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1)2021.12.27.
“그런 건 손을 잡기 전에 말하는 거지. 그런데 갑자기 손은 또 왜 잡는 거야.”
“또 옷장에 들어가면 내가 곁에 있어야 하니까.”
“그런 거라면 괜찮아. 그동안 악몽도 안 꿨고 혼자서도 잘 잤으니까.”
“그거야 그랬겠지. 공작저에서는 비카가 악몽의 정령을 모두 먹어 치워줬으니까. 요즘 귀찮아하고 있긴 하지만 제법 잘 치우고 있는 것 같더군.”
“그럼 악몽의 정령만 없으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거야?”
“비카처럼 누군가가 처리해준다면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여긴 처리할 사람이 없으니, 내 손 놓지 마.”
어차피 이렇게 꽉 잡고 있어서 놓으려 해도 못 놓겠다. 여기서 나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비카 덕분에 그동안 악몽에서 해방된 것이라면, 그럼 어차피 공작저를 벗어나게 되면, 나랑 같이 자려고 했다는 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나 때문에 일부러 방을 하나만 달라고 한 건 아니지?”
시카르는 잠시 움찔하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난 잔다.”
“뭐, 뭐야. 내 말에 대답은 안 하고 그냥 자?”
설마설마 했는데……. 방을 하나 더 준비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같이 자려고 방 하나만 내달라고 한 거였어? 설마, 키안도 일부러 할머니께 부탁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건 너무 멀리 가는 거지. 너무 비약하진 말자고.
“근데, 넌 정령의 정신을 지배하잖아. 그렇다면 악몽의 정령을 조종해서 처리할 수는 없는 거야?”
잔다던 시카르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난 정령의 정신을 지배해서 조종하는 것이지 비카처럼 흡수하지는 못하니까. 물론, 네 근처를 얼씬거리는 게 보이면 어딘가로 이동을 시킬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 옆에 있는 사람이 나뿐이니 이동할 곳이 없는 것이지.”
“잔다며?”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에는 대답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그럼, 나 때문에 방을 일부러 하나만 잡았냐고 묻는 질문은 들을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는 거야?”
“난 잔다.”
자기가 대답하기 싫은 건 잔다는 말로 교묘히 회피하네.
“그럼, 악몽의 정령이 네 꿈은 침범하지 못하는 거야?”
“정령의 정신을 지배하는 내게 침범한다는 건 모순이겠지. 그래서 난 한 번도 악몽이란 걸 꿔 본 적이 없다.”
하루아침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부모의 남은 기억에서 제 부모가 폐왕의 배신으로 비참하고도 처절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던 시카르였다. 그때 시카르는 지금의 키안보다도 더 어렸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데다 악몽까지 꿨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성격 파탄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내일부터는 그 망할 축제 옷을 만들어야 하니 어서 자도록 해라. 내 손만 놓지 말고.”
안 그래도 낮잠도 한숨 못 잔 데다 졸음이 밀려오던 참이었다. 졸음이 밀려와서 그런지 생각으로 하려던 말이 밖으로 막 튀어나왔다.
“내가 그렇게 좋니…… 자면서도 손을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음. 이런 말은 시카르가 하는 말인데. 왜 내 입에서 나오는 걸까. 이런 건 닮아가면 안 되는데……. 잠들기 전 시카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잠이 오니까 헛소리를 하는군.”
내가 악몽을 꾼 것일까. 꿈속에 시카르가 보였다. 그 작은 옷장에 저 큰 몸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꼭 끌어안고 또 내게 입을 맞추는 그런 꿈을…….
*** 잠에서 깨어나서야, 나는 시카르가 또 내 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비카 덕분에 너무 옷장 꿈을 안 꿔서 그런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꾸는 꿈이었는데도 이곳까지 와서 또 그 꿈을 꾼 것을 보면 내 기억 어딘가에 옷장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번 꿈에서도 시카르는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해줄게.’라며 입을 맞추었다. 자기가 입을 맞춰주면 내 꿈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은 대체…… 내가 자길 좋아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거겠지. 내가 이런 생각으로 씻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시카르는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날 위해 직접 아침 식사와 식후 마실 밀크티까지 가져온 상태였다.
“할머니께서 예배 끝나고 나면 어제 그 공방에서 보자고 하시는군. 넌 예배에 참석할 수 없으니까 내가 예배 보고 올 때까지 방에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먼저 공방에 가 있어라. 데려다줄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챙겨주니 편하긴 하네.
“고마워.”
그저 고맙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시카르는 짐짓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시카르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고맙단 말에 감……동 한 거야? 그, 냉혈한 시카르가?’
시카르는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넌 정말 틈만 나면 내게 고마워하는군.”
틈만 나면 고마워하지 않았는데. 아니, 그렇다 치고. 내가 사랑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고맙다고 했을 뿐인데 귀가 빨개질 건 뭐야. 이런 걸 그냥 지나치면 안 되지.
“너 지금 귀가 빨개진 거 같은데.”
“봄이 와서 그런지 좀 덥군.”
더우면 귀가 빨개지는 건 어디 상식인 거지.
“너, 혹시 내가 고맙다고 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 아냐?”
이를테면, 좋아해. 같은 말로……?
“시카르? 너 정말 더워서 귀가 빨개진 거 맞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도 시카르가 곧장 내 입에 빵을 집어넣는 바람에 나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건 키안이 비카를 입막음 할 때 쓰는 주 스킬인데. 내 입막음을 하는 것을 보니, 고맙다는 말을 ‘좋아해’ 정도로 착각해서 듣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아니면 이젠 내가 고맙다고 하는 말에도 막 설레는 건가?
