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로맨틱 악역님 (3)2021.11.25.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가……?”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하지. 지금 저들을 계속 두다간 이곳이 물바다가 될 것 같군.”
지금 시카르가 말하는 저들은 헤르시아와 아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었으니까.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마자 시카르는 나를 번쩍 들어 안으며 말했다.
“네가 심하게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어서 안고 가는 거니까. 내려놓으라는 소리 따위는 안 하는 게 좋다. 어차피 네 말을 듣지도 않을 테니까.”
안 그래도 너무 놀란 데다 현기증까지 일어나 혼자 걸어갈 수 없는 차라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시카르가 날 안고 테라스를 나서는 순간,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안겨있어도 정신이 아찔했다. 시카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할 내 심리 상태를 곧장 알아차리며 말했다.
“사람들 시선을 일일이 받아 줄 필요 없으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라.”
시카르의 말대로 나는 곧장 그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묻혔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니 훨씬 나았다. 다들 놀란 듯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시카르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우리 뒤를 따라오는 헤르시아와 아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왜 그러는지 묻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지며 이내 고요해지는가 싶더니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왕궁을 빠져나와 마차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길목에 서 있는 은은한 가로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눈이 부실만큼 밝은 샹들리에 아래를 벗어나니 조금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 내 발로…….”
“다 왔다.”
다 왔다고 했지만, 한참을 더 걸어서야 마차에 도착했다.
마차 앞에 도착해서야 시카르는 나를 내려놓았다. 이까지 오느라 팔이 아팠을 것 같은데도 그는 멀쩡해 보였다. 사실 멀쩡해 보이는 건지 멀쩡한 척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여기까지 안고 오느라 무겁지 않았어? 팔은 괜찮아……?”
“두 손 좀 내밀어 보지.”
팔 괜찮은지 물어봤더니 갑자기 왜 손을 내밀라고 하는 거지? 나는 그의 주문에 따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이 하늘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고는 내 손 위에 늘 자신의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장검을 올렸다. 장검에 묵직한 무게에 나는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곧 장검은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고, 시카르가 재빨리 장검을 손으로 낚아챘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시카르는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이런 걸 하루 종일 허리에 차고 다닌다. 그러니 너 하나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쯤이야. 우습다.”
“뭐, 그럼 됐고.”
“일단 집으로 가지.”
“비카 님은? 아직 안 왔잖아.”
“비카가 오면 뒤처리는 누가 하고? 비카는 왕에게 내가 먼저 떠났다는 말을 한 다음 뒤처리를 깔끔하게 끝내고 나서 돌아올 것이다.”
‘귀찮다고 엄청 투덜거리겠는데.’
“귀찮은 짓을 시켰다고 매우 투덜거리겠지만.”
‘역시 그렇겠지.’
“넌 고생해서 춤 연습한 보람이 없어서 아쉽겠군.”
“전혀. 춤을 안 춰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춤을 배운 걸 까먹으면 곤란하니 잊지 말도록 해라. 언젠간 써먹을 일이 있을 테니까.”
“걱정마. 안 잊으니까.”
‘그 고생을 했는데 잊을 수가 없지.’
“이제 마차에 오르지.”
시카르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는 힘차게 치달렸다.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암살자들이 픽픽 쓰러진 것들이 일들이 반복해서 되감기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리고 시카르의 말도.
“아무리 그게 암살자라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네가 놀랄 테니까.”
원작에서 시카르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암살자들을 모두 베어 내버린, 자비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시카르가 내가 놀랄까 봐. 비카를 시켜 암살자들을 잠재워버렸다. 내가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다섯 명을 한 번에 잠재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알고 있다. 특히 암살자와 같은 그런 장정들은 더더욱. 게다가 비카의 성격에 쉽게 수락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그냥 죽이면 될 것을 왜 그리 귀찮게 구냐고 한 번에 듣지 않았을 게 눈에 훤했다. 그런데도 비카를 설득시켜서, 물론 설득이 아니라 협박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어쨌든 비카로 하여금 암살자를 잠재우게 만들었다는 건 시카르 답지 못 한 행동이었다. 아니, 시카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위해서.
‘시카르가 그렇게까지 배려 깊은 성격이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다. 그가 배려가 있는 성격이라면 처음부터 내게 칼을 들이대며 거래를 하지 않았겠지. 그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시카르가 설마 날 좋아하나……?’
그러고 보면 은근히 내게 조금 잘해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시카르를 빤히 쳐다보다가 두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날 좋아하는 지 한번 물어볼까?’
아, 아니지. 착각하는 건 시카르 하나면 족하지. 족해. 나까지 휘말리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시카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
사실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저렇게 잘 쳐다보곤 했는데 오늘따라 내가 괜시리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인간이 날 좋아한다고 해서 내게 큰 자비를 베풀어 줄 것도 아닌데. 신경 끄는 거야. 나까지 착각하는 불상사는 저지르지 말아야 해. 키안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하자. *** 하지만, 다음 날 시카르와 아침을 먹던 나는 자꾸만 나를 쳐다보는 시카르를 보며 신경 끄겠다던 결심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너, 너 왜 자꾸 날 쳐다보는 거야?”
“불편한가?”
“아니,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가 좋아져서 쳐다본다거나 계속 신경 쓰여서 쳐다본다거나…….’
