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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잠시만, 안녕 (1) (73/197)

73화. 잠시만, 안녕 (1)2022.02.10.

아쉬운 마음으로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니, 제르미와 로엔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제르미가 로엔에게 끌려오는 것이 보였다.

16549787659182.png“어, 어! 제르미 님! 로엔 님!”

로엔은 헉헉거리며 뛰어와서는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16549787659189.png“헉…… 힘들어…… 오, 오늘 가시나 봐요?”

16549787659182.png“네. 설마, 로엔 님께서 저희를 배웅 나오신 건가요?”

16549787659189.png“아니요. 저희도 오늘 떠나요!”

16549787659182.png“네?!”

16549787659189.png“오늘부터 순례를 떠나게 됐거든요. 유라 님 덕분에 여기 제르미 님과 함께 가게 됐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제르미를 슬쩍 보자 제르미는 민망한 듯 고개를 조금 돌리며 말했다.

16549787659213.png“그렇게 됐습니다.”

16549787659182.png“정말 잘 됐어요!”

유라는 나한테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16549787659189.png“덕분에 첫 키스의 꿈도 이뤘어요. 유라 님.”

나는 풉-하고 웃음이 나오는 걸 손으로 살짝 가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16549787659182.png“아름다운 추억을 쌓으신 걸 축하드려요.”

16549787659189.png“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참, 어제 술을 좀 드신 것 같던데 오늘 배식이 수프와 빵만 나와서 어떡해요. 속은 괜찮으세요?”

16549787659182.png“스튜가 아니라 요……?”

로엔은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6549787659189.png“스튜라니요?”

시카르를 쳐다보니 그는 흠칫하는 얼굴로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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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로엔에게 물었다.

16549787659182.png“오늘 정말 빵만 나왔다는 말이죠?”

16549787659189.png“네. 왜 그러세요?”

16549787659182.png“아, 아니에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로엔 님.”

16549787659189.png“별말씀을요. 그럼 기약 없는 만남을 고대하며 저희는 이만 작별할까요?”

16549787659182.png“어, 그럼 혹시 가시는 방향이 같으면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마침 저희 마차에 두 분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요.”

16549787659189.png“아니, 됐어요. 저희는 걸어 다닐 생각이거든요.”

16549787659182.png“아. 네…….”

16549787659189.png“그럼 다음에 또 만날 날을 기약할게요. 신의 가호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16549787659182.png“신의 가호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로엔은 별다른 짐도 없이 제르미의 팔짱을 끼고 껑충껑충 뛰어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고서도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원작과는 달리 두 사람이 해피엔딩을 맺길 바라는 마음으로. *** 블레이크로 오는 동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안에게 악몽을 꾸지는 않았냐고 물었지만 키안은 예전엔 악몽을 종종 꿨지만, 이제는 설산의 늑대에 쫓기거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은 꾸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시카르에게 이제 키안이 괜찮은 거지? 말하듯 물었고 시카르는 그런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설마, 하는 마음도 들었다.

16549787659182.png“키안. 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닌 거지?”

16549787720162.png“네. 어머니. 정말이에요. 언제부턴가 나쁜 꿈을 꾸지 않게 됐어요.”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키안은 졸리는지 무겁게 내리깔린 눈꺼풀을 자꾸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키안이 너무 귀여웠지만, 그럴 땐 낮잠을 재워야 했다. 시카르를 불러 키안을 안고 있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얼른 눈치를 채고 내가 부르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키안을 품에 안았다.

16549787720165.png“너도 좀 자는 게 어때.”

16549787659182.png“숙취가 좀 풀려서 난 괜찮아. 근데, 스튜는 어떻게 구했어?”

갑자기 시카르의 얼굴이 붉게 타는 듯 붉어지더니, 그는 내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16549787720165.png“뭐, 돈 주니까 해주더군.”

16549787659182.png“근데 왜 배식에서 나왔다고 한 거야?”

시카르는 정말 모르겠냐는 듯 나를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16549787720165.png“네 버릇 나빠질까 봐.”

오늘 운이 좋아서 스튜를 먹게 된 게 아니고 시카르가 날 위해 스튜를 준비했다는 걸 내가 알면, 그거 믿고 툭하면 술을 마실까 봐 그랬다는 건가.

16549787659182.png“고마워. 덕분에 속이 편하긴 하네.”

16549787720165.png“다음엔 안 해줘. 그러니 술을 마셔도 적당히 마셔.”

서늘한 눈빛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귀는 벌게져 있었다. 마음은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감정전달에 서툴다 보니 그런 거겠지. 다른 곳을 응시하던 시카르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16549787720165.png“어제 네 술주정에 제대로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하군. 가는 길에 난 낮잠을 좀 자야겠다.”

진짜 잠이 와서 잔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를 보니 또 가슴속으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 듯 설레었다. ***

16549787749202.jpg“이게 얼마만입니까. 공작님, 마님!”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안드레아를 비롯한 하인들이 나와 우리를 맞이하며 가져온 짐들을 옮겼다.

16549787720165.png“잘 지냈는가. 안드레아.”

16549787749202.jpg“네. 저희는 잘 지냈습니다.”

16549787720165.png“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별일은 없었겠지?”

16549787749202.jpg“저, 그것이…….”

