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9)2022.01.24.
카이젤의 집은 레페르의 작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유라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정신을 추스리듯 머리를 털었다. 괜히 머리를 터는 바람에 가뜩이나 바람을 맞아서 산발이 된 머리가 더 헝클어졌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지만 머리가 너무 엉망이군.”
시카르는 손을 뻗어 유라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주며 카이젤의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들판에 있는 작은 오두막 앞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손질하지 않은 잔디로 인해 외벽까지 길게 뻗은 풀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카이젤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시카르는 유라와 함께 오두막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멈추고 근처에 앉을 만한 것이 있는지 둘러 보았다. 나무 오크통 하나를 발견한 시카르는 그것을 가져와 품에서 꺼내든 손수건을 그 위에 깔았다.
“넌, 잠시 여기 앉아서 기다려라.”
유라는 오크통 위에 깔려 있는 손수건을 보다가 아무도 없는 텅 빈 공터 같은 곳에서 기다리는 것보단 따라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따라 들어갈게.”
겉으론 아닌 척해도 마음이 여린 여자였기에 험한 꼴을 봤다간 기절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험한 꼴 보고 싶으면 같이 들어가든가.”
유라가 더는 대꾸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시카르는 피식 웃으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낡고 해진 나무판자 같은 문은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카이젤이 인기척에 놀란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지만, 역광을 등진 커다란 사내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누구십니까?”
얼굴을 구분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지만, 그 즉시 목이 졸렸다. 왜 이러냐고 묻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을 조르고 있는 손가락의 압력으로 느껴지는 힘이 인간의 것은 아닌 듯했다. 목뼈가 바스러질 것 같은 공포에 채 잠식당하기도 전에 카이젤은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시카르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기절한 카이젤을 질질 끌고 나와 오두막 차양을 버티고 있는 기둥에 묶었다. 카이젤에게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던 탓에 집 안에 묶어두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굶어 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밖에까지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도 축제가 끝나고 나면 누군가는 발견해서 풀어줄 것이다. 카이젤이 죽은 사람처럼 축 처져 있으니 유라가 놀라서 달려왔다.
“주, 죽은 건 아니지?”
“기절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라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카르는 여전히 오크통 위에 있는 손수건을 집어 들어 그것을 툭툭 털며 말했다.
“다시 출발하지.”
*** 다시 레페르 마을로 돌아오자 축제가 한창이었다. 드넓은 땅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았던 까닭에 로엔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머리를 예쁘게 하나로 땋은 로엔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땋은 머리에 꽂아둔 화사한 꽃들 때문에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말을 타고 달려오다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모르고 얼른 달려가려 하자 시카르는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정돈해 주었다.
“아무리 평민들이라도 헝클어진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하고 인사하는 것이 예의다.”
커다랗고 거칠어 보이는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 됐다. 그래도 뛰진 마. 여긴 포장이 잘된 곳이 아니라서 그러다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코 깨지기 십상이니까.”
어차피 손도 놓아주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시카르의 손에 붙잡혀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몇 발자국 더 가다 보니 나를 발견한 로엔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폴짝폴짝 뛰어왔다.
“유라 님 아니에요?!”
햇살을 등지고 있어서일까. 반가운 듯 나를 보며 활짝 웃는 로엔의 미소가 오늘따라 더욱 눈부셔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로엔님을 찾고 있었어요!”
“잘하셨어요. 시카님도 너무 반가워요!”
시카르는 마지못해서 인사를 받아준다는 듯 고개를 한번 까닥거렸다.
“유라님. 로브를 벗으니 정말 아름다우신데요?!”
로엔은 내가 고맙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축제 분위기 속에 들뜬 듯 제 자리를 몇 바퀴나 돌았다. 아직은 쌀쌀한 초봄임에도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고였다.
“저는 어때요?”
“너무 예뻐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요.”
“제가 성녀 같다고요?”
내가 버릇처럼 말해버린 ‘선녀’를 ‘성녀’로 알아들은 듯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곳에서 선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네.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님 같아요.”
로엔은 수줍은 듯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며 방긋 웃었다.
“성녀님이라뇨! 성녀님께서 들으면 제게 벼락을 내리겠는데요?! ”
“아마, 행운의 벼락을 내려주시겠죠?”
“그럼 우리 같이 맞을까요? 유라 님?”
활짝 웃으며 들떠있는 로엔의 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서일까. 나도 덩달아 들떠서 로엔이 내민 손을 붙잡으며 방방 뛰었다.
“좋죠!”
“이번에 또 깨달았어요. 저는 로브보단 이런 예쁜 원피스가 더 잘 어울린다는 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이요?!”
“네!”
시카르는 시끄러워서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귀를 막았지만, 나와 로엔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두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듯 방방 뛰었다.