‘나 왜 이러니…… 역시 시카르한테 착각 병이 옮은 건가?’
“굳이 이유를 대자면 감시겠지.”
“이미 이 공작저에 갇혀 살고 있는 신세인데, 무슨 감시를 한다는 거야?”
“얼마나 교양 있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이지.”
‘아. 잔소리하려고.’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군.”
네 덕분입니다.
“왕의 결혼식도 무사히 다녀왔으니 며칠 후에 할머니를 보러 갈 예정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가서 할머니 선물 좀 사려고 하니 식사가 끝나는 대로 옷 챙겨입고 나오도록 해.”
“그럼 키안도 같이 가.”
“키안은 왜?”
“할머니 뵈러 갈 때 키안도 같이 가면 좋잖아. 선물 살때도 같이 사면 더 좋을 것 같고.”
“뭐, 그러지. 어려운 건 아니니까.”
오늘 키안은 비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탓인지 키안은 자느라 아침도 안 먹고 있는 비카를 깨워서 밥을 먹이겠다며 아침부터 비카의 방에 가 있었다.
‘어쩜 저렇게 착하고 멋진지.’
어쨌든 그래서 나는 식사를 얼른 끝내고 키안을 부르기 위해 비카의 방문을 슬쩍 열었다. 키안에게 어서 나갈 채비를 하라고 일러주기 위해 방문을 열었지만, 다정하게 비카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는 키안을 보니 방해하는 것 같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제 우리가 먼저 마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마차를 구하지 못한 비카는 밤새 숲길을 달려왔다고 한다. 비카는 계속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키안은 비카의 목이 아래로 떨어지려 할 때마다 입안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비카 님. 정신 좀 차려요.”
“도련님. 이거 새로 개발한 고문이야? 잠 좀 자려는데 왜 자꾸 먹여.”
“사람은 병약할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요.”
“걱정마. 난 그런 거로 안 죽어.”
“안 죽어도 먹어요. 그래야 금세 기운을 차리니까요.”
지금 키안이 하는 대사는 모두 발리제가 키안이 감기로 아파서 밥을 못 먹고 있을 때 했던 말들이었다.
‘사람은 병약할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 그래야 금세 기운을 다시 차리는 거야.’
그래서 키안이 진심으로 비카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키안은 어쩌면 그때의 발리제의 마음을 이해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또 누군가를 죽음으로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두 사람의 모습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키안의 말이 못내 슬프게 들렸다.
‘이제는 내가 등장할 시간이군.’
키안은 갑작스런 내 등장에 기분 좋게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키안. 비카 님은 이제 그만 주무시게 해드리고 우린 나갈까?”
“하지만 아플수록 영양 상태가 좋아야 한다고…….”
“괜찮아. 비카 님은 조금 몸살기가 있는 것뿐이니까 금세 기운을 회복하실 거야.”
키안은 비카의 곁을 떠나기 아쉽다는 듯 꾸벅꾸벅 졸고 있는 비카를 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음…… 알겠어요.”
“그럼 우리 외출 준비할까?”
“외출 준비요?”
“응. 할머님 기억하지? 며칠 후에 할머님을 만나러 갈 예정이야. 그래서 오늘 할머님이 좋아하실 만한 선물을 사려고 해.”
“우와! 좋아요! 어머니! 정말 증조할머니가 보고 싶었거든요!”
기뻐하는 듯한 키안의 모습에 내 마음도 활짝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키안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 할머니를 만나러 갈 걸 그랬나 보다. *** 우리 세 식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슷하게 차려 입고 나왔다. 알고 보니 안드레아가 우리가 외출한다는 얘기를 듣고 비슷하게 드레스 코드를 맞춘 것이었다. 마치 현대에서 가족사진을 찍을 때처럼 말이다. 수도 시내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할머니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와 초코 퐁듀, 초콜릿 등을 가득 샀다. 할머니가 초콜릿 종류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때 잃은 언니의 영향이었다. 할머니의 언니는 어린 할머니가 울면 초콜릿으로 달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점잖으신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초콜릿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며 언니를 떠올리셨다. 그다음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뜨개실을 실컷 산 후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찻집에서 본의 아니게 칸막이 건너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어제 블레이크 공작님께서 공작부인을 품에 안고 퇴장하시고는 마차가 있는 곳까지 쭉- 안고 걸어가셨대.”
“미쳤어. 진짜 멋있어.”
‘그 뒤로 나한테 장검을 올린 건 안 본 모양이지?’
“그리고 나서 검의 맹세를 하셨대.”
응?
“검을 내밀고 막 뭐라고 하셨는데 사람들 말로는 이 검에 맹세 하건데 반드시 당신을 지켜 주겠소! 뭐 이런 맹세 같았대.”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풉- 하고 웃음이 나올 뻔해서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 아주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기를 날조하는구만. 반면, 시카르는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대사군. 다음에는 저 대사를 쓰도록 해야겠군.”
‘정신 차려!’
그러고 보니 시카르가 어제 나를 위해 암살자들을 재우는 배려를 한 것도 로맨티스트 역할에 심취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그의 모든 행동이 납득이 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또 말이야.”
뭐, 다음은 또 뭔데. 이제는 날조가 놀랍지도 않다.
“어제 공작부인이 놀랄까 봐 암살자들을 모두 잠재운 거래! 너무 멋있지 않아?!”
이건 사실이어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쿵쿵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