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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로맨틱 악역님 (4) (52/197)

52화. 로맨틱 악역님 (4)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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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르가 날 좋아해서 그런 것이든 아니든 날 배려한 행동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배려를 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내게 배려하고 잘해준 일들이 종종 있긴 했지만, 모두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암살자들을 잠재운 일은 자신에게 그 어떤 이득이 돌아가지 않음에도…….

16549782170027.png‘나 또 왜 이러니 착각하지 않기로 해놓고. 정신 차려야지.’

그리고 날 좋아하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그동안 내가 당한 게 얼만데, 나 좀 좋아해 준다고 해서 내가 마음 약해져서 좋게 봐주고 그러진 않을 거니까. 나도 독한 놈에겐 독한 사람이라고. 심장이 뛰는 것도 시카르가 나한테, 잘해줘서 기분 좋게 놀란 게 아니라, 의외라서 놀란 것 뿐인 거지. 그렇고. 말고.

1654978217003.png“어머니. 무슨 생각하세요?”

16549782170027.png“응? 아, 아무 것도 아니야.”

키안은 갑자기 걱정되는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더니 내 손을 지그시 잡았다.

1654978217003.png“어머니 이마 좀 만져봐도 돼요?”

당연히 되지. 나는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16549782170027.png“그런데 갑자기 이마는 왜?”

1654978217003.png“얼굴이 빨개지셔서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걱정돼요.”

내 얼굴이 지금 빨개 보이는 건가? 어쩐지 열이 좀 오른다 했더니. 시카르는 마시던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듯 거만을 떨며 말했다.

16549782170051.png“유라는 원래 내 앞에서 자주 얼굴이 빨개진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얼굴이 잘 빨개지는 게 정상이거든. 아파서 그런 게 아니니 걱정 말도록.”

그땐 좋아서가 아니고 화가 나서 그랬었지. 시카르의 말을 들은 키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마침, 무슨 일인지 궁금해질 때쯤 키안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1654978217003.png“저. 어머니.”

키안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기에 나도 속삭이며 대답했다.

16549782170027.png“응?”

1654978217003.png“이건 비밀인데요.”

뭐가 비밀일까. 비밀이라고 해서 그런지 나는 왠지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었다.

1654978217003.png“루시가 저를 볼 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요. 혹시 루시가 절 좋아하는 걸까요?”

악! 귀여워라. 그래서 조용히 귓속말을 한거구나. 그런데 이걸 어떡하나. 귓속말을 한 보람도 없게, 시카르가 나중에 내 기억을 통해 다 알게 될 텐데. 어차피 원작 내용도 다 알고 있어서 별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귓속말을 하면 시카르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이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어차피 내 기억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걸 알아서 그렇거나,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듣느라 이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키안을 보며 기분 좋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16549782170027.png“그런 일이 있었어? 루시가 우리 키안을 좋아하나 보네.”

이번엔 키안의 얼굴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래. 너도 루시가 좋겠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란다. 키안. 부끄러워하지 말렴. 키안은 고개를 숙였다가 슬며시 들어 올리더니 망설이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1654978217003.png“어머니는 어떠세요……?”

16549782170027.png“응?”

1654978217003.png“루시가 어머니 마음에 드나 해서요. 전 어머니 마음에 드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당장 결혼식이라도 올릴 기세인데. 하지만, 키안을 마마보이로 키울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49782170027.png“키안. 아무리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해도 판단은 스스로 내려야 하는 거야. 그래야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특히 키안은 군주가 될 몸이니 그 누구보다도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더 뛰어나야 하겠지.

16549782170027.png“그러니, 키안. 선택은 스스로 내려야 해.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일수록 더더욱 말이야. 그리고 난 네 선택을 항상 존중하고 지지해줄 거야.”

키안은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해한 듯 밝게 미소를 지었다.

1654978217003.png“명심할게요. 어머니.”

16549782170027.png“그럼 우리 새끼손가락 한 번 걸어볼까?”

1654978217003.png“네. 약속할게요.”

키안과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모자처럼 새끼손가락을 손에 걸었다.

1654978217003.png“대신에. 아직 전 어리니까. 더 클 때까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고 싶어요.”

키안……. 키안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막상 입양을 해놓고 내가 한 것이라고는 밤에 동화책을 읽어주며 잠을 재운 게 다인 것 같은데, 이렇게도 나를 사랑해주다니. 코끝이 찡할 만큼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 울 수는 없었기에, 나는 더욱 밝은 미소를 지었다.

16549782170027.png“사랑한단다. 키안.”

1654978217003.png“사랑해요. 어머니.”

우리 두 모자가 서로를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비고 있으니 앞에서 무언가 작게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카르가 내 앞으로 밀크티 한 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16549782170051.png“키안. 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료가 뭔지 아나?”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어리둥절해 하는 나와는 달리 키안은 아주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1654978217003.png“밀크티요!”

16549782170051.png“그래. 이게 바로 밀크티다. 밀크티 만드는 법은 알고 있나?”

직전까지도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던 키안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시카르는 비웃듯 피식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16549782170051.png“이 정도는 만들어줄 줄 알아야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생기겠지.”

나는 시카르가 내려놓은 밀크티를 다시 한번 더 쳐다보았다.

