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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어쩌면 착각일까 (6) (59/197)

59화. 어쩌면 착각일까 (6)2021.12.23.

원작에서 제르미는 로엔을 보고 그녀의 낙관적이고 태평한 모습에 반하게 되지만,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혼자서 짝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로엔이 죽고 난 후, 그 분노를 발판으로 카이젤을 처단한다. 내가 왜 그 생각을 이제 했을까. 제르미가 있는데. 시카르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빵을 썰어서 내 접시 위로 놓아주며 말했다.

16549784202352.png“그러니까, 네 말은 성인식에 제르미를 끌고 가자고?”

시카르는 내가 저녁도 신관 식당에서 먹기 힘들 것이라 판단해서 직접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챙겨온 터였다. 로엔의 말대로 신관에서 배식하는 식사는 공작저에서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평범했다. 빵과 옥수수 수프와 말린 닭고기 몇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시카르에게 우리가 가져온 디저트는 두라고 했고, 그는 내 말대로 디저트를 전혀 가져오지 않았다.

16549784202357.png‘정말 은근히 말을 잘 듣는단 말이지.’

나는 시카르가 접시에 올려준 빵을 수프에 찍어 먹으며 말했다.

16549784202357.png“응. 로엔과 제르미를 연결시켜주면 모든 게 해결돼. 음…… 그런데 이 빵 되게 맛있다.”

16549784202352.png“배고프면 뭐든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지.”

아. 그래서 맛있는 건가? 아무튼, 꽤 맛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키안은 지금쯤 저녁을 먹고 있기나 한 걸까.

16549784202357.png“키안은 아직 할머니와 같이 예배드리고 있겠지? 키안도 저녁을 먹을 시간일 텐데. 배가 많이 고픈 건 아닌지 모르겠어. 공작저에서 먹던 밥에 익숙해서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건 아닐지도 걱정 되고…….”

16549784202352.png“안 그래도 오는 길에 할머니께 예배 시간에 빠진 이유를 말씀드리고 오는 길에 키안의 안부를 전해 들었다. 키안은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군.”

16549784202357.png“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왜? 서, 설마 키안의 신성력을 알아봤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16549784202352.png“대신관이나 상위 신관들이 아니고서야 일개 신관들이 그런 걸 알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냥, 키안이 귀여우니 인기가 많은 것 같더군.”

16549784202357.png“아…… 그렇구나. 하긴 여기서 아이를 볼 일이 별로 없을 테니. 보통 수습 신관이나, 어린 신관들은 대신전이 아닌, 수도원이나 다른 레페르 신전을 거치고 오니까. 어린아이들을 보고 신기했나 봐.”

16549784202352.png“그것도 그렇지만 키안에게서 풍기는 품위에 이끌리는 것이겠지.”

시카르는 마치 제 자식 자랑을 하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시카르가 키안에게도 조금은 마음을 연 것일까. 아니면, 아빠 행세를 하다 보니 은연중에 자신을 아빠라고 느끼고 있는 걸까. 그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확실한 한가지는 키안을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16549784202352.png“어쨌든 얘기 계속해보지. 그래서 네 계획은 뭐지?”

16549784202357.png“그러니까, 내 계획은.”

내 계획은 이것이었다. 카이젤이 로엔과 이뤄질 수 있었던 경위는 자세히 나와 있진 않았다. 분명한 것은 로엔이 카이젤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인식 때 카이젤을 납치해서 어딘가에 감금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내 말을 들은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49784202352.png“납치, 감금이라…… 그런 건 비카가 전문인데. 비카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아쉽군. 아무튼, 납치, 감금은 식은 죽 먹기니 어려울 게 없겠군.”

시카르가 악역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선역이었다면, 이 와중에 납치, 감금 등의 그런 비윤리적인 일은 하지 못한다고 했겠지. 나는 처음으로 시카르와 말이 잘 통한다고 느꼈다.

16549784202352.png“그리고 다음은?”

16549784202357.png“다음엔, 성인식에 가기 전에 제르미를 카이젤처럼 꾸며야지.”

카이젤은 기사 지망생으로 성인식이 끝나는 대로 수도로 와서 기사 시험을 본 후 한 번에 곧장 기사가 되었다.

16549784202357.png“유추해 보건대, 로엔이 카이젤의 그런 늠름한 남자다움에 반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까 제르미를 기사로 둔갑시키는 거지.”

16549784202352.png“제르미 그 허약한 놈을 기사로 둔갑시킨다고 둔갑이 될지 모르겠군.”

