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6)2022.01.13.
시카르는 머쓱한 듯 들고 있던 바늘과 실을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바느질이 반드시 여자의 덕목은 아니라고 하셔서 바느질을 한번 해보던 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이내 시카르를 가만히 흘겨보셨다.
“이제보니 그때, 자는 줄 알았더니 잠든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할머니가 곧장 짐작하실 줄은 생각 못 했는지 시카르는 움찔거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저 유라와 함께 밖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누구를 좀 만나야 해서요.”
할머니는 시카르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드시는 듯 인상을 찌푸리셨다.
“유라라니!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왜 그 모양이야. 똑바로 부르지 못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어허. 핑계는!”
할머니의 호통에 시카르는 조금 움찔 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 저렇게 호통치시는 모습을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만큼 지엄안 위압감이 느껴졌다.
“넌 이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남편이자 아버지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앞으로는 더욱 주의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할머니.”
“그럼 다녀와라. 아마 너희가 올 때쯤이면 난 키안과 함께 예배당에 가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고.”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님.”
*** 우리는 밖으로 나와 제르미가 알려줬던 태양관 2층으로 향했다. 쨍쨍하던 해는 어느덧 건물에 가려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카르. 제르미에게 얘기는 내가 전달할게.”
“그 뺀질거리는 놈이 네 말을 잘도 듣겠군.”
“장담하는데 네 말보단 내 말을 더 잘 들을 거야.”
“그럼 네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땐 내가 말하겠다.”
“무조건 말은 내가 할 테니 넌 치수만 재.”
“차라리 나더러 허수아비가 되라고 하지 그래.”
“말 잘했어. 차라리 그냥 허수아비처럼 있어.”
시카르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 나를 조금 흘겨보았지만, 그러고 말 뿐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아무리 못마땅하다는 듯 굴어도 역시 시카르는 내 말은 잘 듣는다. 제르미는 우리의 방문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공작님과 공작부인 아니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르미 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말씀하십시오.”
“곧 이곳 레페르의 작은 마을에서 성인식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아. 저도 들었습니다.”
“그 마을에 마법 가로등을 설치해주셨으면 해요.”
지금까지 심드렁하게 내 얘기를 경청하던 제르미는 밝게 웃으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때문에 시카르가 뒤에서 ‘이 속물 자식을 죽여버릴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겨우 그를 말리고 제르미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제르미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먼저 테이블 위로 시카르가 내게 주었던 보석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제르미를 비롯해서 시카르까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테이블 위 보석을 쳐다보았다. 제르미야 보석을 내놓으니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일 테지만, 시카르는 자신이 준 것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기 때문에 두 눈을 부릅뜬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카르는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 이것은 제가 드린…….”
“네. 공작님께서 제게 좋은데 쓰라고 주신 그 보석이 맞습니다.”
시카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필요할 때 쓴 것이라고 했던 탓에 더는 말하진 않았다. 다만, 그것을 제르미한테 쓰고 있는 건 조금 괘씸하다는 표정이었을 뿐.
“제르미 님께서 마을에 마법 가로등을 설치해주신다면 이 보석을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제르미는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여부가 있겠나요. 공작부인. 이 보석이면 사례로 충분합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르미는 곧장 보석 주머니를 가져가려고 해서 나는 보석 주머니를 붙잡았다. 하지만 제르미도 보석 주머니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서 테이블 위는 제르미와 내가 각자 양쪽에서 보석 주머니를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자 시카르가 보석 주머니를 휙 낚아채고는 위로 던졌다 받았다 했다.
“내 아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경청해라. 제르미. 아니면, 이 보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가루가 된 보석이 그만한 값어치를 할지 모르겠군.”
제아무리 시타르 족이라 해도 보석을 가루로 만드는 건 힘들었지만, 나는 마치 저 말이 꼭 내 아내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으면 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듣기는 제르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그는 곧장 유들거리던 웃음을 멈추고 긴장한 듯 자세를 바로 했다.
“건방을 떨어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십시오. 공작부인.”
이젠 좀 대화가 되겠지.
“마을에 가로등을 설치할 때 저희가 지급하는 제복을 입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복이요?”
“네. 제르미님.”
“저는 마법사라 제복을 입지를 않습니다. 공작부인께서 보시다시피 이곳에서도 제게는 제의를 입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복이라니요…….”
“축제날이잖아요. 가로등을 설치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축제 분위기를 흐릴 수도 있을 테니 특별하게 제복을 입어주셨으면 해서요.”
“그렇다면 축제 당일이 아닌 그 전날 작업을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가 확인을 해야 하는데 그때밖에 시간이 안 나서 그래요.”
