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어쩌면 착각일까 (4)2021.12.16.
그저 농담으로 던지는 것만 같지 않은 말투에 긴장이 돼서 애꿎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걸로 자꾸 협박하지마.”
시카르는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넘겨 올리곤 다시 눈을 내리깔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협박이라…… 맞아. 네 말대로 처음엔 협박으로 시작했지.”
“그건 또, 무슨 뜻이야.”
“근데, 지금은 글쎄, 이게 협박인지 모르겠다고.”
시카르는 나를 벽까지 밀어붙였다.
“그냥 오늘 확 같이 자?”
내 눈을 빤히 내려다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이놈은 차라리 허리에 칼 차고 공작저 안에 있을 때가 그나마 더 멀쩡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칼 어쨌어?”
“마차에 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그거 다시 가져와서 허리에 차고 다니자.”
“어째서.”
그나마 그걸 차고 다녔을 때가 더 멀쩡했던 것 같으니까!
“여긴 신전이라 칼을 차고 다닐 수 없다. 물론 칼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신전에서 칼부림을 하는 미친 인간도 없을 테지만. 어쨌든 이 신성한 곳에서는 무기를 차고 다닐 수 없는 일이지.”
그럼 칼부림은 안 하지만 미친 인간을 신전에서는 어떻게 처리하지? 여기 그런 인간이 하나 있다고 신고 하고 싶은데. 워낙 제멋대로라 작정을 한다면 내 침대를 차지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나는 완전히 고양이 안에 갇힌 쥐 신세 마냥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침대 양보할게. 네가 침대에서 자.”
시카르는 그제야 잡은 쥐를 놓아주듯 한차례 뒤로 물러섰다.
“침대는 네가 써. 어디서 잘 지는 내가 판단하니까.”
“…….”
‘말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말 안 통해.’
그때 밖에서 무언가 시끄럽게 우당탕탕 뛰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신관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나는 당황했지만 시카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신관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숨을 헐떡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우리를 향해 쉿 하라는 듯 입 위로 검지를 올렸다.
“쉿! 잠시만요. 저 좀 숨겨주세요.”
‘신관이 왜 갑자기 뛰어들어와서 숨겨 달라고 하는 거지?’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잦아들자 그제야 신관은 안도한 듯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고는 우리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
그렇게 레페르식 인사를 끝낸 후에야 그녀는 우리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처음 보는 신도분들이시군요.”
“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 안녕하세요. 신관님. 저희는 며칠 머물다 갈 예정이니 잘 부탁드려요.”
긴 생머리를 반으로 묶은 차분한 모습과 달리, 그녀는 꽤 발랄해 보이는 성격이었다. 신관은 히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전 하급신관이라 잘 부탁해달라고 말씀하셔도 아무 힘이 없답니다. 여하튼, 숨겨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신관이 왜 신전 안에서 숨어다니는 거지? 내가 묻기도 전에 신관은 품에 숨겨든 무언가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몰래 빼돌린 빵이에요. 영구 마법을 써서 썩지 않는 빵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신기하죠? 이런 진귀한 빵을 언제 구경해보겠어요. 절 숨겨주셨으니 조금 나눠드릴게요.”
그것은 우리가 가져온 파운드 빵과 디저트 등이었다.
‘신관이 빵도 빼돌리나……? 신관은 엄청 신성한 그런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작은 머핀 빵을 꺼내 우리 앞에 두며 말했다.
“제가 아까 먹어보니 맛이 죽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 빼돌렸죠. 참, 점심때도 이 빵이 나온다고는 했는데 눈곱 만큼 나온대요. 그나마 저를 잘 숨겨주신 덕분에 얻어먹는 거니 운 좋은 줄 아세요.”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신관이 죽여준다는 표현을 쓸 줄이야. 대신관님도 그렇고, 이 신관님도 그렇고 내가 상상했던 신성하고 거룩한 그런 모습의 느낌은 아닌데? 그 누구보다 천진난만한 사람들로 보인다고나 할까. 신관은 빵 하나를 입안에 우걱우걱 넣으며 말했다.
“음…… 이 빵 정말 맛있네요. 이 빵을 누가 가져왔다고 하던데. 아! 맞다. 그 발록도 울고 간다는 잘생긴 악마공작이라죠?!”
여기서는 시카르를 악마공작이라고 하나보군.
‘그 악마공작이 여기 있는데요. 신관님…….’
나는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시카르를 슬쩍 보니 그는 별 표정이 없었지만 나는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아…… 네…….”
“참, 그리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 빵은 나 혼자 다 먹으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시면 누구 나눠 주시려고……?”
그녀는 헤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네. 누구 좀 나눠주려고요.”
“아. 그러시군요. 누구에게 나눠 주실 예정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신관은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 거렸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당연하죠. 안 그래도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거리던 참이었거든요.”
“아. 네…….”
정말 못 말릴 정도로 특이하고도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 나는 일부러 신관에게 더욱 말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저녁 예배 시간까지는 신관과 함께 있으면 시카르의 저 이상한 소리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저도 이번 성인식 때 참여 하거든요.”
“아, 그래요? 올해로 스무 살이 되시나 봐요?”
“아니요. 아니요. 전 올해로 스물둘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시카르와 나이가 같구나.
“그럼 성인식에 구경 가시나 봐요.”
“에이. 성인식 구경은 매년 마다 실컷 하는 걸요.”
“아……. 그럼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신관은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남자 꼬시러요.”
하지만, 나는 천진난만하게 들을 수 없었던지, 그녀가 건네준 빵을 먹다가 그대로 뱉어낼 뻔했다.
‘신관이 남자를 꼬시기 위해 성인식에 간다고 하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거…….’