16549784202357.png“물론 기사들이 보기에는 허약하겠지만 아직, 기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로엔이 보기에는 그렇게 허약하지만은 않을걸.”

16549784202352.png“그럼 제복부터 구해야겠군.”

그러고 보니 옷이 문제구나.

16549784202357.png“옷을 어디서 구하지?”

16549784202352.png“어디서 구하긴. 만들어야지. 낮에는 할머니를 따라 봉사활동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저녁에 만들면 되겠지. 오늘은 재료를 못 구했으니 내일은 재료를 구해보도록 하지.”

시카르는 확실히 두뇌 회전이 빠르구나. 그 두뇌 회전에 내가 가끔 희생되는 게 유감이지만.

16549784202357.png“제르미와 잘 돼야 할 텐데. 그럼 제르미도 좋고 로엔도 좋고 종국에는 키안도 좋고. 그럼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16549784202352.png“운명을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만, 왠지 나는 네가 해낼 것 같군.”

시카르는 냉기가 흐를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무엇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내가 잘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난, 내가 시카르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16549784202357.png“시카르. 너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시카르는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내가 예전에 자주 지었던 표정과 꽤 비슷했다. 그러니까, 대략 ‘뭔 소리지?’라고 묻는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16549784202352.png“또, 자기 희망 사항을 말하는군. 네가 내 할머니와 헤르시아의 운명을 바꾼 것처럼, 로엔의 운명도 잘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카르는 나를 보며 비웃듯 미소 지었지만, 내 보기에는 그것도 모두 나를 너무 좋아해서 짓는 미소처럼 보였다.

16549784202357.png‘이 자식. 내가 좋으면 그냥 좋아 죽겠다고 말할 것이지.’

아무리 봐도 나한테 약점이 될까 봐 숨기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모른 척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저녁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할머니의 방에 들렀다. 키안은 나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며 꼭 안겨들었다.

16549784202357.png“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키안. 아까 공작님께 얘기 들어보니까 신관님들께 아주 인기가 많았다던데 정말이야?”

키안은 수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16549784259296.png“네. 저같이 작은 아이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고…… 매우 좋아하셨어요.”

이제 보니 키안도 신도들이 입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어린 키안이 이런 로브를 입고 있으니 너무 귀여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러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겠지. 할머님도 키안이 기특하고 예쁜지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165497842593.png“키안이 얼마나 말을 잘하던지 신관들이 그래서 더 신기해하더구나. 어디서 배웠는지 고대어도 쓸 줄 알고 말이야. 거기다 역사 지리에도 해박해서 신관들이 키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구나.”

모두 레이독스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겠지. 역시 레이독스에게 보내길 잘했어. 뿌듯해!

165497842593.png“참, 시카르에게 들었다. 아까 쓰러질 뻔했다지? 지금은 좀 괜찮은 게야?”

16549784202357.png“아. 네. 괜찮아요. 할머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님은 내 손을 꼭 잡고는 한 손으로는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165497842593.png“신전 안에서도 나아지지 않는다니 참 몹쓸 병이구나. 하지만 난 그게 불치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반드시 언젠가 좋아질 게다.”

할머니의 품과 할머니의 말씀은 항상 따듯하고 달콤하기만 해서 그 품에 안겨 있다 보면 정말 모든 것이 다 치유될 것처럼 포근하기만 했다. 나는 이대로 쭉 할머니와 키안과 함께 자고 싶었지만, 곧 올 것은 오고야 말았다. 한마디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시카르와 단둘이 같은 방에서 밤을 함께 보내야 할 시간 말이다. 굿나잇 인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씻고 난 후 젖은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아 놓은 채 곧장 침대로 가서 누웠다.

16549784202357.png‘시카르가 씻고 있는 동안 이대로 곧장 잠들면 되는 거야!’

하지만, 분명 너무나도 길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 정신은 더욱 또렷했다.

16549784202357.png‘안 되는데. 시카르가 씻고 나오기 전에 기절하듯 자야 하는데, 그래야 눈뜨고 나면 내일이 될 텐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우 졸린 상태였지만 잠에 들려고 눈만 감았다 하면, 잠에 빠져들지 않고 되레 더 정신이 말똥말똥해질 뿐이었다. 혹시 아까 제르미가 준 신성수라도 좀 마시면 잠에 들까 싶어서 신성수를 가져오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서려는데, 그 순간 시카르가 씻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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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르는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상의는 완전히 탈의한 모습이었다. 아직은 물기가 채 마르지 않는 시카르의 우락부락한 가슴 근육에서 윤기가 흐르는 듯 살갗이 반짝이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시카르의 가슴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탄탄했고 단단한 근육이 윤곽을 뽐내고 있었다. 나 지금 이 와중에도 시카르의 근육을 감상하고 있었구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16549784202357.png“너, 너 왜 옷도 안 입고 나와!”

