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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5) (64/197)

64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5)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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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르는 당장 이 손을 잡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평소처럼 다시 내 손을 잡으면 될 것을 왜 굳이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건지 의문이 들던 찰나,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을 때마다 그가 움찔거렸던 게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손을 잡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나는 시카르가 원하는 대로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어차피 이 손은 잡게 돼 있었기 때문에. 내가 손을 잡아 주자, 시카르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온순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항상 치켜뜨고 있던 눈꼬리가 그나마 가장 순하고 부드러워 보였다는 말이다.

16549785335984.png“내 기억 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잘 찾아봐.”

시카르는 눈으로 무언가를 더듬듯이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이마를 살짝 긁적거리며 말했다.

16549785335988.png“아이를 잡아서 공중에 날리다니, 이상한 것일 줄 알았다…… 좀 더 정상적인 걸 요구할 수는 없나?”

나야말로 시카르의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16549785335984.png“네가 아이들과 놀아줘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아주 정상적인 거야. 레이독스 님도 아이들과 그렇게 놀아주실걸.”

16549785335988.png“레이독스가 애들과 그렇게 놀아줄 거라고?”

시카르는 너무나 의심스러워서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16549785335984.png“물론이지. 좋은 아빠들은 그렇게 몸으로 놀아주니까. 레이독스 님이 얼마나 좋은 아빠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시카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85335988.png“좋아. 네 말대로 하지. 하지만, 내가 그 벌칙을 받을 일은 없을 거다. 앞으로 그 금칙어를 또 말하진 않을 테니까.”

시카르는 꽤 시니컬하게 굴긴 했지만, 결국엔 내 금칙어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하라는 건 다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 혹시, 이것도 하려나?

16549785335984.png“시카르. 재단도 다 끝냈는데 바느질 좀 하고 있으면 안 돼?”

예상한 대로 시카르는 말 같지 않은 소리는 그만 하라는 듯 냉소 짙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16549785335988.png“공작이 바느질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16549785335984.png“그리고 나도 웃을 거야. 물론 난 기분 좋게 웃을 거야. 난 남자가 바느질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멋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니까.”

16549785335988.png“남자가 바느질하는 게 멋지다고……?”

16549785335984.png“응. 바느질은 매우 섬세한 작업이잖아. 여자가 하는 바느질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하면 멋있어 보일 거 같아.”

시카르는 아주 많이 고민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본인은 딴에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곁눈질로 반짇고리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시카르는 자연스럽게 바늘을 손에 든 후 실을 꿰며 말했다.

16549785335988.png“내가 과연 바느질도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군.”

궁금해서 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웃기게도 시카르는 정말로 바느질을 꽤 잘하기 시작했다. 마치 재봉틀을 사용한 것처럼 꼼꼼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캐릭터를 설정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까닭인지 못하는 게 없다 싶을 만큼 능수능란하게 말이다.

16549785335984.png“처음 하는 바느질일 텐데 신기하게도 잘하네.”

16549785335988.png“난 뭐든 처음 해도 중간 이상은 하는 편이다. 그때 너와 했던 키스도 처음치곤 꽤 잘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16549785335984.png“그, 그건 꿈이었잖아!”

16549785335988.png“어쨌든 꿈에서 한 키스도 키스라면 키스일 수 있으니까.”

16549785335984.png“꿈에서 밥 먹었다고 배부른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건 무효인 거야.”

16549785335988.png“네 말도 맞군.”

완전히 맞는 말이고 말고. 반항이 좀 있었긴 해도 결국 내 말을 따르고 있는 시카르를 보니, 이번에야말로 나를 좋아한다는 실토를 받아 내야겠다 싶었다. 나는 일격을 가하듯 바느질에 매진해 있는 시카르를 향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16549785335984.png“넌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자 시카르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그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듯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곤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정곡을 찔렀더니 무시로 일관하는군. 그냥 나를 좋아한다고 실토를 하면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걸어줄 수도 있는데. 나는 물러섬 없이 다시 들으라는 듯 조금 더 크게 말했다.

16549785335984.png“내가 바느질하는 남자가 멋지다고 하자마자 네가 바느질을 했잖아. 이게 무슨 뜻이겠어?”

하지만, 이번엔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묵묵하게 바느질만 할 뿐이었다. 이런 반응은 또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다못해 대꾸라도 할 줄 알았더니 그냥 무시로 일관하다니. 역시 보통 놈은 아니라 그런지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실토를 하면 작정하고 저 냉소적인 성격 좀 고쳐놓으려 했더니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지가 않다. 그래도 이렇게 나오니 나도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면 다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어제 내가 고마워 라고 한 말에 귓불을 붉혔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시카르가 결코 잘못 들을 수 없게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16549785335984.png“바느질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두 번은 ‘고마워’란 말이 설레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이번엔 시카르의 귀가 벌게지지 않았다. 이로써 어제 분명히 잘못 알아들은 게 확인된 셈이었다. 대체 어제 뭐라고 알아들은 거지? 뭐라고 들었길래 귓불이 붉어진 거냐고. 시카르는 그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고, 그래서 되레 얼굴이 빨개진 건 내 쪽이었다. 그리고 내가 괜히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키안의 낮잠만 깨워 버렸다. 키안은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번쩍 뜨며 깨어났다.

16549785399034.png“어머니. 제가 낮잠을 오래 잤나 봐요.”

16549785335984.png“아, 아니야. 내가 시끄럽게 해서 깬 거야. 미안해. 키안.”

16549785399034.png“아니에요. 어머니. 마침 꿈에서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참이었어요.”

16549785335984.png“우리 키안은 말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할까.”