제르미는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공작부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시카르가 보석을 가루로 만든다고 한 까닭인지 제르미가 다시 고분고분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옷 치수 좀 잴 수 있게 도와주시겠어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시카르는 꺼내든 줄자를 옆으로 쭉 펴고는 팽팽하게 당기며 말했다.
“그럼, 먼저 얌전히 서 있어 보도록 해라.”
제르미는 조금 늦게 이해한 듯 몇 초 뒤에서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서, 설……마. 고, 공작님께서 제 옷 치수를 재려는 건 아니시죠?”
이걸 어쩌나. 시카르가 자신의 옷 치수를 잴까 봐 완전히 긴장한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재야지. 지엄한 내 아내가 잴까?”
“그, 그럼 저는 이 일을 안 하겠습니다.”
제르미는 시카르가 옷 치수를 잴까 봐 매우 긴장한 것만 같았다. 그냥 옷 치수만 재는 건데도 저렇게 싫을까. 시카르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만졌다가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르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철회는 없다. 제르미.”
시카르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제르미 또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 그래도 공작님께서 제 몸에 줄자를 갖다 대고 치수를 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네 따위의 몸을 일일이 재줄 것 같은가? 네 몸은 네가 직접 재고 나는 네가 잴 수 없는 전신 길이만 잴 것이다.”
“그, 그럼 그것도 혼자 잴 수 있으니 차라리 제가 재겠습니다. 공작님.”
그러자 시카르는 제르미에게 줄자를 툭 던지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재보든가.”
그때, 시카르가 아무렇게나 던진 줄자가 제르미의 바로 앞에서 멈추어섰다.
“네. 공작님.”
제르미는 줄자에 손 하나 대지 않았지만, 줄자는 마치 자아라도 있는 듯 스스로 움직이더니 제르미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제르미는 마법사잖아? 그가 마법사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건 생각 못 해봤기에 신기했다. 제르미는 시카르에게 줄자와 치수를 적은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다 재었습니다. 공작님.”
“간단해서 좋군.”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보도록 할게요. 편히 쉬세요. 제르미님.”
“저, 그런데…… 공작부인 결례가 안 된다면 고향이 어디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물음에 대답할 고향으로 생각해둔 곳이 없었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근심하던 그때 시카르가 낯빛을 세웠다.
“네 육신을 잘 간수하고 싶다면 그 입을 다물도록 해라.”
“저, 전 공작부인의 검은 눈동자가 예뻐서…….”
“입 다물라 했을 텐데.”
시카르가 이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몰아붙일 때는 공기마저도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제르미.”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조심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긴장하는 바람에 놀란 줄 알았던 듯했다. 우리가 나올 때까지도 제르미는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원작에서 보면 매우 장난기가 많고 밝는 성격이라고 표현돼 있었지만, 그런 그도 악역 앞에서는 등골이 서늘했던 모양이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시카르는 내 손을 놓지 않으며 말했다.
“이제 제복만 만들 일만 남은 건가? 정말 귀찮은 일 투성이군.”
*** 오늘 저녁도 시카르가 식당에서 가져온 밥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제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분명 귀찮은 일투성이라며 제복 만들기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시카르는, 마치 자신의 새로운 취향을 찾았다는 듯 신중한 모습으로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시카르가 자신의 칼을 갈고 닦을 때나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한다고 서술돼 있었기 때문에 바느질에 집중해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바느질을 하려고 하자 시카르는 완벽한 자신의 작품에 흠을 내지 말라는 듯 경계하는 눈으로 천을 뺏어갔다.
“바느질은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견장이나 만들어라.”
“혼자서 하기 힘들 텐데?”
이건 정말 걱정돼서 한 말이었지만, 시카르는 그런 걱정 따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괜찮다. 네가 하면 재봉틀을 입힌 것처럼 곧게 뻗은 바느질 자국이 엉망이 될 테니 나 혼자 하겠다.”
그러고는 다시 바느질에 열과 성의를 다해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취향을 찾은 게 분명해.’
그래서 나는 견장을 만들었다. 이것도 쉬운 건 아니었지만, 바느질보다는 실타래를 땋는 게 더 적성에 맞는 듯했다.
“할 만한가.”
“응. 바느질보다는 할 만해.”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라니?”
“키안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게 할 만하냐고.”
물론 키안은 손이 가는 게 없었기 때문에 매우 할 만했다.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가끔은 정말 내 친자식 같을 만큼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마음을 벅차게 만드는 아이였다.
“당연하지. 세상 어디에도 키안 같은 아이는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해.”
“그럼, 내 아내 노릇은 할 만한가?”
그는 질문을 던져놓고도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바느질만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한번 지어주었다.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시카르는 미소를 짓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네 남편 노릇이 할 만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