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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어쩌면 착각일까 (1) (54/197)

54화. 어쩌면 착각일까 (1)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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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뒤, 우리는 고대하던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하느라 바빴지만,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난다는 기쁨은 물론이고 공작저를 벗어나 낯선 곳, 그것도 대신전이라는 곳을 가는 것이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설렘 가득한 기대로 심장이 뛰었었다. 안드레아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우리의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16549782642315.jpg“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짐 마차에 모두 싣도록 해라. 바쁘니 모두 서둘러라!”

음. 안드레아는 확실히 카리스마가 있단 말이지. 안드레아가 새벽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챙겨준 덕분에 우리는 크게 챙길 게 없었다.

16549782642315.jpg“마님! 이것도 챙기셔야 합니다!”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안드레아가 내게 챙겨준 것은 멀미약이었다.

16549782642324.png“고맙네. 안드레아.”

나는 안드레아에게 방긋 미소를 지어준 후 마차에 올랐다.

16549782642324.png‘후.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침부터 마차에 오른 탓에 키안은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반쯤 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16549782642324.png“키안. 졸리면 그냥 자도 돼. 어차피 가는데 몇 시간 걸릴 거야.”

평소의 키안이라면 정말 그대로 자도 되는지 물었을 테지만 오늘은 정말 잠이 많이 오는 모양인지 묻지도 않았다. 키안은 완전히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고, 이제 시카르는 완전히 익숙한 듯 잠든 키안을 안고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곧, 시카르 마저 잠이 들었다. 둘이서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웃음이 났다.

16549782642324.png‘진짜 부자가 따로 없네.’

나도 잠을 좀 청해볼까 했지만, 처음으로 멀고도 먼 여행을 하는 탓에 어제부터 설레서 그런지 잠에 들지 않았다. 어느새 세상은 벌써 겨울을 보내고 서서히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신전으로 가는 남쪽으로 접어들수록 날은 더 따뜻했다.

16549782642324.png‘벌써 봄이구나.’

대신전은 남쪽에 있는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가서 며칠을 머물다 오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꽤 많은 짐을 싣고 갔다. 우리가 탄 마차 외에도 디저트와 각종 음식 재료를 실은 짐 마차와 하인들이 탄 마차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신전에 도착하니 신전 초입에서부터 할머니와 신관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키안은 할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16549782642324.png“키안. 이럴 땐 달려가 할머니께 안겨도 좋아.”

16549782642351.png“정말요? 어머니?”

16549782642324.png“그럼. 할머니께서 매우 기뻐하실 거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안은 매우 기쁘다는 듯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16549782642351.png“증조할머님!!!”

키안의 목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1654978267243.png“어서 오련. 우리 증손자!”

사랑하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 재회하는 화목하고 단란한 그런 풍경. 그것은 내가 고대하던 바로 그런 풍경이었다. 슬쩍 시카르를 쳐다보니 그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이런 풍경은 그도 처음일 테니까.

16549782672435.png“크음. 그럼 우리도 발길을 서둘러 볼까.”

시카르는 키안처럼 뛰지는 않지만, 저벅저벅 할머니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어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의 혈색과 표정이 훨씬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공작저에서 봤던 것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계시진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것처럼 여전히 품위 있으신 모습은 그대로였다. 너무 잘 지내고 계신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16549782642324.png“할머니.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너무나 다행이에요.”

할머니는 내게도 어서 안겨 오라는 듯 두 팔을 내 뻗으셨다. 나는 할머니의 품으로 가서 안겼다. 시카르도 키안도 우리 모두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한동안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곧, 기쁨의 재회도 잠시. 우리는 대신전의 현실 앞에서 일동 정지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하인들이 머물 곳은커녕 우리가 머물 곳도 없었다. 그래서 하인들은 모두 다시 되돌려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가져온 디저트들은 영구보존 마법을 쓴 것들이라 어디에 둬도 신선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지만, 보관할 곳이 없다고 해서 신전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음식 재료들은 모두 신전에 기증하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신관들이 머물고 있는 생활관에서 지내고 계신 중이었다. 다만, 할머니가 아무리 공작가의 대어른이라 해도 방들은 모두 1인 1실로 배정되기 때문에 할머니 또한 작은 방 하나를 쓰고 계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와 눈물 젖은 재회를 오래 하지도 못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16549782642324.png‘방이 없다니!’

