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첫사랑, 첫 키스 (1)2022.01.31.
말로만 내게 입을 맞춘다고 했을 뿐인데도 이미 입을 맞춘 듯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내주면 안 되지.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난 결코 쉽게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핑계로 내게 키스할 생각하지 마.”
“일부러 거절하는 말로 더 애태우게 만드는 걸 밀당이라고 한다지? 내게 밀당 같은 걸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분명히 명령하는 말투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시카르는 조금 흠칫하듯 눈꼬리를 움찔거리다 말했다.
“밀당은 좋지 않아.”
순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듣는 것을 보니 나도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시카르가 제 가족의 말은 상당히 잘 듣는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도 했고, 묘한 승리감이 든 탓도 있었다. 하지만 시카르는 내가 좋아서 웃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날 따라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것이겠지. 다행히 춤이 끝날 때까지도 로엔이 제르미에게 키스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무지막지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춤이 끝난 후 제르미는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휘청거렸다.
*** 제르미는 태어나 여자를 몇 번 본 적이 없긴 했지만, 이렇게 박력 있고 거침없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처음에 춤을 추자고 내민 손을 봤을 때도 막연히 그 손은 잡으면 안 되는 손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선뜻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옆에 와서 발을 툭치는 바람에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한, 시카르 블레이크 공작은 누구든 자신을 거역하면 어떻게든 응징을 가하는 사람이었다. 공작부인의 제지로 앞에서는 뭐라고는 못해도 뒤로는 발을 툭 치는 것처럼. 시타르족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그 힘이 몇 배는 강했기 때문에 그가 조금 더 힘을 주었더라면 발가락 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제르미는 그 생각에 섬뜩함을 느끼며 곧장 로엔의 손을 덥석 잡은 터었다. 그런데 어쩌면 신전도 코 앞이겠다. 발가락 몇 개가 부스러지게 둘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로엔은 제르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침없고 적극적인 여자였다.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로엔의 말 한마디에 제르미는 춤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귈래요?”
“네?”
“사랑하기 좋은 날이잖아요. 성인식이니까.”
너무나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사귀자고 말하는 로엔을 보며 제르미는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그럼 한 번 더 만나야 사귈 거예요?”
“아무래도 몇 번은 더 만나봐야…….”
“그럼 어차피 몇 번 더 만나고 사귈 맘이 생길 것 같으면 지금부터 사귀어보는 게 어때요? 저 이렇게 옷 예쁘게 입고 있는 날이 흔치 않거든요. 이왕이면 이런 모습일 때 사귀고 싶어요.”
그래서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서 갑자기 일하러 왔다가 애인을 만들어 버린 형국이 된 것이다. 제르미는 자신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복층 짜리 집이 전부인 자신을. 작은 마탑을 갖고 있노라 말은 하고 다녔지만, 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1층은 마법 연구실이었고, 복층은 제 몸 하나 쉴 수 있는 작은 침대와 책상이 전부인 곳이었다. 아직 누구를 책임지기에는 제 몸 하나도 책임지기 힘든 처지였기에 아무래도 이 점을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네?”
“저는 가진 게 많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법사라고 하면 다들 돈도 많고 뭔가 근사해 보이고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들 하지만, 전 아직 가진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는 작은 마탑을 갖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작은 복층 오두막 같은 집일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클래스도 낮은 마법사입니다. 한마디로 내세울 게 하나 없습니다.”
제르미는 제 살을 뜯는 심정으로 한 말이었지만, 로엔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도 개뿔도 없어요!”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해맑게 웃으며 개뿔도 없다고 말하는 로엔을 보니 제르미는 얼떨떨하면서도 왠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로엔은 추던 춤을 멈추고 서서 말했다.
“제가 언제 돈 달래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럼 원하는 거 없이 제가 좋으시다는 말씀이신지…….”
로엔은 그건 아니라는 듯 곧장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그건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대가 없이 좋아할 수 있겠어요?”
“그럼 제게 원하시는 게…….”
조심스럽게 입을 뗀 제르미와 달리 로엔은 곧장 활기찬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키스요!”
제르미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이 여자, 키스가 정말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라고.
“전 그냥 제게 키스만 잘해주시면 돼요.”
“그, 그건 부족하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럼 이제 다른 건 없으신 건지…….”
“이왕이면 저 분 같은 남자면 더 멋질 것 같고요.”
“저 분이라면…….”
“저기 시카님이요.”
로엔은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진 남자를 보고 있다는 황홀한 눈빛으로 시카르를 보고 있었다.
