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악역을 길들이는 방법 (10)2022.01.27.
로엔이 제르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제르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얼버무렸다.
“저, 저는…….”
제르미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 또한 궁금했다. 원작에서는 로엔을 좋아했는데, 현재 진행 상황으로 봐선 로엔의 저런 거침없는 모습에 놀라서 뒷걸음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됐다. 로엔이 제르미와 이루어지지 않으면 카이젤과 다시 잘 될 수도 있으니까. 키안의 신성력 스승이 될 로엔의 사망으로 키안이 입게 될 상처 또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제르미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로엔님 같은 분이라면 좋겠지만, 저는 아직 이상형을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흠. 이건 그린라이트 같은데?’
“사실 저도 이상형은 없어요.”
“그렇습니까?”
“아니, 정정할게요. 이상형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막 생겼어요.”
“아, 축하드립니다.”
“바로 그쪽 같은 사람으로요.”
제르미가 로엔의 이상형이 됐다면 카이젤과는 이제 영영 잘 될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건가?
“저도 몰랐는데, 제가 몸이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음. 제르미의 얼굴색이 저리도 붉었던가? 제르미는 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도 모르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릴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하고 그저 넋이 나간 눈으로 로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로엔이 원작에서 카이젤을 좋아한 것도 그저 몸이 좋아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에서 보이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카이젤보다 몸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곤 시카르와 제르미 뿐이었다. 막연히 로엔이 좋아하는 타입이 그저 기사이거나 기사 같은 남자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제르미에게 기사 옷을 입힌 것뿐이었는데, 몸이 좋은 남자가 이상형이었다니. 평소처럼 제르미가 로브를 입고 나타났다면 로엔에게 전혀 마음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왠지 제르미가 로엔을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이 좋은 다른 남자를 찾을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는 그만큼 제르미에게 진심으로 첫눈에 반한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힘줄이 솟아오른 제르미의 팔뚝으로 가는 것으로 봐서는 내 짐작이 분명했다.
“저보다 더 몸이 좋은 남자들이 많을 텐데도 저같이 볼품없는 놈을 좋게 봐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로엔님.”
“볼품이 없다뇨. 얼마나 보기 좋은데요. 특히 그 팔뚝에 솟아난 힘줄이 참 매력적이에요.”
“그, 그렇습니까?”
제르미가 태어나서 저렇게 진땀을 빼본 적이 과연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된 로엔의 저돌적인 말들은 제르미을 당황하게 했고, 제르미는 자꾸만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뒤늦게야 로엔의 말을 이해하곤 얼굴이 벌게지곤 했다. 마법사 길드를 나온 후 그의 작은 탑에서만 지냈다고 하니, 아마 제르미는 태어나서 자기보다 말 많은 사람은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저돌적으로 유혹의 말을 던지는 여자는 더더욱 처음이겠지. 제르미는 민망했다가 안심했다가를 반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제르미님, 키스는 해보셨어요?”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 나와 제르미가 거의 동시에 주스를 마시는 와중에 로엔이 한 말이었기에 우리는 동시에 주스를 뿜으며 기침을 해야 했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시카르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 입술을 닦아줄 뿐이었다. 와중에 시카르는 음료가 상한 건 아닌지 확인을 한번 하고 나서야 내게 다시 음료를 따라 주었지만, 나는 제르미가 뭐라고 할지 기대되는 통에 음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직 없습니다.”
제르미는 이마에서 솟아난 땀방울을 옷소매로 스윽 닦으려다 로엔이 손수건을 내밀어 주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곤 이마를 닦았다.
“고맙습니다.”
로엔은 제르미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요. 그냥 주는 거 아니에요. 빨아서 다시 돌려주세요.”
제르미는 이마를 닦는 것을 멈추고 얼빠진 눈으로 로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린 자리를 비켜줘야겠는데.’
*** 슬쩍 자리를 뜬 후에 시카르와 간 곳은 마차가 있는 곳이 아닌 성인식 의식을 하는 곳이었다.
“마차로 가는 거 아니야? 여긴 왜 온 거야?”
“여기까지 왔으니 성인식 구경은 해야지. 너 이런 거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거기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이 작은 마을에 올해 성인이 된 사람이라 봤자, 몇 되지도 않으니 걱정 말고 따라와.”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우물쭈물해 하는 내 심정에 비해 시카르의 대답은 간결했다.
“아니, 별로.”
슬쩍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우리는 성인식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삼나무 앞으로 이동했다. 그래 봤자 몇 걸음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축제 분위기는 젊은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노는 사람들, 또는 기도하는 사람들 점을 보는 사람들 등 모두 축제 분위기에 한껏 들떠 있는 모습들이었다. 시카르는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삼나무까지 걸어가 봐.”
“응?”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난 시카르가 내게 뭘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페르의 토착민들은 성인식 때 성인이 된 사람의 발자국에 신성수를 뿌려준다고 한다. 그래야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산다고 믿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시카르가 내 발자국을 따라 신성수를 뿌리려는 것 같았다.
“시카르. 지금 내게 성인식 의식을 하려는 거야?”
주머니에서 신성수를 꺼내 들던 시카르는 내가 돌아서자 멈칫거리더니 이미 들킨 마당에 더는 감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신성수를 완전히 꺼내 들었다.
“그래. 레카도르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모두 성인식이라는 것을 한다. 왕국 기준으로 네 나이는 성인을 훌쩍 지난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쁜 경험은 아닐 테니 한번 해보는 게 좋겠지.”
