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잠시만, 안녕 (2)2022.02.14.
설산 초입에는 횃불을 들고 선 병사들과 비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에 마차가 보이기도 전에 이미 비카는 마차 소리를 듣고 공작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공작이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먼저 배웅을 나가 공작 내외를 맞이했다. 평소의 냉소적이기만 하던 비카의 표정도 오늘은 꽤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마님.”
“이 추운 곳에서 저희를 기다리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올라가시죠.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길이 가파르니 도련님은 제가 안고 올라가겠습니다.”
키안은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설산이 한없이 낯설다는 듯 천천히 산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올라갈 수 있어요.”
키안은 자신이 스스로 걸어가려 했지만, 산길이 험준하다는 이유로 시카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키안은 비카의 품에 안겨서 설산에 올랐고 길이 미끄러운 탓에 유라는 시카르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 비카는 듀리온이 있는 곳까지 도착한 후에야 키안을 내려주었다. 키안은 듀리온 곁에 있는 관을 향해 발이 푹푹 잠기는 눈길을 걸어갔다. 뚜껑을 열어둔 관 속에는 발리제가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 키안은 넋을 잃은 듯 터덜터덜 걸어갔다. 발리제의 시신은 키안이 살던 오두막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듀리온은 그곳에 임시 막사를 쳐놓고 발리제의 시신을 보관 중이었다. 설산의 냉혹한 추위에 의해 발리제의 모습은 생전 그대로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듀리온은 관 안에 설산의 눈을 넣은 후 그 안에 발리제의 시신을 안치시켜둔 상태였다. 키안은 그제야 제 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본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먼저 일어나 하루 종일 아들인 저를 돌보고 난 후에야 잠을 청했던 아버지. 눈을 감고 있는 발리제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키안은 잠이든 발리제의 시신 앞으로 걸어가 그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얼굴을 만졌다.
‘아빠…….’
체온은 차갑게 식어 있고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저를 지키려 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평생을 이 설산에서 저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 죽음을 맞이했던 제 아비의 주검 앞에서 키안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울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닭을 구하기 힘든 설산에서 오직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렵게 닭을 구해와서 닭고기 수프를 곧잘 만들어 주었던 아버지. 친구가 없는 저를 위해 집 앞마당에 눈사람을 만들어 주고, 키안을 위해 설산의 흰 토끼와 흰 다람쥐를 잡아 왔던 따뜻하고 다정했던 아버지. 키안은 목놓아 울며 제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아빠……!”
어린 키안이 목놓아 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라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한없이 슬피 우는 유라의 어깨를 나직하게 다독여 주었다. 시카르는 제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울부짖는 키안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리고 나약해서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전철을 키안이 그대로 밟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괴물 공작이 되었지만, 키안은 그렇게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시카르는 천천히 다가가 울부짖는 키안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주었다. 유라도 곁으로 다가와 키안의 손을 잡아 주며 함께 울었다.
키안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설산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을 울다 지친 키안이 잠에 들자, 시카르는 키안을 임시 막사로 데려가 눕히며 유라에게 말했다.
“발리제의 시신은 일단은 이곳에 둬야 할 것 같다. 설산을 벗어나면 시신이 부패할 테니까. 베로니아도 발리제를 봐야 할 것이고, 키안이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면 그때 발리제를 왕궁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는 부마로서 왕궁에서 잠들 자격이 있으니까.”
유라는 아직 촉촉해진 눈시울로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해.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아. 키안도 알겠다고 할 거야.”
“혹시라도 길리언이 찾으면 곤란하니 오늘 밤중으로 발리제를 묻으라고 하지. 키안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발리제의 무덤 앞에서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고마워. 부탁할게.”
“그러니 이제 너도 눈 좀 붙여. 오늘 한숨도 못 잤으니까.”
육신의 피로보다는 오늘 하루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던 유라였다. 하지만, 그녀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나도 듣고 싶어. 발리제 님의 시신은 어떻게 찾은 건지 말이야.”
“그래. 같이 가자.”
막사를 나온 시카르는 먼저, 병사들에게 지시해 발리제의 시신이 담긴 관을 눈 속에 묻게 명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라는 착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눈 속에 시신을 묻는 일은 땅속에 묻는 일보다도 수월했기에 작업은 빨랐다. 설산의 눈은 녹지 않으니 그 누구라도 발리제가 묻힌 곳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을 끝내고 모두 따듯한 화로를 피워둔 임시막사로 들어갔다. 시카르는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키안이 있는 막사가 아닌, 비카와 듀리온이 있는 막사로 들어왔다.
“발리제의 시신은 언제 찾은 건가?”
화로 앞에서 손을 쬐던 비카는 무심한 눈으로 말했다.
“이틀 전에 수색대의 연락을 받았어.”
“그랬군. 그 외 별다른 일은 없었고?”
비카는 네가 말하라는 듯 듀리온의 발을 툭 쳤고, 듀리온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수색대가 폐왕의 잔당들도 찾은 모양입니다.”
시카르와 유라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유라는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몇 년 뒤 시카르가 제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폐왕의 잔당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하지만 그 시기가 원작과는 달리 빨리 찾아왔다.
“폐왕의 잔당이라면……?”
“폐왕의 충복이었던 재상을 찾았다는군요. 재상이 베로니아 공주님께서 낳으신 왕손 저하를 찾아서 반정을 도모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규모가 꽤 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길리언 국왕 전하의 원조가 필요할 듯합니다.”
무슨 소리. 시카르는 정색을 하며 듀리온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국왕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재상은 블레이크가 칠 것이다.”
“하지만 병력 규모가 공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습니다.”