키안은 생긋 웃으며 자연스레 내 곁으로 오려다 시카르를 슬쩍 쳐다보더니 텔레파시라도 나누듯 침묵했다. 그러곤 믿기지 않게도 시카르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믿기지 못할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동안은 키안이 잠에서 깨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던 시카르는 무려 키안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16549785335988.png“잘 잤나, 키안.”

16549785399034.png“네. 공작님. 어머니와 같이 바느질하고 계셨던 거예요?”

16549785335988.png“그래.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16549785399034.png“저도 도와드릴게요.”

16549785335988.png“아니다. 바늘과 가위 따위는 아이들이 만지기 위험한 물건이니 너는 가져온 동화책이나 읽고 있는 게 좋겠다.”

16549785399034.png“네. 공작님. 전 그럼 얌전히 동화책을 읽고 있을게요”

두 사람이 잘 지내기를 바라던 내 마음이 지금 환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가? 항상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공기와 분위기만으로도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어른 사자와 새끼 사자 같은 부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나로서는 이 상황이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혹시 이곳이 신전이라서 정말 신께서 두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뿅 생기도록 한 건가? 이 신전이라는 곳은 사랑을 넘치게 하는 장소인 것일까? 갑자기 너무 사이좋은 두 사람 때문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시카르의 다음 말은 나를 더욱 얼빠지게 만들었다.

16549785335988.png“참, 오늘 제르미의 제복을 만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부인.”

시카르가 키안에게 협박을 받은 걸까. 갑자기 말투가 왜 저래. 이젠 키안 앞에서도 나를 존중하기로 마음을 먹어서 이렇게 말하기로 한 건가. 나는 당황하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6549785335984.png“그, 그랬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16549785335988.png“그렇다면 지금 제르미의 옷 치수를 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다녀올 테니 부인께서는 여기서 기다려 주시죠.”

시카르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16549785335988.png“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도 따라서 벌떡 일어섰다.

16549785335984.png“자, 잠깐만.”

시카르를 혼자 보내면 제르미한테 말실수를 할 것이 눈에 훤했다. 칼도 없으면서 성인식 축제에 참석 안 하면 ‘네놈을 베어 버리겠다.’라며 제르미를 협박하겠지.

16549785335984.png“제가 다녀올게요. 공작님께서는 키안과 조금 더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게 좋겠어요.”

그 순간 시카르가 갑자기 키안을 번쩍 안아 드는 바람에 놀랐지만 키안도 움찔하며 놀란 표정이었다.

16549785335988.png“부인께서 제르미의 치수를 직접 재겠단 말입니까? 허튼소리 말고 함께 가시죠.”

존칭만 하면 뭐하나. 말투는 여전히 성난 사자 같기만 한데.

16549785335984.png“우리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할머님께서 들어오셨다가 놀라실 거예요.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죠.”

시카르와 내 눈치를 살피던 키안은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16549785399034.png“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어머니. 공작님과 함께 다녀오세요.”

16549785335984.png“그건 안 돼. 키안.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된 너를 혼자 둘 수는 없어.”

16549785399034.png“전 괜찮아요. 이미 혼자 지내본 적이 있는걸요.”

16549785335984.png“그때 넌 혼자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거야. 하지만 지금 너는 부모가 있는 아이잖아. 마땅히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만 해. 그러니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건 안 될 말이야. 우린 절대 널 혼자 둘 수 없어.”

16549785335988.png“그럼 할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부인.”

16549785335984.png“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공작님.”

그래서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카르는 키안을 조심히 의자 위로 내려놓은 뒤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사선으로 반쯤 내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고 나를 보는 것도 그렇고, 나를 지그시 노려보는 그의 얼굴엔 어딘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16549785335988.png“어떻게 지엄한 공작부인이 마법사 놈의 옷 치수를 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시카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야말로 당황스러웠다.

16549785335984.png“허리나 가슴 같은 건 직접 재 달라고 하고, 본인이 재기 힘든 길이 같은 것만 재려고 한 것일 뿐인데. 공작님께서야 말로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거죠?”

16549785335988.png“길이를 재는 것도 서로 신체가 가까워지는 것을 모르나. 이곳에서 공작부인이 외간 남자의 옷 치수를 재는 등 신체를 가까이 하는 건 예가 아닙니다. 부인.”

내가 비록 이곳에 온 지 몇 달밖에 안 된 것을 떠나서도 그건 정말 웃긴 예법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어느 집 누구입니다.’ 정도의 간단한 통성명만 주고받은 뒤 몸을 붙잡고 춤을 추면서, 옷 길이를 재는 정도의 접근도 할 수는 없다는 건가? 키안이 곁에 없었다면 마땅히 따져 물었을 테지만 키안에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릴 수는 없었기에 그냥 사과하기로 했다.

16549785335984.png“미처 그 생각까진 못한 것 같습니다. 공작님, 다음부터는 주의하죠.”

16549785335988.png“그냥 다음부터는 혼자서 어디 갈 생각을 하지 말…….”

시카르는 말을 하다말고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키안이 시카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카르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16549785335988.png“저와 함께 다니시죠. 부인.”

그러자, 그제야 키안은 잡고 있던 시카르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16549785335984.png‘분명히 둘이 뭔가가 있는데…… 대체 그게 뭘까.’

나는 사과는 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기에 시카르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그도 내게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할머니가 오실 때까지 나는 키안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시카르는 묵묵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방으로 들어오신 할머니께서는 바늘을 손에 쥐고 있는 시카르를 보며 몇 번이고 두 분을 끔뻑끔뻑 대셨다. 시카르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셨으니 놀라우시겠지. 할머니의 저런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셨다.

16549785483168.png“너 지금 바느질 하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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