“웁! 이렇게…… 빵을 한 번에 입에 넣으면 목 메인다고……!”
그러자 시카르는 말없이 등을 두들겨 주며 우유를 건넸다. 그가 건네준 우유를 마신 나는 무심결에 다시 말했다.
“고마워.”
그러자 또 시카르의 귀가 빨개졌다. 이거 참 적응 안 되는 모습인데.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이렇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그만해라.”
“너무 고마워서 그러지. 고마워. 고마워…….”
시카르의 귓불이 빨개진 게 신기해서 조금 놀렸을 뿐인데, 시카르는 곧장 내가 벽으로 등을 붙여야 할 만큼 바짝 다가왔다.
“그렇게 고마우면 나와 한 침대라도 쓰던가.”
내 얄팍한 놀림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식사를 끝낸 후 밀크티를 홀짝이고 있는 동안 시카르는 식기등을 식당에 두고 다시 돌아와 말했다.
“공방에 데려다줄 테니 이제 일어나지.”
“나 데려다주려고 다시 온 거야?”
“뻔히 보고도 묻는 저의가 뭐지?”
“식기를 두고 다시 돌아와서 굳이 나를 데려다주고 싶을 만큼. 네가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서.”
시카르는 조금 입을 쩍 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내게 한 걸 그대로 돌려줬을 뿐인데 본인이 당하고 보니 어이가 없나 보지? 시카르는 이내 얕은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널 데려다줘야 남들이 볼 때 다정해 보이니까 그러는 거다. 로맨틱하다고 소문난 내 명성에 흠집 내고 싶진 않거든.”
이젠 로맨한 게 명성이 됐다고 생각하는군. 그거 다 핑계인 거 알고 있다, 이놈아.
“근데, 여기 우리가 블레이크가 사람이라는 거 아무도 몰라.”
“무슨 소리. 어제 만난 신관들이 알고 있다.”
“꽤 많이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들 몇 안 돼.”
“몇 명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몇 안 되니까 부딪힐 확률이 매우, 아주, 극소하게 작다고 말하는 거야.”
“원래 모든 위험은 매우, 아주, 극소한 확률을 무시할 때 생기는 법이지.”
억울하지만 말싸움은 내가 한 수 아래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카르는 저 핑계로 끝까지 나를 공방에 데려다주었다.
“하인이 없어서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예배가 끝나는 대로 다시 올 테니까.”
시카르는 나가려고 문을 열다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혹시라도 그동안 출출하거나 필요한 게 생기거든, 지나가는 신관에게 이것을 주고 뭐든 시켜라. 세상에 보석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시키면 들어주겠지.”
“보석?”
“시간이 촉박해서 가봐야겠다. 약속하지 금방 오겠다고.”
시카르의 모습은 누가보면 전장이라도 나가는 줄 알만큼 쓸데없이 비장했다. 예배하러 다녀오는 길인데도 마치 먼 길 떠나는 사람인 듯 굴건 없는데.
‘이곳엔 하인도 없고 광장공포증 때문에 식당에 가지도 못하는 내가 걱정돼서 저러는 거겠지.’
시카르가 준 주머니를 보니, 보석들이 제법 많았다. 나야 보석을 잘 알지 못해서 이 보석들이 무엇인지 잘 구분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걱정이 되긴 됐던 모양이었다.
‘잠시 혼자 두는 것도 신경 쓰이나 보군.’
이런 행동들은 시카르가 할머니를 혼자 두고 공작저를 비울 때나 하던 것들이었다. 시카르는 오랫동안 공작저를 비우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할머니를 걱정했다. 그래서 항상 집을 비우기 전엔 공작저에 사병들을 배치하고 안드레아에게 모든 것을 전권했다. 시카르가 지금 내게 하는 행동들이 할머니를 혼자 두기 전 걱정하던 모습들과 매우 흡사했다. 그 생각을 하니 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잘해주니 또 놀라서 뛰는 거겠지. 내가 협박당한 게 얼만데 이런 거로 흔들리면 안 되지. 이건 스톡홀롬 증후군 같은 거야. 물론 잘 챙겨주는 건 나쁘진 않지만.
‘그럼 슬슬 재단이나 하고 있어 볼까.’
혼자 공방에 있게 된 나는 원단을 꺼내 들어 옷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정말 현명하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난, 바느질 보단 가위질이 더 적성에 맞았다. 꿰매는 건 못 해도 자르는 건 잘한다는 것을. 어린이집에서 이것저것 만드느라 가위질을 많이 한 덕분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가위질을 하고 있으니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았고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지만, 고단하기도 했던데다 조용한 방에 혼자 있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잠들지 않으려고 조금 버텼지만,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었다. 잠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또 내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카르. 또 내 꿈을 엿보려고 내 손을 잡고 있는 거지?’
지난밤에 그렇게 잡고 있었으면 됐지. 아주 틈만 나면 내 손을 붙잡고 있다니까. 나는 시카르에게 한마디 해주기 위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너 내가 아무리 좋아도 틈만 나면 내 손을…… 하, 할머님. 언제 오셨어요……? 아하하…… 제가 잠꼬대를 너무 심하게 했죠…… 아하하…… 죄송해요. 할머님…….”
그렇다. 막상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시카르가 아닌 할머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