1654978267243.png“이곳에 오는 모두 사람들은 그저 신의 아들, 딸일 뿐이다. 귀족이라고 해서 더 큰방을 내어주거나 하지는 않는단다. 그럴 방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은 작은방 하나를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써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전개인데.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대가 하나뿐이라니. 이것 역시도 생각 못 한 전개였다.

16549782642324.png‘우리가 호텔에 온 것도 아닌데 방이 없는 것이야 당연하긴 하겠지. 하지만 침대가 하나뿐인 방이라니!’

짐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시카르는 한 방을 같이 쓴다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듯 느긋해 보였다. 제 손으로 옷 한번 입은 적 없을 것 같이 생긴 시카르는 짐 가방에서 옷을 척척 꺼내 들어 옷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별 생각 없어서 좋겠네.

16549782642324.png“시카르. 너, 생각보다 옷 정리를 참 잘하는 구나.”

16549782672435.png“전장에 가면 이런 건 다 본인이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지.”

내가 혼자 짐 가방을 정리할 줄 몰라서 머뭇거리며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 텐데.

16549782642324.png“나도 자취를 오래해서 정리정돈 잘해.”

난 그저 시카르에게 조금 툴툴거린 것뿐이었는데 키안이 볼 때는 우리가 자랑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키안은 그 작은 짐가방에서 짐을 꺼내 들며 말했다.

16549782642351.png“저도 며칠 혼자 살아봐서 짐 정리 잘할 수 있어요.”

16549782642324.png‘그래.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하지만, 키안의 짐은 내 손으로 정리를 해줘야지. 난 엄마니까.

16549782642324.png“어, 아니야. 키안 네 건 내가 정리해줄게.”

16549782642351.png“아니에요. 어머니. 저 일곱 살인걸요. 짐 정리는 제 손으로 할 수 있어요!”

나는 키안의 손에 든 짐 가방을 잡으며 말했다.

16549782642324.png“아니야. 키안.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네 어머니로서 말이야.”

내 말이 듣기 좋았는지 키안은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내게 의지하고 싶을 텐데, 어른스러운 척하느라 참는 게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키안의 짐을 막 챙기려는데 그때, 할머님이 들어오셨다.

1654978267243.png“이 작은 방을 셋이 쓰기에는 매우 불편하겠지?”

절망하던 그 순간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할머니의 그 말씀에, 나는 당장 저 시카르만 이 방에서 치워 줘도 감지덕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손녀 며느리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 없었기에 일단은 겸양했다.

16549782642324.png“아니에요, 할머님. 괜찮아요.”

1654978267243.png“괜찮긴 뭘.”

역시 우리 할머니뿐이구나.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걸 다 간파하셨어.

1654978267243.png“그래서 말인데, 키안은 내가 데리고 잘 테니 이 방은 너희 둘이 쓰도록 해라.”

16549782642324.png“네? 할머님?”

1654978267243.png“부부가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당연하지, 왜 그렇게 놀라?”

16549782642324.png‘혹 떼려다 혹 붙인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16549782642324.png“아, 아니. 할머님이 불편하실까 봐서요…….”

1654978267243.png“난 괜찮으니, 키안을 내가 데리고 잔다고 해서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방도 작으니 둘이 쓰는 편이 지내기 훨씬 더 편할게다.”

아, 제, 제 말은 키안을 맡기게 돼서 불편하다는 게 아니라. 차라리 키안이 있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것이었는데……. 할머니 입장에서는 부부가 한 방을 같이 쓰는 게 매우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껏 한 방을 같이 써본 적 없는 우리 두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놀라긴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태어나 여자와 단둘이 같은 방을 써본 적이 없으니 아마, 깜짝 놀랐을 거다.

1654978267243.png“그럼, 키안. 이제 할머니 방으로 같이 갈까?”