16549782170027.png“네가 직접 만든 거야?”

16549782170051.png“물론.”

길리언의 결혼식장에서야 로맨티스트 흉내 내느라 그렇다 친다지만, 여기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주변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16549782266698.jpg“나, 방금 지나오다 봤는데 공작님이 공작부인께 직접 밀크티를 타주시는 거 있지.”

16549782266698.jpg“공작부인께서 밀크티 밖에 안 드셔서 직접 밀크티를 타 주신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

저걸 노리고 귀족 부인이 지나갈 때 내 앞에 차를 놓은 거군. 시카르의 표정은 마치,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정말 확실해졌다. 처음 시카르는 길리언에게 우리가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라는 걸 믿게 하기 위해서 로맨티스트인 척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서워만 하다가 호감을 보이니 신기해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았다. 찻집을 나온 이후에도 시카르의 주변의식은 계속 됐다. 의식이라기보다 주변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게 더 컸지만. 주변을 그렇게 의식한다 이거지?

16549782170027.png‘그렇게 즐기고 싶다면, 더 즐기게 해줘야지. 후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잡고 있던 키안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리고 키안의 눈높이에 맞춰 살짝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16549782170027.png“키안. 공작님깨 목마 태워 달라고 할까?”

1654978217003.png“목마요?”

16549782170027.png“응.”

원작에서 키안은 목마를 좋아했지만, 발리제를 잃고 난 이후로는 한 번도 목마를 타본 적이 없었다. 레이독스가 쌍둥이들을 목마 태우는 모습을 보며 한없이 부러워하기만 했었다. 그 여리고 어린 마음에는 항상 부모에게 사랑받고 크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한 번쯤은 목마를 태워주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 차에 때가 온 것이다. 시카르의 무릎 위에 앉는 것이라면 질색하던 키안도 목마라는 말에는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지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1654978217003.png“공작님이 태워주실까요……?”

그래. 네가 보기에도 의심스럽겠지. 사실 나도 자신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또 언제 요구할 수 있겠냐고.

16549782170027.png“당연하지. 내가 말해볼게.”

나만 믿으렴. 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나만 믿으라는 듯 키안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카르를 불러세웠다.

16549782170027.png“시카르.”

16549782170051.png“왜 그러지?”

나는 키안에게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시카르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16549782170027.png“키안을 목마 태워 줘.”

시카르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16549782170051.png“뭐라고?”

16549782170027.png“키안을 목마 태워 달라고.”

16549782170051.png“그건, 좀 무리한 부탁이군.”

16549782170027.png‘호락호락하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

나는 시카르에게 바짝 다가가 대단히 중요한 업무수행이라도 내리는 듯 강경하게 말했다.

16549782170027.png“네 말대로 우리의 위장 결혼이 완벽해 보이려면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날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며? 그렇다면, 키안에게 목마 정도는 태워 줘야지.”

시카르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이를 목마 태운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 나는 시카르가 빨리 결단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16549782170027.png“지금까지 잘하다가 산통을 깰 생각은 아니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어.”

그건 정말이었다. 이 레카도르 왕국에서 폐왕보다도 더 무섭다고 소문이 자자한 시카르였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아이가 있는 이국의 여인과 결혼한 것만도 레카도르 전역을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와 여자와 함께 가족 데이트를 즐기는 현장을 목도 중이니, 이 사람들 눈에는 우리 세 식구가 진귀한 구경거리와도 같을 것이다.

16549782170027.png“다정해 보이는 한 가족이 되기로 한 거 잊었어?”

시카르도 거기까지 예상한 까닭인지 더 지체하진 않았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어색하게 걸어가 키안을 한 번에 번쩍 들어 올리며 목마를 태웠다. 그러니까 난, 그가 정말로 키안을 목마 태우는 감격의 순간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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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둘의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지만,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 무섭다고 소문난 공작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얼마나 놀라울까.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도 모자라서 목마까지 태워주는 다정한 양부! 물론 이건 모두 연출이긴 하기만 겉으로 보기엔 단란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비록 두 사람의 표정이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워 보인다랄까. 그런데 시카르와 키안을 보고 있으니 은근히 둘이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외모는 전혀 달랐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와 강인하고 대쪽같아 보이는 분위기가 판박이였다. 목마를 타고 있긴 하지만 어색해서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까지도 완벽하게! 키안을 목마 태운 시카르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기에 나는 두 사람이 남들 보기에 좀 더 다정해 보였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입김을 날렸다.

16549782170027.png“두 사람 지금 싸운 거 같은 표정들이잖아. 좀 더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면 좋겠어. 그럼 나도 행복해질 거 같거든.”

약간의 입김은 정통으로 두 남자에게 스며들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표정이 확 바뀌었으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은 웃었다. 물론 매우 어색한 미소였지만 그래서 더 보기가 좋았다. 시카르가 이렇게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왠지 정이 갔다. 무섭고 미친놈이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니란 게 느껴졌으니까. 이 어설프게 다정한 두 부자의 모습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마차는 바로 코앞에 있었기에 오래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탄 후 동시에 어색한 표정으로 각자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꼭 닮아 보여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왠지 이러다 정들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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