내가 안 한다고 할까 봐. 미리 회유하느라 여러 설명을 늘어놓는 시카르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신성수는 언제 챙겨온 거야?”
“제르미에게서 하나 얻은 것이다.”
아무래도 빼앗은 거 같은데.
“그럼 신성수를 내게도 나눠줘. 나도 해줄게.”
“그런 건 이미 했다. 여기선 18세가 되면 다 하니까.”
“전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성인식은 무사히 치렀구나. 다행이야.”
“당시에 나는 축제 따위 다닐 수 없을 만큼 바빴다. 바쁘지 않았어도 축제엔 가지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안드레아가 신성수를 뿌려줬기 때문에 무사히 성인식을 마칠 수가 있었지.”
그랬구나. 어쩐지 축제에는 가지 않았을 것 같더라니. 시카르는 다시 내 몸을 돌려세웠다.
“처음부터 다시 하지. 앞으로 걸어가 삼나무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면 안 된다. 뒤돌아보면 부정 탄다는 말이 있으니까.”
“응. 알았어. 나 그럼 간다.”
나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뎠다. 성인식이라…… 이미 성인이 된 지가 훌쩍 지나버린 시기였지만, 처음 하는 성인식이었다. 이곳에서의 성인식은 앞으로 신에게 책임감 있게 살겠다는 약속임과 동시에 신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그래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걸음, 걸음이 의미가 깊었다. 성년의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지나쳐버려서인지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왔다. 뒤에서 성수를 툭툭 뿌리는 소리와 함께 시카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만물의 대주재자이시자, 평화와 안녕을 굽어살피시는 레페르여. 이 가련한 한 떨기 아르메리아 같은 여인을 보소서. 레페르의 축복이 내려 언제나 그녀를 보호하소서.”
시카르의 말이 끝날 때쯤 나는 삼나무 앞에 당도했다.
“이제 여기서 성인식을 무사히 마쳤으니 너도 이제 이 세계 사람이 되었군. 축하하는 기념으로 춤이나 추지.”
시카르는 내게 손을 내밀며 이어 말했다.
“연습했던 춤을 써먹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써먹을 수 있겠군.”
‘춤을 추자고?’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시카르는 내 얼굴을 잡고 자신을 향해 고정시켰다.
“주변을 둘러볼 필요 없다. 어차피 모두 저들 노느라 정신없을 테니 우리에게 시선 둘 사람도 없을 것이다.”
“괜찮아. 나 꼭 그 춤 안 춰도 돼.”
“네 말대로 제르미와 로엔이 잘 되는 걸 보고 싶다면 우리도 곁에 가서 함께 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싫단 건가?”
두 사람을 보니 여전히 대화만 나누고 있는 모습이긴 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워줘야 더 분위기가 무르익을 줄 알았는데, 제르미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이었다.
“접촉만큼 남녀를 밀접하게 묶어주는 건 없지.”
시카르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로엔을 향해 다시 저벅저벅 걸었다.
“축제를 그냥 이렇게 춤도 안 추고 보내실 생각은 아니겠죠?”
가뜩이나 울상을 짓고 있던 제르미는 시카르의 제안에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로엔은 시카르에게 말 잘했다는 듯 손짓을 한 번 하곤 제르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추죠. 신관과 마법사의 춤이라. 이색적이지 않아요?”
제르미를 보는 로엔의 눈빛은 ‘오늘 반드시 내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고, 로엔을 보는 제르미의 눈빛은 ‘제발 저를 잡아먹지만 말아주세요.’라고 하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와서 어깨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제르미는 마지못한 듯 로엔의 손을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요…….”
제르미가 로엔의 손을 잡자마자 자석처럼 끌려가듯 로엔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로엔은 활짝 웃으며 제르미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르미는 로엔의 마리오네트가 된 듯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둘은 꽤 잘 어울렸다.
“우리도 같이 추지. 그런데 평민들이 추는 춤은 나도 잘은 모른다. 로엔이 추는 춤으로 따라 할까 하는데 괜찮겠나?”
“안 그래도 로엔을 따라 하자고 할 참이었어. 그러면 유대감도 더 깊이 형성될 거 같으니까.”
“나쁘지 않겠군.”
나는 시카르의 손을 잡고 제르미와 로엔이 추는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시카르와 연습했던 춤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시카르는 제법 능수능란하게 따라 추며 나를 에스코트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평범하게 손을 잡고 제 자리를 돌거나 옆으로 힘차게 몇 걸음을 움직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등. 남녀가 한 쌍이 되어서 춤을 추는 왈츠나 룸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쾌한 춤이었다. 계속 이렇게만 춤을 추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문제는 로엔이 이상하게 추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고 시카르가 그것을 따라 한다는 데에 있었다. 로엔은 갑자기 제르미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제르미가 놀라 당황한 것처럼 그것을, 따라 하는 시카르 때문에 나도 놀라 당황했다.
“이, 이런 건 따라 하지 않아도 돼!”
무감하게 내리깐 눈이 능청스럽게 나를 내려다봤다.
“이왕 따라 하는 것이니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게 좋겠지.”
“잘못 이해했나 본데, 난 춤만 따라 하라고 한 거야.”
“너도 뭘 잘못 이해하고 있나 본데, 나는 로엔이 춤추는 동안 하는 건 뭐든 따라 할 생각이다. 가령, 키스에 눈이 먼 로엔이 제르미에게 입을 맞춘다던가 하면 그것도 따라 할 심산이라고 해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