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8)2022.01.20.
제르미는 옷이 불편한 듯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제르미 님. 옷이 많이 불편한가요?”
“네. 공작부인. 매우 불편해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이 들 정도예요.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무겁고 치렁치렁한 옷은 처음이라서요.”
“그래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뭘 말인가요?”
“제르미 님께선 안 보여서 잘 모르시겠지만 옷이 매우 잘 어울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제르미의 미간이 풀어졌다.
“잘 어울린다고요?”
“네. 방금 드래곤의 목이라도 치고 온 늠름한 나이트처럼 보여요.”
드래곤까지 언급하자 시카르와 제르미는 동시에 움찔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제르미는 칭찬이 마음에 들어서인 듯했고, 시카르는 웬 헛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드, 드래곤의 목이요?”
“네. 성인식 축제 때 마을의 처녀들이 많이 온다고 하던데 제르미님을 보게 되면 모두 춤 신청을 받고 싶어 할 것 같아요.”
시카르는 이제 완전히 노골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부도 작작 하라는 소리를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상태로 축제에 갔다간 종일 투덜거리고만 있을 지경인데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를 좋게 볼까. 특히나 로엔이 카이젤에게 반한 건 그의 늠름함 때문인데 말이다. 지나친 것이 모자란 것만 못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적어도 지금의 제르미에게선 그 말이 적용되진 않는 것 같았다. 제르미는 내 지나친 칭찬에 조금 전 옷이 불편했다는 기억은 모두 잊은 채 어깨를 쫙 펴더니 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작부인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축제에 늦으면 안 되니 어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르미는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지만 시카르가 흘겨보는 바람에 곧 웃음을 거두었다.
“지금 보니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군.”
“아니지.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은 아니었어. 기사 제복을 입고 계신 제르미 님은 정말로 멋지셨거든.”
“드래곤을 목을 베고 온 것 같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라는 건가?”
아.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뭐 어때 선의의 거짓말인데.
“덕분에 제르미님께서 옷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잊었잖아?”
나는 시카르를 향해 생긋 웃어준 후 제르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시카르가 뒤에서 따라오며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미 나는 레카도르에서 아내의 손을 붙잡고 다니는 로맨틱한 공작이라고 소문나 있더군. 그러니 손 놓을 생각 마.”
그것을 의도해서 소문낸 게 누구더라?
“근데 여기서 널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하지만 매우 낮은 확률이라도 누가 알아본다면, 그것도 남 말을 매우 좋아하는 호사가라면, 소문의 진위까지 알아보려고 들겠지.”
“그냥 내 손을 잡고 싶다고 말해. 그러면 내가 군말 없이 잡아 줄 테니까.”
시카르는 나를 흘겨보며 콧방귀만 뀔 뿐 끝끝내 자신이 날 좋아한단 사실을 실토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내가 손을 잡아 주길 바랐다고 말해. 솔직하게 말하면 앞으로 나도 수시로 손을 잡아 줄 테니까.”
이미 내 손을 수시로 잡을 만큼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넌 처음엔 기억을 본다는 구실로 내 손을 잡기 시작했어. 그렇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사이가 좋아서 손을 잡고 있는 줄 알게 됐고, 그 이후부터 넌 로맨틱한 남자로 보여야 한다는 구실로 내 손을 수시로 잡고 있어. 안 그래? 그러니까 넌 이미 충분히 내 손을 실컷 잡고 있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더 잡아 달라는 말로 들리는군.”
‘아. 이건 뭐 열린 결말 해석도 아니고. 완전 제 마음대로 해석이네.’
“무슨 소리야…… 나는…….”
“참. 너 말이야. 아침마다 잠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데. 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 아닌가?”
“아, 그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바느질을 하다 잠들어 있는 시카르의 얼굴이 잘생겨서 보여서 빤히 쳐다보긴 했었다. 그런데 시카르는 자신이 외모에 관심이 없기 성격이기 때문에 내가 잘생겨서 쳐다봤다고 해봤자 변명인 줄 알 것이다. 물론 심장이 뛰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을 보면 뛰는 심장처럼, 그런 건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건, 네가 밤새 바느질을 하다 잠든 모습이 짠해 보여서 그랬던 거야.”
“그 말이. 그 말이지.”
“응? 아니, 어떻게 그 말이 그 말일 수가 있어?”
“누차 말하지만, 네가 나를 많이 좋아한다고 해서 화내진 않는다.”
‘내가 화난다고. 내가.’
시카르가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열린 결말 해석을 해서 나는 조금 억울했지만, 우리는 곧 제르미가 먼저 탄 마차에 올라야 했기에 이 대화는 열린 결말로 끝내야 했다.
*** 레페르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서부터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할머니의 말씀처럼 마을은 몇 가구 되지 않을 만큼 작았고 동네 처녀총각이라고 해봤자 몇 명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듣기로는 밤이 되면 각지에서 구경 온 이방인들로 인해 사람들이 북적인다고 했다. 제르미도 막상 도착하니 기분이 좋았는지 밝게 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야. 평민들의 축제는 처음인데 꽤나 자유분방한 느낌인데요?”
