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쩌면 착각일까 (3)2021.12.13.
시카르가 할머니 앞에서 나를 매우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럼 어떡한다. 이 방을 보고 난 후에는 신전 구경을 시켜주려 했는데, 본관에는 사람이 많아서 유라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신전 구경은 못 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실례가 되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려는 차에 시카르가 나를 대변하듯 말했다.
“유라가 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할머니. 저는 유라와 함께 여기 남아 있겠으니 키안과 함께 다녀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잘 아는 덕분에 가끔은 곤란한 대답을 대신해주니 듬직했다.
‘가려운 곳을 삭삭 긁어주는 것 같다랄까.’
“그래. 그게 좋겠구나. 유라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럼 난 키안과 신전 구경을 다녀올 테니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련.”
오붓한……. 할머니의 오붓하다는 말씀에 방금 전 엉큼한 소리를 해대던 시카르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할머님과 같이 신전 구경도 못 하고 키안만 맡기게 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내 증손주와 함께 마실 나가는 것인데 맡기다니. 그런 말 말아라.”
할머니……. 시카르가 어린 시절부터 외롭게 자란 탓에 할머니가 아이들을 보면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잘해준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 일을 내가 겪어보니 그렇게 감동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나가려 하시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감사하고 죄송해요…….”
할머니는 내가 붙잡아준 손을 같이 마주 잡으시고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셨다.
“감사하단 말은 받겠지만 죄송하단 말은 받지 않으마. 불편한 게 있는 건 배려를 받아야 하는 일이지, 죄송한 일이 아니니까.”
“할머님…….”
내가 비록 미친놈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렇게 좋은 시할머니가 계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할머니는 내 손등을 몇 번 더 두들겨 주시고 난 후에 키안에게 손을 내미셨다.
“키안. 할미와 함께 나가서 신전 구경이나 하자꾸나.”
“네. 할머니.
나는 키안이 나가기 전에 볼 뽀뽀를 해주며 말했다.
“키안. 할머니와 함께 재미있는 구경 많이 하고 와.”
“네. 어머니.”
나도 키안의 손을 잡고 같이 구경을 가고 싶었지만, 가서 토하거나 기절하는 걸 보여주는 것보단 나을 테니, 아쉬워도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시카르를 노려보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키안의 볼을 만져주며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럼 나중에 예배당에서 보자.”
“네. 할머님. 나중에 뵐게요.”
할머니와 키안이 나간 후 나는 방 안에 있는 원단들을 좀 살펴보았다. 원단들은 모두 갈색, 남색 등의 칙칙한 색상으로 평범한 면 종류였지만, 완성된 옷들은 알프스 소녀들이 입을 것 같은 그런 원피스였기에 탐이 날 만큼 예뻤다. 남자들 옷도 모두 평범한 면 셔츠에 면조끼, 면바지였다.
“살면서 바느질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나도 바느질이라곤 가정시간에 해본 게 다라서 많이 서투르지만, 우리가 만든 걸 누군가 입는다고 생각하면 꽤 보람 있을 것 같아.”
“그럼 열심히 하도록.”
시카르는 내 손에 바늘을 쥐여주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같이 안 해?”
“피곤하군.”
“같이 해야지. 하나라도 더 많이 만들 거 아니야.”
“낮잠이 부족하면, 오늘 너무 피곤해서 네 침대를 같이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는데.”
“…….”
오늘 밤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서 나는 더는 시카르에게 권유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바느질을 하려고 보니 눈앞이 캄캄한데. 하지만 봉사활동은 실력이 아니라 마음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실을 삐뚤삐뚤하게 꿰매지만 않는다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막상 할머니가 만든 옷들을 보며 바느질을 따라 하려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이곳 귀족 여인들에게 바느질과 꽃꽂이는 필수라는데 아무래도 난 귀족 여인으로서는 실격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장인은 아니지만, 장인의 손길로 한땀 한땀 정성스레 만들다 보면 바느질은 좀 엉성할지는 몰라도 예쁜 옷은 만들 수 있겠지. 내가 만든 옷을 누군가는 입어줄 생각에 나름 정성스레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어, 할머님.”
내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 하자 할머님은 내게 다시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괜찮으니. 다시 앉거라.”
그런데 키안은 어디 가고 보이지 않고 할머니 혼자셨다. 마침 물어보려 하는데 할머니께서 먼저 말씀해주셨다.
“아. 키안은 신관들과 함께 신전을 둘러 보고 있는 중이란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옷을 내게 건네주셨다.
“내가 미처 이것을 전해주지 않았더구나.”
“이게 뭐예요. 할머님.”
“여기서는 신도들도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하니까 이 옷으로 갈아입도록 하려무나.”
할머니가 입고 계신 옷이 평범한 것 같다 싶었는데, 이곳 신도들이 입는 옷이었던 모양이다.
“유라.”
“네. 할머님.”
“바느질을 못 하는구나.”
이렇게 쉽게 들키다니…….
“네. 할머님. 죄송해요. 바느질을 해본 적이 없다보니…….”
“저런. 그래서 한 말이 아니야. 바느질이 반드시 여자의 덕목은 아니니까. 나도 어릴 땐 바느질과 자수를 싫어했다. 바느질보단 말을 타고 활 쏘는 걸 더 즐겼지.”
