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3)2022.01.03.
힐리스의 부탁으로 시카르와 키안은 예배를 마친 후 대신전 정원을 걷고 있었다. 사이 좋은 듯 손을 잡고 걷던 두 사람은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손을 놓았다.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서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색하군.”
딴에는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말투는 딱딱하기만 했다.
“마찬가지예요.”
하여튼 쥐방울만 한 게 말 한마디라도 꼭 이겨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말을 우회적으로 한다거나 완곡하게 하지 못하는 건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다.
“넌 내가 왜 싫지?”
키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시카르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공작님도 절 싫어하시는데.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죠.”
“그건 네가…….”
내 약점을 쥐고 날 죽이려고 하니까 귀엽게만 봐줄 수는 없는 것이지. 시카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데다 자신를 죽이려 하는 정적이니 처음부터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키안이라도 먼저 자신을 좋아해 줬더라면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를 테지만, 저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아이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성격상 꽤나 애를 쓰는 중이었다.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니 너도 노력했으면 한다. 우리에겐 유라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어머니께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절 거둬 주셨으니까요…… 어머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드리니 걱정하지 마세요.”
원작에서도 자신을 거두어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레이독스를 존경하고 사랑했었지. 거둔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사랑을 자신에게도 줬더라면 그 역시도 키안을 조금은 더 예뻐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아내는 내가 지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를 지켜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어머니에게 겁이나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겁을 준다라……. 시카르는 유라를 다시금 떠올렸다. 잔뜩 겁먹은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바득바득 애쓰던 모습을…….
“네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네 어머니는 내게 별로 겁을 먹지 않는다.”
“그럼 어머니를 울리지 마세요.”
“난 아직 울린 적 없다. 그리고 네 어머니는 생각보다 그렇게 눈물이 헤픈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말이에요. 어머니를 울리면 다음엔 공작님이 또 동상에 걸려도 안 풀어 드릴 거예요.”
이 쥐방울만 한 것이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 건가. 시카르는 키안의 당돌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이 협박이라는 건 알고 있나?”
“네. 물론이죠. 전 지금 작정하고 공작님을 협박하는 중이니까요. 어머니께 더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시카르는 뒷골이 당기는 듯 머리가 지끈지끈 거리는 느낌에 제 이마를 짚었다.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군.”
“아니요. 완전한 협박이에요. 어머니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저도 공작님이 동상에 걸려도 무시하겠다는 명백한 협박이요!”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난 이미 꽤 잘해주고 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그럼 뭐해요. 제가 보는 앞에서는 형식적으로 잘해주는 것처럼 보일 뿐인데.”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느 글귀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자식의 잔소리까지 감내해야 하는 신세인 건가?’
“그런데, 왜 다들 나에게만 잘하라고 하는 거지? 넌 내게 잘할 생각이 없는 건가?”
키안은 마치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온 듯 가던 길을 멈추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전, 공작님이 하시는 걸 봐서요.”
그 모습은 꽤 오만하고, 그래서 건방져 보였지만 그만큼 당돌했다. 시카르는 키안이 기죽지 않고 그런 당돌한 모습을 보이는 게 되레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릴 뻔했다가 지금 키안이 건방지게 구는 상대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냉소를 지었다.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유라는 너와 내가 잘 지내길 바라고 있다. 나만 일방적으로 네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너 또한 내게 마음을 열어주길 바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네 어머니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너도 내게 잘해야 할 것이다.”
키안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어머니가 저에게 공작님에 대해 좋은 얘기들을 들려주며 좋게 지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알려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깨우치지 못한 자신이 왠지 불효자 같아서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카르는 그런 키안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자신이 이겼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키안을 따라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내 말이 틀린 바가 없겠지. 그러니 묵묵부답일 테고.”
그랬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 말이 틀린 바가 없었다. 자신은 어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였다. 키안은 한숨을 내쉬며 항복 선언을 하듯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휴. 제가 그것까진 생각 못 했어요. 아직은 저도 앤가 봐요.”
득의양양한 얼굴로 키안을 보던 시카르는 ‘아직은 저도 앤가 봐요.’라고 말하는 키안의 말에 ‘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 키안이 귀여워서가 아니라. 무서우리만큼 어린 시절의 저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넌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더니 그런 얘기들을 왜 이제야 하는 거지?”
“공작님께서 워낙 공사다망하셔서 저와 얘기할 시간이 없었잖아요.”
“네가 할 얘기가 있거든 언제든 내 서재 문을 두드렸으면 됐을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네 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지.”
키안은 몇 번이고 시카르의 서재 문을 두드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굳게 닫혀 있는 그 육중한 문을 볼 때마다 시카르 주변에 가득했던 냉기가 보였다. 그래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키안이 보기엔 결코, 열리지 않을 것 문이었으니까.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머니께 잘해주세요.”
