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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2) (61/197)

61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2)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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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잘 때마다 시카르가 내 손을 만지고 있다 보니. 당연히 시카르인 줄만 알았지. 할머니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무 민망해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머니는 짐짓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셨다가 이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시며 잡고 있던 내 손을 더욱 꼭 잡으셨다.

16549784642179.png“다행이구나. 유라.”

16549784642182.png“네. 죄송해요. 할머님……”

16549784642182.png‘잠깐. 지금 다행이라고 하신 건가?’

16549784642182.png“네……?”

자상하고 다정한 할머니셨기에 좋게 넘어가 주실 줄은 알았다. 그런데 ‘괜찮다’도 아니고, ‘다행이다’라니.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16549784642179.png“시카르가 널 사랑해서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네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이 쓰였었다. 그런데 네가 잠에서 깨어나며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렇진 않은 것 같구나. 둘이 있을 때는 좋아하는 티를 많이 내는 모양이지?”

16549784642182.png‘아, 할머니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시카르가 내게 하던 말을 돌려주려고 그런 거였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나는 민망하다는 듯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16549784642182.png“제가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서 할머니께 민망한 소리를 해버린 것 같아요.”

16549784642179.png“그런 건 민망한 일이 아니지. 아니고말고.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면 난 되레 고맙구나. 네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난, 우리 시카르가 그렇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애라는 걸 몰랐을 게다.”

시카르는 할머니를 매우 사랑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타고난 성격이 무뚝뚝하기도 했던 데다, 시카르의 부모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후에는 할머니마저 충격으로 몸져누웠던 까닭에 유년기를 더욱 외롭게 보낸 탓에 더욱 무뚝뚝한 성격으로 변했으니까.

16549784642182.png“네. 공작님께서는 생각보다도 훨씬 제게 잘해주세요.”

16549784642179.png“그래. 그건 그런 것 같더구나.”

그런데, 시카르와 키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할머니만 앞에 계셨다.

16549784642182.png“어. 그런데, 할머님. 공작님과 키안은 아직 예배 중인 건가요……?”

16549784642179.png“두 사람은 산책을 좀 시켰단다. 식사 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산책만큼 부자가 정답게 보내는 시간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할머니께서도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게 하기 위해 많이 애써주시는구나……. 정말, 이래저래 할머니께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549784642182.png“애써 주셔서 고마워요. 할머님.”

16549784642179.png“내 손주와 내 증손주 일에 네가 고마워할 필요는 없단다. 참, 아침에 말이다. 식당에서 시카르를 봤는데, 너 줄 거라고 밀크티라는 것을 챙겨 가더구나. 내 손주가 맞나 싶을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지. 네게 다정한 남편이 되어주지는 못하는 게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게지?”

시카르를 놀리려 했던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할머니가 완전히 오해하신 것 같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나는 시카르가 다정한 남자인 듯 말했다.

16549784642182.png“네. 공작님께서 주로 다정한 편이시긴 하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지. 요즘 로맨틱한 남자 흉내 내느라 다정해지긴 했으니까.

16549784642179.png“강아지의 머리조차도 제대로 쓰다듬지 못하던 녀석이었지…… 동물에게조차도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른단다.”

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이니 그랬을 것이다. 강아지를 처음 만졌을 때 시카르의 표정이 어땠을지 안 봐도 상상이 될 것 같았다. 그건 마치 내가 ‘넌 사슴이야. 내 마음을 녹용.’과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를 할 때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한다.

16549784642179.png“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성격이 저래서 그런지 시카르를 좋아했던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단다.”

참, 저도 이제 와서야 속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다 이유가 있었답니다. 할머님. 시카르는 레카도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출중한 외모였다고 서술되어있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도 숨이 막힐 만큼 그는 잘생긴 외모였다. 거기다 몸도 좋고 키까지 크니, 외모로만 보면 여자들이 넋이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시카르는 자신의 잘생긴 외모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강한 힘뿐이었으니까. 소설에는 시카르의 여자 문제가 세세히 나오지 않아서 몰랐지만, 헤르시아의 말에 의하면 여자들이 잘생겼다고 칭찬을 해줘도 ‘내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좋아할 줄 알았나?’라고 응대해 버리거나, 허리에 장검을 차고 다니며 여자라도 거슬리게 하면 인상을 쓰며 ‘죽고 싶나’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여자가 그런 미친놈을 좋아하겠냐고. 그러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다들 시카르를 피하기만 했었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자신의 손자는 까다롭고 냉소적인 성격이긴 해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만큼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으셨겠지. 당연히 대공작가의 큰어른이신 할머니에게 시카르의 소문을 들려줄 정신나간 인간은 없는 데다,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을 때 다른 귀족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할머니는 그 길로 사교계에 발을 끊었기 때문에 시카르의 소문은 전혀 듣지 못하신 듯했다. 그래서 시카르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까닭이 까칠하고 무뚝뚝한 성격 때문인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 동안 품었을 것만 같은 한탄이 담긴 긴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16549784642179.png“시카르가 사람들에게 냉소적이다 보니 그동안 내심 아무도 우리 손주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어쩌나, 저대로 결혼도 못 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건 아닌가 걱정이었지. 그런데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단다.”

할머니께서 우리의 결혼을 그렇게 흔쾌히 허락해주신 이유를 이제야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시카르는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라 여자들이 질색하는 정도였으니 걱정이 많이 되신 모양이었다.

