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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어쩌면 착각일까 (5) (58/197)

58화. 어쩌면 착각일까 (5)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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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엔은 신셩력을 갖고 태어난 백작가의 영애였다. 그녀는 신관이 되지 않고 명망 높은 가문과 혼인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낭만과 풍류를 즐기는 성격 때문에 신관의 길을 택했다. 어느 날, 순례 중에 레이독스와 인연을 맺게 된 그녀는 길리언 레카도르는 성군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해 키안의 편에 서게 되었지만, 결국엔 사랑했던 남자 카이젤의 배신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첫사랑을 꿈꾸고 첫 키스를 동경하는 이 순수한 아가씨를 배신한 카이젤!

16549783811521.png“로엔이 카이젤을 어디서 만났더라?”

내가 머리를 감싸고 있는 동안, 시카르는 로엔이 나간 문을 보며 말했다.

16549783811525.png“이번 성인식 때다.”

16549783811521.png“응?”

16549783811525.png“로엔이 카이젤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이번 성인식 때라고.”

그게 이번 성인식 때라니!

16549783811521.png“시카르! 우리가 방해하자! 로엔이 카이젤을 만나지 못하게 말이야!”

시카르는 테이블 위 빵부스러기를 닦고는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16549783811525.png“헤르시아 때처럼 또 오지랖 부리는군.”

16549783811521.png“하지만 로엔이 키안을 가르치게 될 거고, 카이젤이 로엔을 배신하는 바람에 키안이 위험한 순간을 맞게 되잖아!”

16549783811525.png“정말 그것 때문에 그녀를 도우려는 건가? 내가 볼 땐 아닌데.”

16549783811521.png“그거야. 키안에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16549783811525.png“그게 오지랖이라는 것이다. 네가 아이를 구해주다 이곳에 온 것을 잊은 건가?”

16549783811521.png“그건, 지금 내게 아이를 구한 걸 후회하냐고 묻는 거야?”

16549783811525.png“괜히 관련도 없는 사람을 도우려다 네가 낭패를 본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른도 어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물며 아이들은 더욱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난 내가 가장 약자였던 어린 시절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었다. 그래서 약자에게 만큼은, 적어도 아이들에게 만큼은, 도움이 되는 어른이고 싶었다. 때문에 난, 아이를 구해주고 이곳에 온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16549783811521.png“난 후회 안 해.”

16549783811525.png“알고 있다. 네가 그때 아이를 못 구했다면, 되레 아이를 못 구한 걸 후회하고 있었겠지. 넌 그런 바보니까.”

16549783811521.png“그래. 나 바보야. 그러니까, 로엔도 구해야겠어. 로엔이 잘못돼서 키안이 많이 울었잖아. 우리 키안이 또 누군가를 잃는 것도 싫고, 저렇게 천진난만한 로엔이 남자 잘못 만나서 배신당하는 것도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기 싫어. 어차피 그냥, 카이젤과 만나지 않게만 하면 되는 거니 어려울 것도 없잖아.”

16549783811525.png“피곤하게 하는군.”

16549783811521.png“그럼 나 혼자라도 할 수 있게 간섭만 하지 말아줘.”

16549783811525.png“네가, 나 없이 혼자 다니는 걸 허락할 사람으로 보이나?”

물론 쉽게 허락 안 하겠지.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고.

16549783811521.png“네 말대로 내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뻔히 잘못될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도 방조죄라고 하는 거야!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 나 혼자라도 그녀가 나쁜 놈을 만나지 않게 할 테니까. 내 일에 방해만 하지 말아줘.”

16549783811525.png“사람 많은 곳엔 가지도 못하면서 뭘 어떻게 한다고, 넌 나 없인 어디도 못 가.”

16549783811521.png“그럼 그냥 지켜보라는 소리야? 방금 우리 머핀도 얻어먹었는데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 안 해?”

얼굴을 긁적이던 시카르의 눈매가 다시 매섭게 비죽 솟았다.

16549783811525.png“나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티를 안 낼 뿐이지. 나도 무서웠다고. 그런데, 내가 무서워하는 티를 내지 않아서 여태까지 나를 귀여워했다는 말인가? 시카르가 아직 다음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기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16549783811525.png“……정말 귀찮게 하는군.”

나는 그 순간, 그의 허리에 칼이 있었다면 또 칼을 꺼내 들고 나를 협박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젠 그 협박이 나한테 통하지도 않겠지만.

