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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로맨틱 악역님 (5) (53/197)

53화. 로맨틱 악역님 (5)2021.12.02.

이내 키안이 꾸벅꾸벅 조는 탓에 어색한 두 남자의 시선 피하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6549782379048.png“시카르. 키안이 졸고 있는 것 같은데?”

시카르는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좀 쓰긴 했지만 키안을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때 레이독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49782379052.png‘공작님께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십니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지금 보니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시카르의 모습이 영락없이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처럼 보였으니까.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키안은 잠에 빠져 있어서 시카르는 키안을 안고 공작저로 들어와야 했다. 마치 외출하다 돌아온 단란한 가족의 모습처럼 느껴져서 내심 마음이 포근해졌다. 조금 돌아다녀서인지 고단함을 느끼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때, 안드레아가 쫓아 나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16549782379057.jpg“마님. 손님이 와 계십니다.”

16549782379048.png“손님이라니?”

16549782379057.jpg“모비아트 백작가의 영애이신 헤르시아 님께서 마님을 찾아와 계십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국왕 전하의 사촌이시기에 내방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들어오던 시카르는 이쪽을 힐끗 보고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며 말했다.

16549782379112.png“난 그럼 가서 키안이나 눕혀야겠군. 손님 잘 맞이하도록.”

16549782379048.png“시카르. 키안 옷도 좀 갈아 입혀줘.”

시카르는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주고는 계단 위로 사라졌다.

16549782379048.png“괜찮네. 국왕 전하의 사촌이니 당연히 무례를 범하면 안 되지. 잘했네. 안드레아. 그런데 영애께선 언제 오신 거지?”

16549782379057.jpg“3시간쯤 되었습니다.”

16549782379048.png‘오래 기다렸구나. 근데, 헤르시아가 공작저까지 무슨 일이지?’

16549782379048.png“차는 새로이 내오도록 하게.”

16549782379057.jpg“알겠습니다. 마님.”

16549782379048.png‘3시간이면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나는 옷을 다시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헤르시아가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16549782409087.jpg

  ***

16549782379048.png“오래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헤르시아는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나서는 나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16549782409097.png“아,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16549782379048.png“앉으세요.”

16549782409097.png“가,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16549782379048.png“그런데 저의 공작저에는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시죠?”

16549782409097.png“죄, 죄송해요. 기별을 하면 늦을 거 같아서. 아무래도 이런 인사는 빨리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았거든요.”

16549782379048.png“인사요……?”

16549782409097.png“어제 저를 구해주신 것에 대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제 그 괴한들이 폐왕을 지지했던 잔재 세력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를 암살하기 위해 침입한 것이라고요. 하마터면 저 때문에 공작부인께서도 위험할 뻔했다고 해서 얼마나 고맙고 미안하던지요. 그래서 고맙단 인사와 죄송했단 인사를 함께 드리고 싶었어요.”

나는 전혀 그런 건 상상조차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 말했다.

16549782379048.png“세상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 일어날 뻔했군요. 폐왕의 잔재 세력이라니……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헤르시아.”

16549782409097.png“네.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어제 공작님께서 암살자들을 생포한 덕분에 고문을 통해 알아냈다고 했어요. 그래서 공작님께 큰 공을 내리신다고도 했고요.”

원작에서는 시카르가 암살자들의 기억을 통해 폐왕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두 붙잡아 들였다. 이번에는 시카르가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지만, 암살자들을 생포한 덕분에 국왕이 해결하게 된 모양이다. 그러면 원작처럼 큰 공을 치하하진 않을 수도 있겠지. 헤르시아는 갑자기 수줍게 발그레진 자신의 볼을 두 손으로 만졌다.

16549782409097.png“물론 공작님이 저를 구해주게 되신 이유가 그곳에 공작부인이 계셨기 때문이겠지만요.”

16549782379048.png‘근데 얼굴은 왜 빨개져.’

16549782409097.png“정말 머, 멋있으셨어요.”

갑자기 백마탄 기사처럼 위층에서 툭 떨어져서 우리를 구했으니 멋지긴 했지. 조금 전까지 수줍게 볼을 붉히던 헤르시아의 눈동자가 갑자기 영롱해지며 번쩍번쩍 빛이 돌았다.