경악하는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16549784202352.png“더워서.”

16549784202357.png“그, 그래도 내가 있는데 옷은 입고 나왔어야지.”

16549784202352.png“그럼 네가 눈을 감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서 왜 눈은 바득바득 뜨고 있는 거지?”

그거야 내가 잠시 네 가슴을 감상하느라……. 아니야. 내가 눈을 감으면 시카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안 감은 것뿐이라고. 나는 눈을 감는 대신 등을 돌렸다.

16549784202357.png“내일부터는 그럼 미리 말해줘. 등이라도 미리 돌리고 있게.”

대답은 들리지 않고 등 뒤에서 부스럭부스럭 옷 갈아입는 소리만 들려왔다.

16549784202357.png‘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좀 해라.’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16549784202357.png“시카르. 내 말 듣고 있어?”

그래도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대체 뭘 하길래 대답이 없나 싶어서 돌아보려는데 시카르가 내 머리 위에 돌돌 말아 두었던 수건을 걷어냈다. 뭐 하는 거냐고 따지려는데, 새 수건을 가져와서는 내 머리 위에 올리곤 머리를 털어주기 시작했다.

16549784202352.png“머리는 감고 난 후에 바로 말려줘야 감기에 안 걸리는 것이다. 하녀들이 없다고 해서 머리도 안 말리고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고. 가뜩이나 비리비리한데 이곳까지 와서 감기에 걸려서 골골거리고 있다가 집에 갈 참인가? 로엔의 운명을 바꾸겠다면서?”

16549784202357.png“여기 뭐, 대신전인데 감기에 걸려도 금방 낫겠지. 아니면, 신관님들께서 낫게 해주시겠지.”

내 말이 틀리지 않아서인지 시카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고 말문이 막히는 것을 보자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잔소리는 일리가 있었다만 장소가 대신전이란 말이다. 시카르. 그래도 머리를 말려주니 기분도 나른해지고 조금 전 말똥말똥하던 것과 다르게 슬슬 졸음도 밀려왔다.

16549784202352.png“어쨌든 수건이 젖은 채로 베개를 베고 자면 세균만 득실득실거리게 될 테니 머리는 잘 말려라. 아니다. 네 팔 힘이 부실해서 혼자 말리기 힘들 테니, 내일부터는 씻고 나오면 여기 앉아 있어. 내가 말려 줄 테니까.”

천하의 시카르가 사람 머리를 다 말려준다니. 역시 의심할 것 없이 날 많이 좋아하는군. 그럼 좀 도도하게 말해볼까. 이것은 그동안 너에게 숱하게 당했던 내 소심한 복수라고 해두지.

16549784202357.png“좋아. 내일부터는 그럼, 네가 내 머리를 말리게 해줄게.”

나 좀 도도했나? 하지만, 시카르의 반응은 역시나 순순하지는 않았다.

16549784202352.png“말투가 거만해졌군. 친절을 베푸는데 권리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서늘하기 짝이 없는 섬뜩한 말투에 등골이 오싹거렸다. 무서운 놈. 사랑 앞에서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것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억울하게도 아직은 내게 그럴 배짱까지는 없었다. 왜냐면 이 인간이 자기가 날 좋아한다는 걸 실토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곧장 태도를 바꾸었다.

16549784202357.png“그럼, 부탁할게.”

시카르는 대답이 없었지만, 내 생각엔 그가 피식거리며 웃었지 않았을까 한다. 그 와중에 시카르는 내 머리카락을 바짝 말려놓았다. 애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처럼 머리카락이 바짝 건조된 상태였다.

16549784202357.png‘이젠 정말 잠이 잘 오겠는데.’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조금 젖은 베개를 다시 뒤집어 배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시카르가 베개도 자신의 것과 바꾸어 주며 말했다.

16549784202352.png“난 젖은 베개를 베도 감기에 걸리지 않으니까.”

그냥 내가 걱정돼서라고 말하면 될 것을 변명은. 근데, 그렇게 말하는 시카르가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그가 바꾸어준 포근한 베개에 머리를 베었다. 그러자 시카르가 내 손을 잡았다.

16549784202352.png“침대를 침범하지는 않겠다. 다만, 손은 잡고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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