숨이 찰 정도로 뛰고 나서야 우리는 멈추었다. 로엔에 비해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그것 좀 돌았다고 멈춰 서자마자 어질어질해서 비틀거렸다. 시카르가 곧장 내 어깨를 잡지 않았다면 술 취한 사람처럼 혼자 비틀비틀거렸을 것이다. 어지러워서 그런지 속이 울렁울렁거렸다. 시카르는 내가 속이 울렁거린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한 손으로 내 등을 툭툭 쳐주었다.
“너처럼 운동신경이 둔한 사람이 그렇게 돌다 보면 구역질이 나올 수도 있다. 속은 어때? 괜찮나?”
나는 말도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시카르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하게 내 등을 두드렸다. 좀 지나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로엔은 어디 가고 보이지 않았다.
“응? 로엔은 어디 있어?”
“저기.”
시카르가 가리킨 곳을 보자, 로엔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재빠르게 사람들을 훑어 나갔다.
“시, 시카르! 지금 로엔이 남자를 찾고 다니는 거 같지 않아?”
“그런 것 같은데.”
“아, 안 돼! 로엔이 이상한 남자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어서 제르미를 만나게 해주자. 응?”
“이상한 건 로엔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굳이…….”
나는 시카르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를 잡고 로엔이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로엔님! 누구 찾으세요?”
로엔은 예상대로 오늘 첫 키스의 상대를 찾고 있었다.
“어디든 남자 혼자 있는 곳이면 가서 냅다 앉을까 해서요.”
“그러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식사하지 않으실래요? 제 남편이 식사를 준비해놨거든요.”
시카르가 준비했다기보단 이곳에 사는 마을 주민에게 미리 돈을 주고 부탁해 놓은 것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두 분 사이에 끼면 이상하잖아요.”
“남자분이 한 분이 더 계셔서 그래요.”
내 말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던 로엔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래요?”
“그럼 절 따라오시겠어요. 바로 근방이에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로엔은 나보다 더 먼저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지금 그 남자분은 어디 계시죠?”
급하긴 정말 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시카르에게 제르미를 데려오라고 말한 후 로엔을 앞질러 가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우리가 자리를 마련한 곳은 근처에 성인식 의식이 열리는 삼나무 부근이었다. 테이블에는 파이와 과일, 고기와 음료 등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었다.
“여기에요. 일행은 곧 제 남편이 데려올 거예요.”
“어떤 분이실지 정말 기대되는데요?”
로엔은 마치 소개팅에라도 나온 사람처럼 설렘으로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는 가글하듯이 입안을 헹구고는 와인을 뱉어냈다. 그러곤 계속해서 시카르가 언제 오나 주위를 살피다 말했다.
“저분인가 봐요?”
누가 봐도 우린 전혀 친하지 않다고 말하듯, 시카르와 제르미가 서먹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네. 맞아요.”
로엔은 벌떡 일어서서 제르미가 테이블 앞으로 도착하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로엔 라무트라고 해요. 기사님이신가 봐요?”
제르미는 갑작스런 로엔의 인사에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내가 생긋하고 웃으며 로엔을 신전의 신관이라고 소개시켜주자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신관님. 저는 제르미 아이커라고 하는 마법사입니다. 이 제복은 여기 이분들께서 축제 선물로 주셔서 입은 것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마법사시라고요? 마법사는 몸이 허약한 줄 알았는데, 몸이 아주 좋으신걸요?”
몸이 좋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르미는 허리를 펴더니 어깨를 넓히며 말했다.
“아, 그건 마법사들이 로브를 입고 다녀서 그런 겁니다. 마법사들이 로브를 입고 다니는 이유는 움직임이 더 가볍고 편해서이고요.”
“그렇군요. 혹시 마탑이나, 길드 소속이신가요?”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습니다.”
“그럼 훨씬 더 자유로우시겠군요?”
“제약받을 일이 없으니 그런 편이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혹시 마법사가 필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언제든 불러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혹시 애인 있으세요?”
제르미는 모든 것이 멈춘 듯, 심지어 숨 쉬는 것도 멈춘 듯 경직된 상태로 로엔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얼굴로 두 눈을 몇 번 껌뻑이고는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실례지만, 애인 있는지 물어보신 겁니까?”
“네.”
“아…… 그러셨군요. 애인은 없습니다.”
“어머. 잘됐네요! 저도 애인이 없거든요.”
제르미는 이번에도 또다시 숨 쉬는 것조차도 멈춘 듯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제르미가 말문이 막히는 건 처음이 아닐까 한다. 제르미는 대꾸도 못 하고 나를 슬쩍 쳐다볼 뿐이었고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에 힘을 주고 있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이상형은 어떻게 돼요?”
“이……상형이요?”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시냐고요. 예를 들어서 머리를 하나로 예쁘게 땋은 여자라든가, 여신관이라든가…… 또는.”
여신관이라든가…… 까지는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그다음 말을 듣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르미는 이보다 더 낯뜨거울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벌겋게 붉혔지만. 로엔은 자신의 턱에 손을 괴며 말했다.
“나 같은 여자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