16549782409097.png“특히! 공작부인께서 놀라실까 봐 암살자들을 모두 잠재우신 거요!”

그 얘기구나. 이 얘기가 언제까지 이렇게 미화되려나.

16549782409097.png“그날 거기에 제 남자친구 아론도 있었거든요. 공작님께서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갔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 거래요.”

이미 다 아는 얘기라도 나는 아주 뜻밖의 얘기에 또 한번 놀란 듯 눈썹을 올렸다.

16549782379048.png“남자친구분께서 많이 놀라셨겠군요.”

16549782409097.png“놀라기도 했지만, 감탄하셨다고도 하셨어요. 다크엘프 님께서 ‘가서 목을 치자!’라고 하셨는데 공작님께서 ‘아내가 놀란다.’라고 하시고는 ‘놈들을 재워라.’라고 말씀하셨대요.”

시카르를 흉내내며 말하는 헤르시아의 말투만 듣고도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을 했을지 모두 상상이 되었기에 나는 웃음이 나는 걸 참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16549782379048.png“민망하군요. 헤르시아께서는 어제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신가요?”

헤르시아는 감동한 눈으로 눈썹을 내리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16549782409097.png“많이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답니다. 공작부인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신가요?”

놀란 정도가 아니라. 놀라 기절하기 직전이었지. 쓰러진 암살자들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을 자지 않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16549782379048.png“저도 어제 많이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헤르시아의 남자친구분께서 많이 놀라셨겠군요.”

16549782409097.png“네. 아론도 너무 놀랐다고 했어요. 그래서 국왕 전하께서 오늘부터 저를 수행해줄 근위대 몇 명을 보내주셨어요. 당분간 폐왕의 잔당들을 완전히 없앨 때까지는 저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조하셨거든요.”

근위대를 붙여준 것까지는 원작과 똑같구나.

16549782409097.png“그리고 공작님께도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공작님께서는 많이 바쁘시겠죠?”

16549782379048.png“많이 바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이를 재우는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을 거예요.”

정말 시카르가 아이를 재우고 있는 중이기에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헤르시아의 눈이 한 번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16549782409097.png“공작님께서 직접 아이를 재우고 계셨군요.”

어머어머만 외치지 않았을 뿐이지 헤르시아의 표정은 어머어머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16549782379048.png‘원래의 헤르시아는 이렇게나 해맑았구나.’

그녀를 살려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16549782379048.png“헤르시아. 오늘은 이만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들러줄래요?”

찻잔을 손에 들려던 헤르시아는 깜짝 놀란 듯 손에서 찻잔을 떨어트릴 뻔하다가 겨우 다시 잡았다.

16549782409097.png“정말, 다음에 또 와도 되는 건가요?”

진심이었다. 앞으로 헤르시아가 아론과 잘 지낼지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질 것 같으니까.

16549782379048.png“네. 다음에 또 같이 차 한잔해요.”

헤르시아는 터져 나오는 감탄을 삼키듯 손으로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 손을 내렸다.

16549782409097.png“고, 공작부인께서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으신다고 드, 들었는데 저, 정말 다시 와도 되는 거예요?”

16549782379048.png“네. 다시 오세요. 다음에 꼭 다시 차 한잔해요.”

16549782409097.png“이럴 수가. 공작부인을 또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헤르시아는 나가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보며 인사를 해서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줘야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밝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제 그녀의 사랑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 원작 속에서 사랑했던 남자가 이끌었던 민병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헤르시아. 그녀는 죽음 앞에서야 평생을 그리워했던 옛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공작저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안드레아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있던 헤르시아를 다급하게 불렀다.

16549782379057.jpg“마님! 아론 하비커가 이끈 민병대가 공작저 앞까지 왔다고 합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16549782409097.png“안드레아. 가기 전에 내가 주는 마지막 잔을 받아주시겠어요?”

평소 그 침착하던 안드레아도 코 앞까지 들어온 민병대를 피하기 위해 그녀가 건네는 잔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마셨다. 그리고 이내 평소 마시지도 않던 포도주를 권하는 헤르시아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포도주는 수면제였다.

16549782409097.png‘그동안 고마웠어요. 안드레아.’

