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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첫사랑, 첫 키스 (3) (72/197)

72화. 첫사랑, 첫 키스 (3)2022.02.07.

16549787442086.png“누나라고 불러봐.”

술주정은 없었던 것 같은데. 유라의 기억을 살폈을 때, 분명히 주사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라가 저에게 하고 있는 것은 주사가 분명했다. 숙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사불성이었던 유라는 침대에 눕히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더니 누나라고 부르라며 주사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시카르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보고 있자니 유라가 그의 양 볼을 손으로 잡아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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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87442086.png“착하게 살아라. 응?”

16549787442102.png“이거 놓지.”

16549787442086.png“싫-어.”

말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시카르는 유라의 양손을 잡고 침대에 눕혔다. 평소라면 놀라서 정신을 차렸을 법했을 유라였지만, 그녀는 지금 완전히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시카르의 볼을 꼬집었다.

16549787442086.png“요즘 말 잘 들어서 봐준다.”

그 한마디를 던지고는 고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시카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유라에게 꼬집힌 제 볼을 만졌다. 그가 어이가 없는 것은 유라의 주사가 아니었다. 유라가 주사를 부리고 있음에도 그녀가 귀엽게 느껴지는 자신이었다.

16549787442102.png“건방지긴.”

시카르는 뱉은 말과는 다르게 흐뭇한 웃음을 머금으며 잠든 유라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늘 밤도 그는, 그녀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잠들 것이었다. *** 다음 날, 신전 전체에 로엔이 마법사와 첫 키스를 나누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제르미는 로엔의 애인을 보러온 신관들로 인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로엔은 생각지도 못하게 대신전 내에서 노래하는 치유사로 너무나 유명한 상태였다. 두 사람을 보러온 신관들로 인해 제르미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밥이 더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들 때문이었다.

16549787442121.jpg“불쌍한 남자 한 명이 로엔이라는 마신에게 코가 꿰었군요.”

16549787442121.jpg“앞으로 레페르의 축복이 부디 로엔으로부터 제르미 님을 지켜 주시기를.”

16549787442121.jpg“로엔, 너 어제 한 남자의 인생을 망쳤다며?”

등등의 말을 하고 지나갔기에 제르미는 난처한 기색으로 거의 접시에 얼굴을 처박듯이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되도록 조용히 밥을 먹고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으려던 때에 로엔과 친해 보이는 신관 몇 명이 식판을 들고 옆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16549787442121.jpg“안녕하세요. 제르미 님! 듣던 대로 미남이십니다!”

넉살이라면 저도 어디서 빠지지 않는 성격이라 자부했던 제르미였지만, 신관들의 넉살은 당해낼 재간이 없는 듯했다. 그가 따로 소개를 하지 않아도 로엔의 동료들은 이미 제르미의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키스한 것도 알고 있는데, 하긴 이름까지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긴 했다.

16549787474996.png“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고 불편한 인사를 끝내고 나니 낯뜨거운 대화들이 들려오는 바람에 제르미는 스푼을 들다 말고 내려놓았다.

16549787442121.jpg“로엔. 첫 키스 성공한 기념으로 한 턱 내야지.”

동료가 실실 웃으며 말하자 로엔이 방긋거리며 대답했다.

16549787475005.png“그래. 좋아.”

16549787442121.jpg“정말?”

로엔은 자신의 식판에 있는 빵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16549787475005.png“자, 내 빵 네가 먹어.”

제르미는 과연 저 빵 하나로 한 턱 내라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한턱내라고 제안했던 신관은 놀란 듯 물었다.

16549787442121.jpg“정말 이걸 나 주는 거야?”

16549787475005.png“싫으면 말고.”

그제야 동료는 로엔의 빵을 냉큼 집어 들었다.

16549787442121.jpg“아, 아니야! 잘 먹을게. 로엔. 고마워!”

평소에 제 것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빵 하나를 건네는 것은 큰 선물이었다. 신관들은 로엔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16549787442121.jpg“로엔이 빵을 양보하다니…….”

16549787442121.jpg“로엔, 너 괜찮아? 꿈에 그리던 애인이 생겨서 너무 충격먹은 건 아니야?”

아직 순례도 한 번 나가본 적 없이 신전 내에서만 지낸 탓인지 신관들은 마치 개구쟁이 아이들 같았다. 신관들은 식사를 끝내며 로엔과 제르미의 앞날에 대해 축복했다. 물론 제르미는 그것이 정녕 축복의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16549787442121.jpg“앞으로 로엔의 마수에서 꼭 살아남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16549787442121.jpg“제르미 님의 가시밭길 같은 사랑에 축복을.”

제르미는 로엔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농담으로 듣는 듯 웃어넘기는 것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16549787442121.jpg“참, 로엔 너 순례길에 같이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

16549787442121.jpg“맞아. 돌아오는 추수감사절에 순례길에 오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16549787442121.jpg“이제 애인이 생겼으니 순례는 안 하는 거 아니야?”

16549787442121.jpg“그럼 나한테 양보해. 네 대신 내가 가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시시 웃던 로엔의 안색이 싸하게 변했다. 그녀는 주먹을 테이블 위로 살짝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49787475005.png“내가 순례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해?”

16549787442121.jpg“그럼 제르미 님은 어떡하고?”

그러자 옆에 있는 신관도 매우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16549787442121.jpg“맞아. 사귀자마자 순례를 떠나는 건 만나자마자 이별과 똑같지.”

신관들은 로엔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해했지만, 대답은 로엔이 아닌 제르미에게서 들려왔다.

