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첫사랑, 첫 키스 (2)2022.02.03.
술기운 탓일까. 초봄의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스쳐 간 탓일까. 감싸 안는 손길이 따스했다. 감미롭게 입안을 적셔오는 부드러운 입술과 살결이 맞닿자 눈꺼풀이 노곤하게 내려갔다. 집어삼킬 듯 침범하고 들어온 그 입술은 내게서 떨어질 듯하다 다시 침범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술이 멀어질 듯 말듯 떨어질 때는 애가 탔고, 다시 입술 위로 닿을 때는 그 달콤함에 녹아 내릴듯했다. 깊은 교감을 나누듯 침식하는 그에게 나는 점차 스며들었다. 서서히 입술을 떼어내고는 눈을 내리깔며 나를 보는 그가 살며시 고개를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폭죽이 터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나의 첫사랑, 첫 키스라는 것을. 술을 마셔서인지 방금 키스를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취기가 확 올라왔다. 시카르는 휘청거리는 나를 감싸 안았다. 포근하고 달콤한 온기에 눈이 반쯤 감겨왔다. 역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이렇게 주량이 약하진 않은데,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 거겠지. 차라리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정신은 반쯤 나가 있는 듯하면서도 너무나 멀쩡했다. 그 역시도 입맞춤 때문인지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제 해도 뉘엿뉘엿 지는 데다 네 원대로 로엔은 제르미와 잘 된 것 같으니, 우리는 이만 가도 될 것 같군.”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시카르의 붉게 물든 얼굴이 숨이 막힐 듯 눈이 부셨다. 뻔히 보고 있는 눈길이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잠을 못 자서 조금 고단하긴 하지만, 나 많이 안 취했어.”
“너 지금 얼굴이 누가 봐도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벌겋다. 눈은 게슴츠레 뜨고 있는 게 네 혼이 나가 있거나, 아니면 나한테 혼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술 취한 사람이 ‘나 안 취했어.’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말 같았다. 나는 지금 조금 취해 있었다. 와인에 취했고, 시카르의 포근한 가슴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취한 채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왜냐면 지금 이곳에서 느끼는 이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마음과는 다르게 말은 괜히 엉뚱하게 튀어나왔다.
“너, 나 취했다고 내 침대로 올라올 생각하지 마.”
“내가 술 취한 사람이나 건드는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올라가고 싶어지긴 하군.”
절대 허락 안 해……. 이 말을 밖으로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노곤 노곤 밀려오는 졸음에 곧이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저희는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아내가 조금 취해서요.”
시카르가 구태여 아내가 취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도 로엔과 제르미는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라는 조금이 아니라, 거의 만취된 사람처럼 의식 없이 시카르의 가슴에 안겨 있었으니까.
“벌써 가신다니 아쉬워요.”
“다음에 또 볼 일이 있겠죠.”
무언가 당부할 때마다 항상 협박을 하듯 칼을 들이대는 공작이, 이제는 칼이 없으니 제 목에 손을 긋는 시늉을 하며 일은 천천히 끝내도 좋으니 로엔을 신전까지 무사히 모시고 오라고 경고한 후 자리를 떠났다.
‘로엔님이 이 자리를 떠나가 전까지는 꼼짝없이 있으란 거군.’
고개를 내 젓던 제르미는 로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을 하며 그녀를 말렸다. 로엔은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 병을 손에 들고 병째로 마시고 있었다. 아니, 입안에 붓고 있다시피 했다. 제르미는 로엔의 손에 들린 와인 병을 잡으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로엔님! 괜찮으세요?”
로엔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 뭐가요?”
고개를 돌린 로엔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술에 취한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아, 아니. 술을 그렇게 드셨는데 괜찮으신가 해서…….”
“제가 술이 좀 세요. 럼주 몇 병을 마셔도 끄떡도 없을 정도랄까. 이 정도 와인 몇 병쯤이야 간에 기별도 안 가요.”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참, 전 술을 권하진 않으니 제르미님께서 드시고 싶으시면 드시고 아니면 안 드셔도 돼요.”
“그럼, 전 안 마시겠습니다. 제가 술을 싫어해서는 아니고,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그 할 일이 저와 함께할 일들이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저와 춤을 더 춘다던가.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던가.”
시카르가 부탁한 일들을 마무리 짓는 게 먼저였지만, 와인에 취한 듯 기분이 좋아 보이는 로엔의 말을 조금은 더 들어주고 싶었다. 제르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로엔에게 과일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춤은 췄으니 깊은 대화를 원하신다면 들어드리죠.”
그러자, 로엔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며, 그녀는 손등으로 자신의 턱을 괴고 제르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르미님은 자녀 계획이 어떻게 돼요?”