“그럼 너도 내게 잘해라. 유라가 좋아할 수 있게.”
“전 어머니께 잘하지 않으면 공작님의 동상을 치유해주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유라가 싫어할 테고, 결과적으로는 네 어머니에게도 안 좋은 일이 될 거라고 말했을 텐데.”
키안은 고민스러웠다.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시카르에게서는 아직 냉기가 가득했다. 키안이 원하든 원하지 않는 저는 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냉기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살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제 어머니를 위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시카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키안은 갈피를 잡아야 했다.
“좋아요. 그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공작님께 잘해드릴게요.”
“나도 유라가 보는 앞에서는 네게 잘해주지. 대신 네가 갑자기 변해버리면 유라가 의심을 할테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거든. 그저 나와 잘 지내고 싶어졌다고 해라.”
“좋아요. 전 비밀 지킬 테니 공작님도 비밀 지키세요.”
“날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 취급하지 마라. 그건 그렇고, 이제 그럼 우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가?
“네. 하지만, 어머니를 울리는 순간 모두 없던 일로 할 거예요.”
“네가 또 모르는 게 있는데 유라를 가장 많이 울린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내가 어머니를 울렸다고?’
지금까지 꽤 어른인 척하던 키안은 유라가 울었다는 말에 다시 일곱 살 소년이 되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 저 때문에 어머니가 울었다고요?! 왜, 왜요?!”
속상하고 마음 아파서 종종 울었지. 하지만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원래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해 눈물을 쏟기 마련인 것이지.”
마치 잘 걸렸다는 듯 키안은 두 눈을 부릅뜨고 시카르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공작님은 저 때문에 울지 않으시잖아요.”
“그거야.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니까! 남자가 아무데서나 눈물을 쭉쭉 뽑아서 되겠나?! 너도 명심해라. 눈물은 쉽게 흘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돼요……?”
“예전에 수련의 방에서 루이드가 울 때 넌 울지 않았다지?”
“네. 공작님.”
“그땐, 왜 울지 않은 거지?”
“그건, 온기도, 냉기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사물 같은 느낌이라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가짜를 알아보고 울지 않은 것이군. 어쨌든 그것도 너의 능력이니 넌 루이드 보다 강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잔 강해야 한다. 울면 나약해지는 것이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킬 수가 있다. 그러니 명심해라. 네 어머니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강하게 자라도록 해라. 작은 일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알겠나?”
키안은 처음으로 시카르에게서 냉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그 말을 하는 공작의 가슴이 뜨겁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 열망은 진심이었다. 순간적으로 키안은 시카르가 제 어머니를 지켜줄 수 있는 강인한 남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직 강인한 남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굳은 의지가 선연히 드러났으니까. 처음으로 시카르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 남자를 동경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게요. 반드시 가족을 내 손으로 지킬 수 있는 강인한 남자가 될게요.”
시카르는 피식하고 웃으며 키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산책이 끝났으니 네 어머니에게 돌아가 볼까?”
신전을 거니는 동안 사람들과 마주치면 둘 사이가 어색해 보이지 않아야 했기에 손을 잡고 돌아다니다 사람이 없으면, 다시 손을 뿌리치고, 사람이 보이면 다시 손을 잡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할 수 없이 손을 잡았던 것이었지만 이번엔 그 손을 잡기가 완전히 껄끄럽지만은 않았다. 키안은 그래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그 손을 꼭 붙잡았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키안의 손을 잡은 것은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결코 서로가 완전한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둘은 부자지간으로 보일 만큼 꼭, 닮아 있었다.
***
‘이 남자들이 왜 이러나.’
신전에 오더니 갑자기 신의 축복을 받아 없던 정이라도 뿅- 하고 생겨난 걸까? 나는 앞에 있는 두 남자를 보며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부탁한 제복 원단과 재료 일체를 가지러 가셨기에 자리를 비우신 상태였다. 그사이 나타난 시카르와 키안은 내가 아는 그 앙숙 부자가 아니었다. 내가 잘못 보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남자가 지금 손을 잡고 있었다. 그거도 사이좋게 허허허 웃으며 말이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있기도 하는구나. 아니지. 아무리 오래 살고 봐도 없을 것 같은 일이 생긴 거지. 나는 조용히 키안을 불러 물었다.
“키안. 너 혹시 협박당했어?”
“네? 협박이라뇨? 제가 누구에게 협박을 당해요. 어머니?”
그렇게 말하는 키안의 표정은 너무나도 해맑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아, 아니야. 키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일이 없었으면 됐어.”
오히려 너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니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마치 무언가 짜인 각본대로 움직인 느낌이랄까.
‘이미 시카르한테 입막음이라도 당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