16549787474996.png“저도 같이 순례길에 동참할 생각이니 괜찮습니다.”

신관들도 모두 놀랐지만, 가장 많이 놀란 건 다름 아닌 로엔이었다.

16549787475005.png“저, 정말요?”

16549787474996.png“네. 마침 저도 세상을 좀 주유해볼까 하던 차에 잘 됐습니다. 순례길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함께하면 좋겠죠.”

동료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했던 로엔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그가 충동적으로 꺼내는 말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16549787475005.png“제르미 님. 진심이에요? 혹시 충동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16549787474996.png“로엔 님께서 어제 제게 하신 말씀은 진심이 아니고 충동적인 것이었습니까?”

로엔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당연히 자신은 충동적인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16549787475005.png“당연히 아니죠. 전 결코 충동적인 게 아니었어요.”

제르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49787474996.png“저도 그렇습니다.”

그제야 로엔은 제르미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라는 걸. 옆에 있던 로엔의 신관 동료들은 일순 입을 쩍 벌렸다가 누군가 옆 사람을 툭 치자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장난기가 도진 듯 말했다.

16549787442121.jpg“로엔과 함께 순례를 다니는 순간 자유는 끝이라고요. 그래도 정말 가겠다고요?”

이내, 내 뱉은 제르미의 말 한마디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보는 신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16549787474996.png“괜찮습니다. 전 로엔 님에게 꽉 잡혀 살 생각이거든요. 구속이 좋아서요.”

신관들은 겉으론 말하진 않았지만, 로엔이 남자 하난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로엔이 제르미에게 반한 건 바로 이때였다.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

16549787442102.png“속은 괜찮나?”

물론 속은 괜찮았다. 시카르를 볼 낯짝이 안 서서 그렇지. 하필 어제의 기억이 고스란히 모두 다 나는 바람에 시카르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16549787442102.png“운이 좋았다. 마침 오늘 식사로 스튜가 나왔더군. 어제 주사 부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먹고 해장해.”

차라리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될 것을, 그동안 시카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더 좌불안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뜨끈뜨끈한 스튜를 먹으니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식사를 다 끝내고 나자 시카르는 말없이 식기를 들고 나갔다. 이렇게까지 말이 없었던 적은 없었는데, 화가 많이 난 걸까. 시카르가 식기를 두고 올 때까지 나는 얼른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이었다. 처음엔 시카르와 매일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져 있던 차에 이곳을 떠나려니 못내 아쉬웠다. 예배시간마다 어김없이 울리는 종소리도, 예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뛰어다니는 신관들을 보는 일들도, 블레이크로 돌아가면 무척이나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다시 짐을 하나하나 챙기고 있으니 시카르가 밀크티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밀크티를 꼬박꼬박 챙겨주고 있었다.

16549787442102.png“이미 키안은 출발할 준비가 모두 끝냈더군. 우리도 이 차만 마시고 일어나야 할 것 같다.”

16549787442086.png“참, 로엔님과 제르미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지.”

16549787442102.png“어차피 언젠가 다시 볼 사람들이니 그때 본래 신분으로 인사를 다시 하는 게 좋겠지. 그러니 이번엔 그냥 가도록 하지.”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차후에 우리 신분을 알려주고 그때 정식인사를 나누는 것이 낫겠지.

16549787442086.png“그래. 그렇게 해.”

16549787442102.png“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시간이 나는 대로 또 오면 되니까.”

짐을 모두 챙기고 나오자 할머니와 키안이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안은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를 외치며 뛰어오려다 멈칫하고는 점잖게 걸어와서 배꼽 인사를 올렸다.

16549787558125.png“어머니. 어제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나는 안아 달라는 듯 키안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16549787442086.png“글쎄. 우리 키안이 보고 싶었던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16549787558125.png“저도 그랬어요. 어머니!”

키안은 화들짝 웃으며 내 품으로 폴싹 안겼다. 시카르는 등 뒤에서 저와 있을 때는 어른인 척 굴면서 나와 있을 때는 다시 애가 된다며 툴툴거렸지만, 내 귀에는 그래서 서운하다는 투로 들렸다. 요즘 이곳에 와 있는 동안 내가 직접 키안을 재우지 않아서 그런지, 키안의 키가 조금 더 커 있는 느낌이었다.

16549787442086.png“응? 키안. 왠지 그새 조금 더 자란 것 같은데?”

16549787558125.png“어서 더 자라서 제가 어머니를 지켜드릴게요.”

키안의 늠름한 대답에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키안와 나는 깊은 포옹을 끝내고 이어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16549787442086.png“할머님. 하필 저희가 봉사 기간에 와서 할머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16549787585877.png“그게 무슨 소리냐. 우린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단다. 그리고 이번엔 매일 밤 키안과 함께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키안은 할머니의 다리를 감싸 안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16549787558125.png“저도요. 증조할머니. 블레이크에 가더라도 할머니의 냄새는 잊지 못할 거예요.”

할머니는 괜찮다고 하시면서도 많이 아쉬우신지 눈시울을 조금 붉히며 말씀하셨다.

16549787585877.png“원, 영영 작별하듯이 말하는구나.”

이렇게 헤어지려니 코끝이 찡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와 함께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저 몹쓸 병이 얼른 나아서 할머니와 블레이크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차례대로 할머니와 작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할머니는 시카르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이셨지만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우리에게 잘해주라고 거듭 당부하셨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우리도 마차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발길을 돌리면서도 나는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치매가 완쾌된 할머니와 함께 나갈 수 있기를 조용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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