그냥 춤을 추자고 할 것을. 차마, 자녀 계획을 물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르미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상천외한 질문들을 할 수 있냐는 듯 로엔을 쳐다봤지만, 로엔은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는 일단 자녀는 한 명이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왜죠?”
“저희 집은 형제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늘 경쟁해야만 했어요. 내가 더 사랑받고 싶은데, 나보다 더 잘난 형제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그게 너무 질투가 났거든요. 그래서 전, 자식을 낳으면 형제들 사이에서 경쟁하지 않고 제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딱 한 명만 낳고 싶어요. 제르미님은 어때요?”
제르미는 로엔의 얼굴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헛헛한 외로움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키스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흠모하는 이유도. 그녀가 얼마나 사랑이 고픈 사람인지도.
“저는 뭐든, 로엔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로엔은 술이 확 깬 듯 제르미를 쳐다봤다.
“그 말은 저와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거예요? 오늘 처음 만나서 사귀는 건 고민스럽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르미 님께서는 처음 만난 저와 결혼 생각까지 하셨던 거예요?”
제르미는 다시 진땀이 흘러나왔다.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었다. 제르미는 갑자기 공작이 맡겨둔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사실 그것보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싶었다.
“저, 전 그럼 마저 할 일을 해야 하니 자리 좀 비울게요.”
제르미가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로엔이 그의 옷깃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 제가 오늘 축제에 온 이유는 가로등을 설치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래서 일을 마저 끝내려는 중이지요.”
로엔의 눈이 커지며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 병을 내려놓았다.
“지금 신전에 어떤 마법사가 와서 가로등을 설치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마법사가 제르미 님이셨어요?”
제르미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큼. 네. 그 마법사가 바로 제가 맞습니다. 신전 일은 거의 다 끝냈으니 돌아가시면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가로등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 마법사가 잘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제르미님이셨군요!”
칭찬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제르미 아이커인 것인가. 제르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잘생겼다고 소문났다니, 쑥스럽군요.”
로엔은 기분이 나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지금 잘생겼다는 말에 좋아하시는 거예요?”
“네. 네?”
“다른 사람들한테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좋아요?”
“아, 아니.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제 제 애인이라 말하는 거니 잘 들어요.”
제르미는 로엔이 술병을 꽉 붙잡고 있는 손을 보며 순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헤픈 남자는 질색이에요. 바람피우는 남자는 절대 용서 못 해요. 다른 여자와는 눈도 마주치지 마세요. 그, 시카님처럼요. 그분 보셨죠? 그분은 저와 눈도 안 마주쳐요. 그리고 제가 잘생겼다고 하는 말에도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슬쩍 노려보고 마는 거 있죠.”
그거야 이미 익히 들어서 제르미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때는 조금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보니까 제 남자가 그러면 너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전 제르미님께서도 저에게 그런 애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많은 걸 바라는 건가요?”
저렇게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귀엽게 말하는데, 어떻게 많은 걸 바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르미는 당장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정말이요.”
제르미 역시도 솔직한 성격이었던 데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 우회적인 말보다는 직설적인 말이 훨씬 더 듣기가 편했다. 물론 다음 말은 빼고.
“그럼 우리 키스해요.”
밝은 미소를 짓고 있던 제르미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얼얼한 기분을 느끼며 제 볼을 잡았다.
“네?”
“전, 첫 키스를 한다면 저렇게 폭죽이 빵빵 터질 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이 성인식 축제에 참가한 거고요.”
“그, 그랬습니까?”
“네. 불꽃이 터지는 아래에서 하는 첫 키스라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거잖아요. 전 정말 아름다운 첫 키스의 기억을 갖고 싶었거든요.”
로엔이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제르미는 괜시리 허리를 뒤로 뺐다.
“그, 그러게요. 매우 낭만적일 거 같군요.”
“그러니 우리 키스해요. 바로 다음 폭죽이 터질 때! 말이에요!”
다른 사람의 진땀을 빼는 말들을 쏟아낼 줄만 알았지, 본인이 이렇게 진땀빼는 일들을 겪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제르미는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말했다.
“하, 하지만,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제르미는 하고자 했던 말을 다 마칠 수가 없었다. 이내 로엔이 양손으로 제르미의 멱살을 잡고 입을 맞추었으니까.
놀란 제르미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키스를 하는 동안 귓가에서 폭죽이 ‘빵, 빵.’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세에 몰린 듯 로엔에게 멱살을 잡힌 채 키스를 하던 제르미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첫 키스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싫었다. 뒤로 밀려있던 제르미는 몸을 앞으로 당기며 로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로엔의 머리를 떠받치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로엔도 잡고 있던 제르미의 옷깃을 놓고 그의 양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의 짜릿하고 달콤한 첫 키스 뒤로 아름답게 폭죽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