역시 할머니께서는 시타르 족이시라 어릴 때부터 노는 물이 다르셨었구나.
“바느질이 어려우면 원단을 자르는 건 어떨까 해서 한 말이었다.”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님. 이미 잡은 건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 너 편한 대로 하는 게 좋겠지. 어느 것이든 네가 불편하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부족하지만 한번 예쁘게 만들어 볼게요.”
“그런데, 유라. 시카르를 저렇게 자게 둬도 되겠니?”
“네?”
“낮잠을 많이 자면 밤에 너를 재우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내일은 할 일이 많으니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거든.”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했기에 뒤늦게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할머니는 자상하고도 포근한 모습으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깨우는 게 좋겠지? 난 그럼 다시 나가마.”
“네. 나중에 뵐게요. 할머니.”
할머니가 나가신 후 신도들이 입는다는 옷을 살펴보았다. 옷은 신관들이 입는 제의와 비슷한 로브였다. 시카르가 입고 있는 저런 고급스러운 벨벳 실크 원단과는 다른 양모 원단의 옷으로 포근한 느낌이었다. 옷을 입어보니 제법 따뜻했다. 그런데, 시카르를 어떻게 깨운다. 나는 아주 근엄하게 잠들어 있는 시카르를 어떻게 깨울까 고민하던 차에, 손에 들고 있던 대바늘로 그의 팔을 슬쩍 찌르려다 봐주기로 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지만, 바늘로 찌르는 건 비인도적이니 봐주기로 했다. 시카르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렇게 해서 깨겠나. 이 정도로는 접근해야지.”
시카르의 품에 안긴 나는 힘차게 그의 가슴을 밀었다. 물론 밀리지 않아서 도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지만.
“깼으면 됐잖아. 이제 그만 놔줘.”
시카르는 나를 다시 원래대로 제자리에 앉혀두었다.
“할머니께서 이런 걸 원해서 은근슬쩍 빠져주시며 날 깨우라고 한 것 같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어릴 때도 이 비슷한 상황을 본 적이 있거든.”
“이런 상황?”
“바로 할머니께서 내 동생을 원하셨을 때지.”
“무, 무슨 소리야. 할머니께서는 네가 낮잠을 자면 되레 밤에 날 재우지 않을까 봐 널 깨우라고 하신 거야.”
나는 시카르의 가슴을 밀었다. 물론 내가 밀었다기보다 시카르가 밀려준 것이지만. 그동안에도 시카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는 고요한 침묵을 깨고 툴툴거렸다.
“네, 네가 아무리 그렇게 섹시하게 쳐다봐도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
“음…… 내가 섹시해 보이나?”
내가 방금 섹시하다고 한 건가.
“아, 아니? 그건 말이 헛나온 거야.”
시카르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곤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마치 나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진심을 솔직하게 전하는 건 나쁘지 않지. 이젠 내가 좋은 걸 넘어서서 섹시해 보인다는 네 진심을 잘 알았다.”
“아니. 진심이 아니고 말이 헛나온 거라니까?”
“그렇게 된 거라고 속아 주지.”
나야말로 그렇다고 쳐준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할머니가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엔 신도들이 입는 로브로 입으라고 하셨어…….”
시카르는 내가 넘겨준 옷을 들어서 살피곤 인상을 구겼다.
“신관들이나 입는 이런 치렁치렁한 로브를 입으라니.”
“왜,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네 눈에야 내가 뭘 입어도 잘 어울려 보이겠지.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 있으니까.”
“아. 예. 그럼 옷 갈아입어. 나 나가 있을 테니까.”
“가지 마.”
“불편해. 나가 있을래…….”
돌아서는 그 순간 시카르가 또 내 머리 위에 무언가를 던졌다. 색이 흰 것을 보니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 같았다.
“괜히 밖에 나가지 말고 옷 다 갈아입을 때까지 거기 있어. 나가봤자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더 불편할 테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네가 더 불편해요. 잠시 후, 시카르가 다시 셔츠를 걷어갔다. 그냥 한 말이었지만, 로브를 걸쳐 입은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확실히 뭘 입어도 옷발이 좋았다.
“그렇게 대놓고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면, 또 끌어당기고 싶어지는데.”
뭔 소리야! 나는 얼른 그를 제지하듯 두 손을 뻗었다.
“꿈도 꾸지 마.”
시카르는 피식 웃더니 다시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옷도 갈아입었으니, 그럼 난 다시 자면 되겠군.”
“안 돼. 너 이제 그만 자야 해.”
“어째서.”
“지금 자면 밤에 안 올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자라고.”
“내가 밤에 잠이 안 오는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지?”
“어, 그러니까…… 그게…….”
그러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말을 했을까. 할머니게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우리가 진짜 부부라 생각하셔서 일 뿐인데.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밤에 잠 안 자고 뒤척이면 내가 잠을 제대로 못 잘 것 같다는 말이었지.”
하지만 시카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내가 오늘 밤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군.”
좋은 기억? 시카르는 자기가 내게 키스해주면 내게 좋은 기억이 남는 줄 알고 있잖아?
“오, 오해 하지마.”
언제나처럼 시카르는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은 건너뛰고 나를 보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정말 잠 못 자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