16549784642182.png‘그래. 내가 시카르를 구제해주긴 했지. 주인공에 의해 죽을 운명을 바꿔줬으니까.’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최대한 좋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16549784642182.png“아니에요. 공작님은 좋으신 분이라. 제가 아니었더라도 더 좋은 분을 만나셨을 거예요.”

그 좋으신 분이란 것의 기준이 모호하긴 했지만, 적어도 나를 많이 배려해주긴 했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16549784642179.png“유라 넌 착해서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시카르는 영영 혼자였을 것 같구나. 그래서 난,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효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먼 곳까지 나를 보겠다고 와주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여길 오자고 한 사람이 유라 너였다지?”

16549784642182.png“할머님이 보고 싶어서요. 헐머니가 안 계시니까 공작저가 텅텅 빈 것 같아요.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곳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할머니였던데다 은연중에 의지를 많이 했었기에 할머니가 그리웠다. 가족 그림을 그렸을 때에도 할머니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으니까.

16549784642179.png“간혹 시카르가 오만해 보일 때가 있지?”

간혹이 아니라 늘 오만하지. 나는 또 적당히 미소를 지었다.

16549784642182.png“공작님께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을 때가 있긴 하죠…… 할머님.”

16549784642179.png“시카르가 너무 이른 나이에 공작이 되다 보니, 어린 공작을 이용해 먹으려는 무리가 많았지.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이 공작저를 지켜내기 위해 사나운 맹수가 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옳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 같더구나.”

그러고 보니 시카르가 내게 공작부인이 지녀야 할 품위를 가르칠 때도 차라리 악녀가 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자신을 노리는 승냥이 떼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발톱을 드러내며 살수 밖에 없었던 그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어렸을 땐 늘 주눅이 든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그렇다 보니 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고, 그래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자랐다.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거리를 두었을 뿐인데, 사람을 너무 경계했던 탓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광장공포증이라는 것까지 생겨버렸다. 그런 걸 보면 시카르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듯도 했다. 그가 공격형이라면, 나는 자기 방어형 정도겠지. 시카르가 내게 차라리 악녀가 되라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16549784642179.png“남들이 볼 때는 무서운 공작이니 뭐니해도, 내 손자놈은 그저 내게 있어 친구 하나 없이 자란 가엾고 불쌍한 녀석일 뿐이었지. 그래서 유라 네게 더더욱 고맙단다. 시카르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평생 얻지 못할 것 같은 평안을 줘서 말이다. 오늘 보니 시카르는 단란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펑온해 보이더구나. 그동안은 늘 외롭고 어딘가 공허해 보였었는데 말이야. 이런 말들을 너와 함께 지내며 차차 해주고 싶었는데, 내게 몹쓸 병이 찾아오는 바람에 이제야 하게 되는구나.”

16549784642182.png“할머니……. 한 번에 너무 많은 얘기를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그 병은 반드시 나을 거예요. 할머니의 병이 다 낫고 나면, 공작저에서 우리 못다 한 얘기를 나누도록 해요. 꼭이요.”

16549784642179.png“그래. 유라 네 말대로 내 병이 모두 다 낫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 둘째 증손주가 태어나는 것도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이 나이까지 살다 보니, 바로 내일도 모르는 게 인생이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유라 네게 부탁이 있다. 이 늙은 할미의 부탁을 들어주겠니?

16549784642182.png“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드릴게요. 할머님.”

16549784642179.png“시카르는 알고 보면 은근히 말을 잘 듣는 아이란다. 특히 제 가족에게는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 혹여라도 시카르가 잘못하거든 유라 네가 바로 잡아 주지 않겠니. 다른 사람 말은 몰라도 네 말은 무조건 들을 게다.”

16549784642182.png“네. 할머님. 공작님이 실수를 하셔도 이해하고 배려하며 가정을 잘 돌보도록 할게요. 할머님 걱정 시키는 일 없게 잘할게요.”

16549784642179.png“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일방적으로 시카르를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게다. 당연히 잘못하면 혼을 내야겠지. 내 말은 시카르가 잘못하면, 언제든 유라 네가 혼을 내주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더러 시카르의 버릇을 고쳐놓으라는 그런 뜻인 걸까.

16549784642182.png“할머님.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공작님의 성격을 고쳐보라는 말씀이신가요……?”

할머니는 바로 그거라는 듯 자상한 미소를 지으셨다.

16549784642179.png“그래. 시카르는 야생에서 자란 맹수처럼 보여도, 잘 길들이면 순한 애완견이 될 수도 있는 아이지. 유라 네가 잘 길들여 보려무나. 넌 할 수 있을 게다.”

분명히 잘못 들은 게 아님에도 잘못 들은 것만 같았다. 야생에서 자란 맹수를 길들이는 사육사들에게는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과연 상처받지 않고 시카르를 잘 길들일 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고민하는 내게 할머니는 커다란 팁 하나를 제공해주셨다.

16549784642179.png“어려워할 것 없단다. 시카르는 사랑이 고픈 아이와도 같거든. 네가 사랑해 줄수록 시카르는 네게 더 큰 사랑을 줄 것이란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시카르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경위가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해서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툭하면 협박을 하긴 했어도 그 뒤로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걸 떠올려 보면 말이다. 처음엔, 나를 애완 인간쯤으로 생각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보았던 까닭에 내게 큰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할머니가 힘을 실어준 까닭일까. 저 미친놈의 버릇을 고쳐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이 들었다.

16549784642182.png‘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맹수에게 고삐를 채워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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