시카르는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내 등을 툭툭 쳐주었다. 신관은 시카르를 보며 ‘오우’라고 낮게 탄식했다.
“제 동료는 제가 사레에 걸렸을 때 기침을 하려고 하면 입을 막아 버리는데, 정말 좋은 동료를 두셨군요.”
“동료가 아니고 남편입니다.”
사카르의 무뚝뚝한 대답을 들은 신관은 한 번 더 ‘와우’라고 탄식하며 나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상당히 어려 보이시는데 애인도 아니고 저렇게 잘생긴 남편이 있다니 부러운데요?”
내가 어려 보이기 보단, 동양인들이 좀 어려 보이는 편이긴 하지. 신관은 두 손을 바짝 모으고는 희망에 부푼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저도 이번에는 반드시 남자를 구할 생각이에요. 제가 아직 첫 키스도 못 해봤거든요.”
나는 또 입안에 있던 걸 뱉을 뻔했고 시카르는 무뚝뚝한 얼굴로 또 내 등을 툭툭 쳐주었다.
“제 나이 스물둘에 첫 키스도 못 해보다니. 이건 정말 재앙이 아닐 수가 없다고요!”
그 첫 키스도 못해 본 재앙을 받은 인간이 여기 둘이나 더 있답니다. 물론 꿈에서는 해봤지만.
“아무튼, 그래서 제 목표는! 첫 키스를 하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첫 키스를 위해 성인식에 또 참여하는 신관이라니. 신관들이 다 이런 건 아니겠지?
‘그래도 응원은 해줘야지. 어쨌든 첫 키스는 중요하니까.’
나는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응원해주었다.
“그럼요! 신관님의 첫 키스를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첫 키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가슴이 설레는 거 같아요. 올해는 제발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뜻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고 하잖아요. 꼭 뜻을 이루실 거예요.”
“와우! 정말 고마워요. 제 동료들은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는데, 역시 결혼을 하셔서 그런지 저를 이해해 주시는군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나는 마지못해 웃으며 그 말에 호응했다.
“네, 뭐…… 아무래도 그렇겠죠……?”
“참, 두 분은 결혼을 하셨으니 첫 키스는 물론이고 첫날밤도 보내셨겠죠? 정말 부러워요.”
이분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시카르의 비죽 솟아오른 한쪽 입꼬리가 괜히 신경 쓰였다. 이 신관 좀 누가 말려줬으면 좋겠는데……. 아, 아니야. 시카르가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것보다야 차라리 이 신관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게 훨씬 더 속 편하지.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신관님께서도 분명 좋은 분을 만나실 거예요.”
“방금 그 말, 정말 진심처럼 느껴졌어요.”
“물론 진심이니까요.”
“참,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제 이름은 로엔이라고 해요. 로엔 라무트. 반가워요.”
로엔. 로엔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확실히 기억력은 나보다 시카르가 훨씬 좋았다.
“혹시, 노래하는 치유사 로엔 라무트인가?”
노래하는 치유사 로엔이라?! 로엔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어, 제가 신성력을 쓸 때 노래를 부르는 게 맞긴 한데, 그새 제게 수식어가 붙은 거예요? 정말이요? 사람들이 저를 노래하는 치유사라고 부르나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를 예정이지. 어쨌든 이 사람이 정말 노래하는 치유사 로엔이라면……. 로엔은 후에 레이독스의 눈에 띄어 그의 사람이 되고 키안에게 신성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게 되는 인물이었다.
“두 분은 성인식 때 마을에 오실 건가요?”
“아, 글쎄요. 저희는 잘 모르겠어요.”
“괜찮으시다면 되도록 놀러 오세요. 성인식이라고는 하지만 마을의 큰 축제와도 같아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춤도 출 수 있어요!”
사람이 너무 많은 게 아니라면 꽤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저희가 춤을 못 춰서 실례나 안 끼치면 다행일 거 같아요.”
“마을 축제에서는 정해진 춤이 없어요. 그냥 내키는 대로 막 추면 되는걸요. 누구나 모두가 어울릴 수 있죠.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도 맛있는 것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날이니 이 신전에서 배식되는 시시한 식사보다는 훨씬 입맛에 맞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봐야겠는걸요.”
로엔은 자신이 먹다 흘린 빵부스러기를 주워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저녁 예배를 준비해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부스러기 제가 치울게요. 이리 주세요.”
신관은 사양하지 않고 곧장 테이블 위로 부스러기를 다시 뿌렸다.
“그럼 그렇게 해줄래요? 힛. 고마워요. 참, 전 제 소개를 했는데, 전, 아직 저를 숨겨주신 은인 분들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요?”
아까 시카르를 악마공작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신분을 밝혀버리면 로엔이 민망하겠지? 나는 시카르가 ‘내가 바로 그 악마공작 시카르 블레이크다’라고 할까 봐, 일단은 조용히 하란 의미로 시카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 저는 유라 블레이고, 제 남편은 시카 블레이입니다.”
“두 분 이름도 상당히 비슷하군요. 두 분의 성함을 꼭 기억할게요. 오늘 정말 고마워요. 유라님.”
“저도 빵 감사해요. 신관님.”
“그냥 로엔이라고 불러요. 전 신관이라는 호칭보다는 로엔이 더 편하거든요.”
“그래요. 로엔 님.”
로엔은 정말 아쉽다는 듯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 모처럼 제 얘기를 잘 들어주는 분을 만났는데, 이렇게 가야 하다니 너무 아쉽군요. 혹시 신전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말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눈썹이 빠지도록 도와드릴게요.”
말을 정말 재미있게 하시네. 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로엔 님.”
“그럼 우리 나중에 또 보자고요!”
로엔이 나가고 나자 웃고 있던 내 표정은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