16549783811521.png“그럼 돕겠다는 얘기지?”

16549783811525.png“아내를 혼자 보낼 수 없는데 별수 있나?”

결국, 또 이렇게 내 말을 들어줄 거면서 버티기는.

16549783811521.png“근데 왜, 나를 혼자 못 보내……?”

16549783811525.png“아내를 그런데 혼자 보내는 미친놈은 없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지. 저녁 예배드리러 갈 시간이다. 신전에 있는 동안 예배 시간은 잘 지켜야 한다.”

시카르는 나가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생활관 복도에는 우리처럼 저녁 예배를 보러 가는 신관들과 신도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가 가는 곳은 작은 생활관 예배당이라고 하니 사람이 좀 적겠지? 멀미약도 안 먹고 왔는데.

16549783811525.png“너무 걱정 마라.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니까.”

시카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내 손을 꼭 잡고 가는 그의 손을 보자 오늘따라 유독,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우리의 결혼반지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시카르는 나와 결혼한 이후 단 한 번도 이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 그저 위장 결혼일 뿐인데도 내가 부탁한 것들은 다 들어 주기도 했었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항상 나를 먼저 챙겨주었던 것 같았다. 결혼식을 조촐하게 올려준 것도 그렇고, 레이독스를 만났을 때 밀크티를 주문해준 것도 그렇고. 내가 아는 시카르는 그렇게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기 가족에게만……. 맙소사. 시카르가 나를 정말 아내라고 생각하며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그래. 분명히 날 좋아하는 거야. 본인 성격상 날 귀여워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감정과 귀여워하는 감정을 헷갈려하고 있는 거라고. 이건, 내 착각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이제 그만 요구할 건 당당하게 요구하면 되는 거라고. 이런 경우에는 덜 좋아하는 사람이 위너니까.

16549783811521.png‘그럼 한번 시험을 해볼까.’

16549783811521.png“시카르.”

16549783811525.png“이곳은 공작저가 아닌 신전이다. 우리 둘만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부의 호칭을 써라.”

16549783811521.png“아, 알겠어. 미안. 공작님.”

16549783811525.png“성인식 축제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가 귀족인 걸 티 내지 말아야겠지. 그냥 여보라고 부르는 게 낫겠군. 여보라고 불러라.”

16549783811521.png“…….”

그런 걸 핑계 삼아 나한테 여보 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16549783811521.png“여……. ㅂ……ㅗ…….”

16549783811525.png“언제부터 그렇게 느려터지게 말했었지? 이 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위장 결혼했다고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건가?”

네가 무리한 걸 요구하니까 느려터진 소리를 하는 거지! 흠……. 나는 속으로 ‘여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더 연습하고 침을 몇 번 꼴깍꼴깍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16549783811521.png“여…… 보…….”

16549783811525.png“역시 느리군.”

16549783811521.png“여보!”

16549783811525.png“이번엔 너무 억세게 부르는군. 어색하지 않게 부드럽게는 힘든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16549783811521.png“그럼. 네가 먼저 시범을 보여봐.”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시카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16549783811525.png“여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그런 말 하지 않을 것 같은 시카르가 너무 순순하게 여보라고 말해서 되레 당황한 건 나였다. 내가 너무 당황해서 끌려가듯 따라가자 시카르는 멈춰서 나를 보며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16549783811525.png“왜 그래? 여보.”

이 미친놈이 또 왜 이래.

16549783811525.png“여보란 말은 이렇게 하는 거다. 위장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어설프지 않게.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연기해. 아니면 앞으로 나와 한 침대를 써야 할 테니까.”

16549783811521.png“그런 호칭이 한 침대를 쓰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16549783811525.png“한 침대를 쓰다 보면 여보 소리가 절로 나올 테니까.”

아…….

16549783811521.png“아, 알았어. 여……보.”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 예배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시카르와 몇 번이고 그놈의 ‘여보’ 소리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예배당은, 생활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신전 크기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백 명은 넘게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그나마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사람이 많다 보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들어가는 길에 이따금씩 정신이 아찔아찔 해오는 걸 느꼈다. 그러자 시카르는 내 머리 위에 또 무언가를 씌웠다. 내가 움찔거리자 `시카르는 내 어깨를 꽉 잡아당기며 말했다.