헤르시아는 자신이 타야할 마차에 안드레아를 태운 후 다시 공작저로 향했다.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이 공작저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헤르시아. 자신이어야 했다. 블레이크의 파멸은, 그녀가 이 공작저에 오게 된 순간부터 그녀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무게이고,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니까. 그것이 운명이란 것에 이끌려 다닌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이라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라면, 달게 받아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저 안까지 쳐들어온 민병대가 홀로 꼿꼿이 앉아 있는 헤르시아를 발견했다.

16549782379057.jpg“블레이크 공작부인 헤르시아를 찾았다! 헤르시아가 이곳에 있다! 그녀를 즉각 처단하라!”

키안 레카도르는 결코 여인을 죽이라 명하지 않았지만, 광기에 찬 민병대의 칼날은 길리언의 잔당들을 단 한 명도 남겨놓지 않고 척살했다. 민병대의 칼날이 헤르시아를 스치고 지나간 그 순간, 아픔의 고통은 찰나였다. 헤르시아는 이제 자신의 죄를 씻어내린 홀가분함에 낮게 탄식했다.

16549782409097.png‘이제 끝났어.’

헤르시아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16549782379057.jpg“블레이크 부인 헤르시아를 처단했다! 민병대의 이름으로 블레이크를 처단했다!”

뒤늦게 달려온 아론은 믿을 수가 없었다. 헤르시아를 피신시키기 위해 마차를 보낸 터였다. 헤르시아를 태운 마차가 무사히 공작저를 떠났다는 전보도 받았기에 그녀가 이미 이 공작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민병대가 헤르시아를 척살했다는 고함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다른 사람으로 오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앞까지 왔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제 눈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은 다시 보고, 또다시 봐도, 꿈에서조차도 그리워하던, 평생에 하나뿐인 여인 헤르시아였다.

16549782522404.png“헤르시아!”

아론은 헤르시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녀의 곁으로 가 주저앉았다.

16549782522404.png“안 돼! 헤르시아!”

살아생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불러보고 싶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그녀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길리언의 의해 사랑하는 여인을 잔인하게 잃고, 그녀를 다시 되찾기 위해 그 반대편에 섰다. 키안 블레이크는 약속했다. 이 왕위 찬탈이 끝나고 나면 남은 여생을 편안히 살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고. 그는 헤르시아를 무사히 구출한 후, 한적한 시골에 가서 남은 여생을 그녀와 함께 편안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이렇게 그녀를 허무하게 보낼 수밖에 없다니!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그 만남이 그녀의 죽음 앞이라니!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던 그 사랑을 죽음으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16549782522404.png“모두 나가라.”

민병대는 비탄에 젖은 아론의 슬픈 목소리에 모두 숙연함을 느끼고 물러섰다. 헤르시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아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론은 그 손을 잡고 그녀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질 수 있게 볼을 비볐다.

16549782409097.png“아론…….”

16549782522404.png“헤르시아……. 내 사랑.”

16549782409097.png“아론 울지마…….”

16549782522404.png“흐윽…… 헤르시아…….”

16549782409097.png“난 이 죽음이 억울하지 않아…… 내 평생을 그리워했던 너를 만나고 갈 수 있어서…… 난 이 죽음이 감사한걸…….”

아론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헤르시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16549782522404.png“헤르시아. 흐윽…… 늦게 와서 미안해……. 사랑해. 헤르시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헤르시아…….”

헤르시아는 남은 힘을 짜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아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16549782409097.png“나도 단,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척 없었어. 아론…….”

16549782522404.png“흑. 헤르시아!”

헤르시아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16549782522404.png“헤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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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론은 몇 번을 부르짖으며 헤르시아를 불러봤지만, 눈을 감은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그녀를 결코 외롭게 살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권력 앞에서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다시 그녀를 찾기 위해 지금껏 발버둥치며 오직 이날만을 보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떠난 지금 아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16549782522404.png“그래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헤르시아.”

아론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헤르시아를 따라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16549782522404.png‘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결코 널 외롭게 두지 않을게. 헤르시아.’

헤르시아의 곁에 얼굴을 묻은 아론은 죽음이라도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음에 기뻐하며 눈을 감았다. *** 나는, 소설 속의 내용을 반추하며 조용히 빌었다. 아론이 꿈꾸었던 것처럼, 이 생에서는 두 사람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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