안드레아는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며 키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키안의 눈치를 보는 거지. 시카르도 안드레아의 행동을 눈치챘는지 키안을 먼저 들여보냈다. 안드레아는 키안이 완전히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16549787749202.jpg“도련님의 친아버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듀리온 기사님과 비카 집사님께서 공작님이 오시는 대로 설산 초입으로 오시라고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드디어 발리제를 찾았구나…….

16549787720165.png“알았다. 비카가 없으니 안드레아가 가서 소공자를 좀 봐주게.”

16549787749202.jpg“네. 공작님.”

발리제를 찾은 건 정말 다행한 일이었지만 마음 한편이 너무 무거웠다. 시카르는 내 낯빛이 어둡게 내려앉은 걸 느낀 모양이었다.

16549787720165.png“키안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하겠다.”

16549787659182.png“내가 할게. 바로 입이 안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키안이 내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16549787720165.png“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테니, 힘들면 오늘은 쉬고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해도 된다.”

16549787659182.png“아니야. 오늘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 키안은 책임감이 강한 아이잖아. 겉으로 내색 않고 있어도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발리제의 주검이라도 잘 거두어야 키안의 부채감이 덜어질 테니 오늘 바로 출발하도록 해.”

시카르는 돌아서는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돌아보자 그는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16549787720165.png“힘내라.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내가 아는 그 시카르가 맞나 싶을 만큼 따뜻한 말이었다. 나는 시카르를 향해 미소를 한번 지어주곤 키안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키안은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가 옷장 안으로 넣었다.

16549787659182.png“응? 키안. 방금 그건 뭐야?”

16549787720162.png“아, 이거 증조할머니께서 주신 거예요.”

16549787659182.png“아. 그렇구나.”

그게 뭔지 궁금했지만, 나는 키안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궁금해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부터 꺼내야 될 얘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정신이 까마득해져서 키안에게 말해줄 것들을 한 번 더 생각해야 했다.

16549787720162.png“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

말똥말똥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저 맑은 눈망울을 보니 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 앞 의지가 아닌, 침대에 걸터앉았다.

16549787659182.png“키안. 이리로 와서 앉아볼래?”

키안은 무슨 말인지 궁금한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침대에 따라 앉았다.

16549787720162.png“말씀하세요. 어머니.”

16549787659182.png“키안 그러니까…….”

키안은 이미 내게서 불길한 말이 나오는 것을 예상한 듯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키안의 작은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16549787659182.png“키안. 놀라지 말고 들어줘. 알았지?”

키안은 나를 보며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87659182.png“키안……. 네 아버지이신 발리제 타히곤 님을 찾았어.”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안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 커졌다. 키안은 갑자기 뭔가 다급해진 듯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16549787720162.png“어, 어머니! 혹시 제 아버지가 살아 계신 건가요?”

제 아버지가 살아 있냐고 묻고 있었지만, 키안의 표정엔 일말의 기대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머뭇거리며 말을 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겠지.

16549787659182.png“키안…… 발리제 님께선 하늘의 별이 되셨어. 하지만…….”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키안을 보며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소리 내어 울어도 될 텐데 키안은 소리 없이 숨죽이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서 나는 키안을 끌어안았다. 이미 발리제가 실종되는 순간 키안도 제 아비가 죽었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종이란 것이 죽음을 확정시키는 것이 아니었기에 죽음이란 말이 온전히 현실로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내게서 발리제의 죽음을 확인시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제 아비의 죽음이 어느 정도 현실로 다가온 것일 테지. 마음 편히 펑펑 울지 못하고 눈물을 참기 위해 꾹꾹 담아 누르며 울고 있는 키안을 보고 있으니 너무나 안쓰러웠다. 꺽꺽거리며 울음을 참아내던 키안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16549787720162.png“그, 그……럼, 아버지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어머니.”

16549787659182.png“설산에 계시다고 해. 비카 님과 듀리온 님이 곁을 지키고 계신 것 같아. 키안 너만 괜찮으면 오늘 갈까 하는데, 넌 어떠니?”

16549787720162.png“가, 가요! 어머니! 당장 가서 아버지를 보고 싶어요!”

16549787659182.png“그래. 어서 출발하자꾸나.”

키안을 방에서 데리고 나오자 시카르는 하인들을 시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안드레아는 오랜만에 돌아온 우리가 이런 일로 다시 공작저를 비우게 된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16549787749202.jpg“가시는 곳이 설산이라 하셔서 두툼한 외투를 마차 안에 함께 준비해두었습니다. 공작저를 잘 지키고 있을 테니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님.”

16549787659182.png“안드레아. 수고좀 해주세요.”

16549787749202.jpg“네. 마님.”

우리는 하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마차에 올랐다. 돌아올 때의 편안함과는 달리 다시 마차에 올랐을 때는 단 한마디도 나눌 수가 없을 만큼 침울하기만 했다. 설산이 다가올수록 기온이 점차 내려갔다. 나는 안드레아가 준비해둔 두툼한 외투를 꺼내 키안에게 먼저 입혔다. 키안은 조용히 말없이 외투를 입고 시카르도 외투를 챙겨 입으며 나에게 외투를 입혀주었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설산에 가까워질수록 해는 점점 산마루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설산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해가 백색의 산 너머로 저물고 어둠만이 짙게 내려앉았다. 마차는 저 멀리 보이는 한 줌의 빛을 향해 어둠 속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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