“너무 자상하잖아요. 다정하고요. 아까 못 보셨어요? 유라님이 주스를 뱉자마자 유라님의 입술을 곧장 닦아주시던걸요.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도 애인이 생긴다면 그렇게 세심하고 자상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로엔이 너무나 부러운 눈빛으로 유라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제르미는 슬쩍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유라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저거 보세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잖아요. 저렇게 다정하고 자상한 남자는 드물겠죠?”
그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는 제르미도 공작이 참, 드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포악하기로 소문이 무성한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만큼은 다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게 볼 때마다 믿기지 않았으니까. ***
“와인에 머리카락을 빠트리고 먹는 건 너의 세계에서도 경우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랬나. 맥주 아니면 소주였던 내가 와인이라고는 이곳에 와서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다. 술을 왜 저렇게 비싼 돈을 주고 마시나 싶었는데, 이곳에서 와인을 한 잔 마셔보니 비싼 가격에도 사람들이 와인을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다 보니,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들어차는 기분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서 너무 와인에 심취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와인 잔에 머리카락 한 움큼 빠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시카르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겨우 한 잔 마시고 벌써 취한 건가?”
“걱정 마. 취할 정도로는 안 마셔.”
“취해도 상관은 없지만, 와인잔에 머리카락을 빠트리진 마라.”
“어허. 내가 그 말투 쓰지 말라고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말하는 거 알고 있지?”
“빠트리진 마.”
강경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말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무라다 보면 언젠가는 고치겠지.
“또 와인 잔에 머리카락을 빠트릴 것 같으니 이쪽도 넘기는 게 좋겠다.”
시카르는 내 남은 한쪽 머리카락마저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런데, 넌 와인 안 마셔?”
“난 술은 안 마신다.”
성격은 술을 오크통으로 들고 마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시카르가 술을 안 마신다니 의외였다.
“술을 안 마신다니 놀랍네. 어떻게 술을 안 마실 수가 있지?”
“술이란 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니까.”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난 술이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겁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잖아. 그래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도 하게 되고 말이야.”
“그건, 용기가 아니라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런 것이지.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술을 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어떻게 되는데?”
“처음엔 다들 기뻐서 춤을 추고 웃고 떠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지. 하지만, 점점 언성을 높이며 서로에게 쌓였던 불만을 얘기하다가 종국에는 눈물을 질질 짜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결국, 술이라는 건 마실수록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나약해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못한다.”
그건, 시카르가 어렸을 때부터 가문을 지키고자 무조건 강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평생 살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산 것이겠지.
“사람이잖아. 사람이니까 나약한 모습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는 모두 나약하니까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갖고 있는 나약한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강한 부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약한 부분이 나에게는 강한 부분이 될 수 있으니까 서로가 약한 점은 서로가 강한 부분으로 지켜주는 거지.”
“거기엔 내가 해당되는 게 없군.”
“넌 나한테 약하잖아.”
잠자코 듣고 있던 시카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흘겼다.
“내가 너한테 약하다니. 그건 무슨 소리지?”
“너 내가 다치는 게 싫지?”
“네가 다치면 골치가 아프니까. 아무래도 싫겠지.”
“너, 내가 다치는 것도 싫어하고 내가 굶는 것도 싫어하고 내가 악몽 꾸는 것도 싫어하고. 다 싫어하잖아.”
“그야 당연한 거지. 넌 내 아내이고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그러니까 넌 나한테 약한 거야. 만약 내가 다치면 속상할 거 아니야. 그러면 그건 너의 나약한 부분이 되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나약한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존재들인 거지.”
부드러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시카르는 귀 아래로 흘려 내려온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네 말은, 소중한 것에 대해 느끼는 나약함을 뜻하는 것 같군.”
소중한 것에 대해 느끼는 나약함……. 나는 내 머리카락을 그 뒤로 넘겨주는 시카르의 손을 잡았다.
“지금 나한테 소중한 것이라고 한 거야?”
동요 없이 무감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시카르의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렸다.
“당연히 내 것은 모두 소중하지. 자기 것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도 있나?”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네 것이라는 거잖아. 지금.”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동요 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금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내 아내니까.”
“그래서 내가 좋다는 말이지?”
“물론.”
갑자기 너무 쉽게 수긍하는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제 무너진 자존심에 굴복하듯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시카르는 너무 당당하게 ‘물론’이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감동인가?”
내가 지금 감동하는 표정이 아닐 텐데. 내 얼빠진 표정을 보고도 감동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런 말을 하기도 전에 시카르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럼 내가 좀 더 감동하게 해 주지.”
그러곤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게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