부러 주변 사람들이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좀 더 크게 했다. 남들에게 로맨틱하게 보이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저 성격에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헤르시아는 완전 시카르의 팬이 된 듯한 표정이었다.

16549781413677.png‘헤르시아. 소설 속에서는 당신의 전남편이라고요. 그것도 아주 나쁜 남편이요 정신 차려요.’

16549781446542.png“그러셨군요. 부인께서는 공작님의 그런 자상한 모습에 반하셨겠군요.”

16549781386505.png“자상하다는 표현을 할 만큼은 아니라 과찬인 것 같습니다.”

헤르시아는 소녀처럼 두 손을 포개서 볼에 대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아직 21살밖에 안 된 데다 남자친구도 있으니 그저 핑크빛으로 보이겠지. 정말 헤르시아는 그새 낯가림이 다 사라진 모양인 듯 밝은 미소로 손뼉을 치며 말했다.

16549781446542.png“참, 요즘 홍차에 설탕을 타 마시는 게 유행이던데, 설탕을 탄 홍차 어떠세요?”

16549781386505.png“저도 설탕을 넣은 홍차를 즐겨 마시곤 하지요. 그렇게 하시죠. 헤르시아.”

헤르시아가 시종에게 홍차와 설탕을 주문할 때 시카르는 홍차 가루와 우유를 같이 주문했다. 그래서 왕후와 헤르시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카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6549781413677.png‘저 뻔뻔한 표정!’

시종이 왕후와 헤르시아에게 설탕을 탄 홍차를 건네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은 시카르가 주문한 우유에 가 있었다.

16549781386505.png“홍차 가루 2 우유 8대 비율로 만들어서 공작부인께 드려라.”

당연히 밀크티를 만드는 것이 처음인 시종이 그것을 한 번에 만들 리가 없었다. 거기다 시카르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봐서 그런지 시종의 손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16549781413677.png‘아이고. 저러다 사고 치겠다.’

한참을 보던 시카르는 답답한 듯 시종을 노려보며 말했다.

16549781386505.png“됐으니 그냥 이리 가져와라.”

16549781358707.jpg“예. 옙! 공작님!”

잔뜩 긴장한 시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카르의 앞에 음료 재료 등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카르는 노련한 손놀림으로 밀크티를 만들어서 내게 건넸다.

16549781386505.png“드시죠. 부인.”

16549781413677.png‘현대로 데려가면 배우를 해도 되겠어.’

나는 나름 최대한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시카르가 건네는 밀크티를 받아들었다.

16549781413677.png“네. 공작님.”

나는 밀크티가 아니라 독약을 받아든 기분이었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슬쩍 내려놓았다. 헤르시아는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16549781446542.png“저, 공작님. 실례지만 그건 무슨 차예요?”

16549781386505.png“이건 밀크티라고 하는 겁니다. 아내가 일반 홍차는 잘 마시지 못해서 이렇게 타줘야 먹죠.”

16549781413677.png‘마치, 평소에 자주 타주는 것처럼 말하는 걸 보니 연기에 재미가 들렸구만.’

헤르시아는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16549781446542.png“지, 직접 차를 타신다고요?”

16549781386505.png“그렇습니다.”

평소 시카르라면 헤르시아와 몇 마디도 나누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래도 오늘 다정한 남편 컨셉을 제대로 잡은 모양이다. 헤르시아가 놀란 듯 목청을 키우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하듯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마치 그 시선을 즐기듯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내 찻잔에 우유를 조금 더 타주었다.

16549781413677.png‘시카르가 미소를 짓다니. 미친 게 분명해!’

헤르시아는 내가 마시는 밀크티의 맛이 궁금했던지 시종을 시켜 우유를 더 주문했다.

16549781446542.png“맛이 궁금해서 저도 한번 만들어 봐야겠어요. 왕후 전하. 전하도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16549781358707.jpg“새로운 차를 한 번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16549781386505.png“부인. 아무래도 왕후 전하와 헤르시아 영애께서는 밀크티가 처음일 테니 하나 타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후가 앞에 없었다면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을 테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나는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16549781413677.png“좋은 생각입니다. 공작님.”

그리고 나는 밀크티를 타서 왕후와 헤르시아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차를 맛보는 동안 나는 이를 악물고 시카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16549781413677.png“이럴 시간 없을 텐데? 조금 있으면 암살자가 등장할 시간 아니야?”

16549781386505.png“알고 있다. 안 그래도 지금 일어나려던 참이니까.”

시카르는 말을 끝낸 후 왕후와 헤르시아에게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시카르의 빈자리를 두려워해야만 했다. 밀크티를 맛본 헤르시아가 감탄을 하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귀족 부인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몰려왔으니까.

16549781358707.jpg“이게 뭐예요?”

16549781446542.png“밀크티라고 하는 거래요. 공작부인께서 만들어 주신 건데 너무 맛있어요.”

16549781358707.jpg“그래요? 어디,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16549781446542.png“저도 모르겠어요. 공작부인. 어떻게 만드는 거죠?”

그나마 이 연회장에 있는 귀족 부인들이 몇 없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구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긴장으로 식은땀이 나오는 것을 조금 닦으며 찬찬히 설명했다.

16549781413677.png“따뜻한 물에 걸죽하게 푼 홍차를 2, 우유를 8 비율로 넣고 섞으면 밀크티가 완성된답니다. 기호에 따라 설탕은 넣어 주셔도 되고 안 넣어 주셔도 돼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말한 대로 밀크티를 타는 데 여념 없었다. 이제 알려줬으니 이들끼리 만들고 마셔보고 하겠지. 사람들의 반응은 꽤 좋았다.

16549781358707.jpg“음, 정말 맛있는데요?”

16549781358707.jpg“이렇게 마시는 건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여기 와서 밀크티를 타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거기다, 베일에 싸인 나라는 인간을 처음 본 탓에 사람들은 내게 많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왕후가 되어야 했다. 왕실의 가장 큰 경사인 국왕의 결혼식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면 안 됐기에 나는 왕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16549781413677.png‘생각해보자. 왕후를 부각시켜 줄 만한 게…….’

그 순간 왕후가 받은 결혼식 선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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