키안은 냉큼 할머니를 따라가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듯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16549782642351.png“저…… 어머니와 공작님을 둘만 둬도 될까요……?”

1654978267243.png“그럼, 당연히 되고 말고 부부는 싸워도 같은 방에서 자야 한다는 말이 있단다. 그러니 걱정 말고 우리 증손주는 할머니와 같이 가자꾸나.”

키안은 분명 어딘가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짐 가방을 들었다.

16549782642351.png“네. 할머니.”

1654978267243.png“이곳에서 생활하려면 알아둬야 할 게 많으니 짐 풀고 나면 내려오거라.”

16549782642324.png“네. 할머님.”

할머니가 나가고 나자 긴 한숨이 나왔다. 시카르와 단둘이, 그것도 이 작은 방에서 생활해야 한다니.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소리냐고. 단둘이 방을 쓴다고 해도 공작저에 있는 내 침실 방 크기면 그래도 숨 쉬고 지낼 만하겠지만, 이 방은 그에 비하면 꽤 작았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살던 내 방 크기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으니까. 아무리 내가 침대에서 자고 시카르가 바닥에서 따로 떨어져 잔다고 해도 둘의 숨소리가 모두 다 들릴 수 있는 그런 크기였다.

16549782672435.png“알다시피 여자와 한방을 쓰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지.”

한숨 쉬기도 바쁜데 시카르가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나오던 한숨도 멈춰 버렸다.

16549782642324.png“그냥 방을 같이 쓰는 것뿐인데 잘하는 건 또 뭐야?”

16549782672435.png“그러니까 방을 같이 쓰는 건 처음이지만, 같이 잘 쓸 수 있도록 신경 써보겠다는 말이지.”

한 방을 같이 쓰며 잘하고 말고 할 게 있나? 뭐가 있지? 곰곰이 생각 좀 해보려는데 대뜸 시카르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향해 얼굴을 밀고 들어왔다.

16549782672435.png“가령, 네가 자고 있는 침대에 올라가서 잔다든지?”

16549782642324.png“미, 미쳤어? 다, 당연히 그건 안 되지!”

16549782672435.png“아니면, 네가 옷을 갈아입기 불편하게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든지.”

16549782642324.png“내, 내가 옷 갈아입을 땐 나가 있어!”

16549782672435.png“그리고 또,”

16549782642324.png“그리고 또, 뭐?”

16549782672435.png“실수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씻고 나온다든지?”

뭐야.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거야!

16549782642324.png“그, 그렇게 하기만 해봐”

16549782672435.png“한다면……?”

16549782642324.png“가, 가만 안 있지!”

시카르는 내게 한 뼘 더 다가오며 물었다.

16549782672435.png“어떻게……?”

한 뼘 더 다가온 그의 시선이 닿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16549782672435.png“그러니까, 어떻게 가만 안 있을 건데?”

16549782642324.png“네가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한다면 비, 비명을 지를 거야.”

16549782672435.png“뭐라고?”

16549782642324.png“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시카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휘어진 눈매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16549782672435.png“뭐라고 비명을 지를 거냐고.”

16549782642324.png“네가……. 그러니까, 네가…….”

내가 말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16549782672435.png“우리 둘이 쓰는 방에서 네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걸 내가 봤다고 비명을 지를 거란 건가? 아니면, 네가 자고 있는 침대에 내가 올라갔다고 비명을 지를 건가? 사람들이 우리가 부부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 인간이 무섭게 또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야 이. 미친놈아! 라고 했다간 정말 그가 미친 짓을 할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정말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부부이고, 부부가 같은 방을 쓰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 비명을 지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잠깐. 시카르의 말을 되짚어 보면, 그러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거지?

16549782642324.png“그러니까, 시카르. 네 말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거지?”

16549782672435.png“그럴까 했지.”

16549782642324.png“응……?”

왜 그래. 왜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야.

16549782672435.png“그럴까 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16549782642324.png“무, 무슨 소리야.”

16549782672435.png“이왕 한 방에 있게 된 거, 침대는 같이 쓰는 게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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