16549783811525.png“그냥 후드가 달린 짧은 숄이니 쓰고 있어라. 눈 감고 있으면 훨씬 괜찮을 테니까. 그래도 못 참겠으면 말해.”

이런 건 언제 챙겨 나온 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리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것이 상상 되었다. 마치 눈을 감고 있으면 귀신이 날 노려보고 있는 걸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점점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서 난 도저히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을 거라고 해서 수십 명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백 명 이상이 모이는 자리는 여전히 힘든 것 같았다. 구석 자리에 쥐죽은 듯 있으면 되겠지만,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서는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나는 결국 헛구역질을 몇 번 했다. 그러자 시카르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16549783811525.png“예배는 방안에서 하는 게 낫겠군. 꼴 보니 저녁도 그냥 방에서 먹어야겠다.”

계속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 힘도 다 빠져서 기운도 없는 데다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조금 더 지나자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며, 저벅저벅 걸어가는 시카르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슬쩍 후드를 벗어보니 시카르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며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16549783811521.png“살았다…….”

16549783811525.png“이래서 정말 성인식에 갈 수 있겠어?”

16549783811521.png“그래도 거긴 야외니까 훨씬 낫겠지.”

갑자기 시카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16549783811521.png“시카르. 왜 그래?”

16549783811525.png“낯익은 얼굴이 보이는군.”

시카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말 낯익은 얼굴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16549783811521.png“어, 저 사람은……?”

내가 그를 떠올리기도 전에, 그가 먼저 손을 높이 흔들며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16549783955007.png“와! 이게 누구십니까?! 공작님과 공작부인 아니십니까?!”

촐랑촐랑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그는, 제르미였다.

16549783955007.png“이야! 신전의 땅에서도 공작부인을 내려놓지 않고 계신 걸 보니 정말 그 사랑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공작님.”

16549783811525.png“까불지 마라. 제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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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렇지. 나 지금 시카르가 안아 들고 있는 상태지. 광장공포증이 물러가고 나자, 나도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제정신이 돌아온 덕분에 너무 창피했다. 내가 어서 내려달라고 속삭이자마자 시카르는 나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16549783811521.png“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 제르미 님, 여기서 뵙다니! 너무 반가워요!”

16549783955007.png“저도 반갑습니다. 공작부인.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16549783811521.png“저희 할머님이 여기서 기거 중이셔서 할머님을 뵙기 위해 왔어요.”

16549783955007.png“아. 그렇습니까? 여기서 지내는 분들은 신원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몰랐군요.”

16549783811521.png“그런데, 제르미 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이세요?”

제르미는 껄껄 웃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16549783955007.png“저는 일하러 왔죠. 여기 랜턴하고 가로등 마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불 키러 왔습니다. 신전이라 돈은 한 푼도 못 받게 생겼지만, 대신 신성수를 받기로 했죠.”

16549783811521.png“아, 네. 그럼 얼마나 머물다 가시는 거예요?”

16549783955007.png“한, 일주일은 더 머물다 갈 것 같습니다. 손봐야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요.”

어쩐지. 마법사가 신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더라니. 제르미도 며칠 더 묵어야 해서 이 옷으로 입은 거였구나.

16549783955007.png“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는 예배당을 가야 할 시간일 텐데 두 분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16549783811525.png“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 다시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다.”

16549783955007.png“어?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16549783811521.png“그냥 멀미가 조금 나서요.”

제르미는 갑자기 품에서 무언가를 뒤지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16549783955007.png“이거 드시면 조금 나을 거예요.”

제르미가 내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신성수였다.

16549783811521.png“어. 힘들게 구하신 거 아니에요?”

16549783955007.png“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좋죠. 대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중에 저한테도 한턱 쏘셔야 합니다?! 그럼 전, 예배에 늦기 전에 먼저 가보겠습니다. 참, 제 방은 태양관 2층이니 혹시 저 찾으실 일 있으면 그리로 오세요.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제르미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후 예배에 늦지 않기 위해 뛰어갔다. 시카르는 미동 없이 제르미가 지나간 자리를 한참동안이나 보고 서 있는 내게 물었다.

16549783811525.png“왜 그렇게 보고 서 있어?”

16549783811521.png“나 방금 아주 좋은 생각이 들었거든.”

16549783811525.png“무슨 생각?”

16549783811521.png“로엔의 짝을 찾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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