하긴. 귀족들의 축제라고는 국왕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전부긴 했지만, 화려하고 멋진 대신에 매우 불편했다. 나 또한 그랬으니, 저 자유로운 영혼인 제르미 조차도 귀족들의 축제가 지루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신전에서 만든 옷들은 이미 어제 마을 아가씨와 총각들에게 전달된 상태였기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전에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단정해 보이는 드레스와 예복들로 축제에서 입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시카르와 나도 똑같은 옷을 입고 참석한 상태였다. 제르미는 그래서 조금은 놀란 눈으로 사람들과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공작님과 공작부인의 옷차림이…….”
“네. 저희는 이곳에서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축제를 조금만 즐겼다 가려고 해요.”
“아.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는 저를 유라 님이라 불러주시고 공작님께는 시카 님이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저는 괜찮지만 공작님께서 과연 허락을 해주실지가…….”
“내 아내가 허락했으면 내가 허락한 것과 진배없다.”
“정말 공작님께서는 결혼 후 많이 달라지셨…….”
“방금 그 말투를 고치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시……카 님이라는 말이 익숙치가 않다 보니 나오지가 않아서…….”
괜히 봉변당하고 있는 제르미를 보니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멀쩡한 사람들도 시카르와 있다 보면 다들 저렇게 금세 주눅이 들었다.
“제르미.”
“네. 공…… 아니, 시카 님.”
“우린 잠시 어디 갔다 와야 하니까. 마을 촌장님께 말해서 먼저 가로등을 설치하도록 해라.”
우리? 왜 우리지?
“저기, 시카 님. 저는 이곳에 남아 있겠…….”
“부인을 혼자 두기에는 제가 심히 염려스럽군요. 저와 함께 다녀오시죠.”
“아니, 그…….”
제르미가 무슨 일이냐는 듯 수상하게 보고 있었기에 나는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리고 제르미 님. 촌장님께는 저희가 미리 서신을 보낸 상태니 먼저 작업을 하는 게 무리가 없을 거예요. 이미 승인을 모두 받았거든요. 아마 마을 사람들이 도와줄지도 모르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제르미가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난 후 나는 시카르에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물었다.
“카이젤을 납치하는 일에 꼭 내가 필요하진 않잖아?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내 공작저에서도 난 널 한 번도 혼자 둔 적이 없을 텐데. 적어도 비카가 곁에 있거나 듀리온이 곁을 지키지 않는 이상에는 널 혼자 둘 수 없다.”
“여기는 레페르 신전이 코앞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첫째. 넌 광장공포증이 있다. 그리고 둘째. 넌 오지랖도 넓어서 꼬마 아이를 살리겠다고 뛰어들다 사고도 났지. 셋째. 만일의 위험 사태를 항상 대비해야 하니까. 이 정도면 설명이 됐겠지? 그러니까, 업어가기 전에 고분고분하게 따라가지.”
‘뭐, 내가 업어간다고 하면 겁낼까 봐?’
“그럼 업고 가.”
“뭐?”
“나 업고 가라고. 나 업고 가겠다며?”
시카르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저, 당황하는 표정! 내가 시카르 때문에 툭하면 당황해서 저런 표정을 지었었지. 그런 표정을 지금은 시카르가 짓고 있는 것을 보니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황당함을 당해보는 소감 어때. 아주 뒷골이 얼얼한 기분이지? 하지만, 잠시 나를 보던 시카르는 정말로 내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나를 덥석 업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시카르. 그냥 내가 좋으면 좋다고 말로 표현해. 이렇게 덥석 업지 말고.”
“모순적인 말을 하는군. 업으라고 한 건 너다.”
“그건 네가 날 업고 간다고 해서 업으라고 한 거잖아!”
“네가 싫으면 싫다고 했어도 될 일이었지. 하지만, 업으라고 한 건 너였지.”
황당하라고 한 말인데 진짜 업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처음엔 나도 너무 당황해서 땀도 나고 심장도 뛰고 하더니 계속 업혀 있다 보니 이것도 나름 편했다. 그래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듯 시카르의 등 짝에 얼굴을 묻혔다. 그래도 그 순간 시카르의 귓불이 조금 빨개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봐. 내가 이렇게 좋으면서 반항은.’
시카르는 마차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날 내려주었다. 그리곤 마부에게 말해서 말을 분리시켰다.
“말은 왜 분리시키는 거야?”
“카이젤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말을 타야 하니까.”
내가 왜 말을 타야 하냐고 묻기도 전에 시카르는 먼저 말 위로 올랐다.
“나, 난 말 타본 적 없어.”
내가 뒷걸음질을 치자 시카르는 나를 몰아가듯 다가와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뒤에 있다. 절대 떨어질 일은 없으니 어서 타.”
시카르는 나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저 손이 마치 죽음의 사자의 손 같기만 해서 섬뜩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만큼 말을 타기가 무서웠다는 것이다. 놀이 기구도 잘 못 타는데…….
“네가 시간을 지체하면 카이젤이 로엔을 만나게 될 텐데?”
그 말은 나를 더 지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용기가 나서라기보다 맹목적으로 움직이듯 나는 시카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시카르는 나를 낚아채듯 잡아 끌어당기며 자신의 앞으로 앉혔다.
“막상 말에 타보니 별거 아니지?”
별거 아니긴. 막상 말에 올라타고 보니 더 무서웠다. 말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기에 생각보다 더 무서워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카르는 내게 고삐를 주며 말했다.
“꽉 잡아!”
말이 출발하자마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