“병사들이야 얼마든 더 증병하면 그만인 것을 괜한 근심은 말아라.”
사실 그런 것들은 이미 유라의 기억에서 봤던 터였다. 원작대로라면 재상을 찾는 것도 몇 년 뒤의 일이었지만, 그녀의 기억에서 단서를 찾아서 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는 재상이 가진 군대의 규모가 더 커지니 빠르면 빠를수록 적기였다.
“그럼 출정은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까.”
실기해도 안 되지만, 당장 떠날 수도 없었다. 국왕의 승인이야 출정부터 한 후에 얻으면 될 터였지만, 키안이 이제 갓 발리제의 시신을 찾은 데다 대신전에서 온 것도 하루도 안 되었기 때문에 유라와 키안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공작저를 지켜야 했다.
“조금 더 준비한 후에 출정해야겠지. 지금으로써는 어수선해진 가정을 돌보는 것이 먼저일 테니까.”
듀리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따르겠습니다. 공작님.”
“비카. 넌 나가서 악몽의 정령이 있나 살피고 제거하도록 해라.”
간이침대에 늘어지게 몸을 기대고 있던 비카는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또?”
“오늘 그런 일이 있었는데 키안과 아내가 악몽을 안 꾸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티끌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제거해.”
물론 비카는 정령의 기척을 느끼는 탓에 금세 찾아낼 수는 있었지만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것도 눈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이 추운 설산에서 일일이 찾아서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비카는 한숨부터 나왔지만, 오늘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꿎은 듀리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듀리온 너도 해. 네 검도 정령을 벨 수 있잖아.”
듀리온은 꼭 저도 같이 가야겠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비카를 외면할 수 없는 탓에 한숨을 푹 내쉬며 비카를 따라 일어섰다. 비카가 일을 안 하면 안 했지, 완벽주의라 맡은 일은 반드시 끝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카르는 안심하고 유라와 함께 키안이 있는 막사로 돌아갔다. 유라는 시카르가 재상을 없애기 위해 언젠간 출정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앞당겨진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하필 이런 때에. 시카르는 유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묻지 않아도 먼저 말했다.
“네 기억을 본 덕분에 재상을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랬구나……. 그냥 갑작스러워서…….”
사실, 처음부터 위장 결혼이었으니 시카르가 갑작스럽게 이렇게 떠난다고 해도 유라가 뭐라 할 권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해댈 뿐이었다.
“잘됐다. 어차피 시간을 끌수록 재상이 군사들만 더 키워갈 테니 일찍 치는 건 잘한 거 같아.”
“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군.”
이해해줘야 할 일이었다. 서운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라는 마음 한편이 아쉽고 서운했다. 그래도 미리 알았다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상황에 당황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추슬러야 할 내 감정의 문제겠지.’
유라는 그 일이 시카르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네게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나 그럼 오늘 심신이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잘게.”
시카르는 유라가 키안의 옆에 누워 잠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리에 누웠다. 오늘 유라는 너무 피곤했지만, 막상 자려고 누워있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하루가 일주일만 같은 날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유라는 모든 것들이 별 탈 없이 흘러가길 바라며 고단해진 눈꺼풀을 감았다. 비카가 정령을 없애 준 덕분에 키안와 유라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한 잠을 취할 수가 있었다. *** 다음 날, 유라는 키안에게 발리제의 시신을 당분간 설산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키안. 내가 반드시 네 친어머니를 찾아주겠다고 했던 약속, 기억하니?”
키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친어머니를 찾게 되면 그분도 발리제 타히곤 님을 보셔야 하잖아. 그리고 발리제 님께서 묻히실 곳은 따로 있단다. 물론 키안이 발리제 님을 이곳에 둘 수가 없다고 한다면 발인을 해야겠지만, 엄마는 때가 올 때까지 발리제 님을 이곳에 안치 해두었으면 하는데, 키안 네 생각은 어떠니?”
유라는 키안이 전적으로 믿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따스한 기운은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온기였다. 키안은 반드시 믿는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어머니. 어머니의 말을 따를게요.”
유라는 제 말을 잘 따라주고 믿어주는 키안이 한없이 고마웠다. 설산까지 많은 식량을 가져올 수는 없었기에 임시막사에서 먹을 수 있는 식량이라고는 말린 빵과 말린 고기와 수프뿐이었다. 이런 식사는 전장에 나갔을 때 간단하게 배를 채우는 군량과도 같았다. 유라는 딱딱한 빵은 키안이 먹기 불편하다고 느껴서 빵을 일일이 수프에 빠트려서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덕분에 키안은 별 불편함 없이 아침을 먹을 수가 있었다. 시카르는 발리제의 시신을 묻어둔 나무 부근에 아무도 찾지 못할 표식을 남겨뒀기에 발리제가 묻힌 곳은 이제 시카르만이 알 수가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하산 준비를 한 뒤에야 키안은 발리제의 무덤 앞에서 제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올렸다.
‘아빠. 또, 아빠를 보러 올게.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자라면 그때는, 반드시 아빠를 데리러 올게. 아빠. 그때까지 외로워도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아빠.’
그리고 키안은 주머니에서 준비해둔 사탕을 꺼내 눈 속에 파묻어 주었다.
‘아빠. 내가 사탕을 심었으니까 나쁜 마귀들이 아빠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편히 있어. 아빠.’
키안의 뒤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유라는 키안이 사탕을 눈 속에 넣어주는 것을 보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키안이 말하지 않아도 아이가 눈 속에 사탕을 넣은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홀로 눈 속에 남겨진 제 아비가 걱정된 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까. 유라가 우는 모습을 보는 시카르는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발리제와 재상까지 모두 찾았으니, 이제 수색대는 오직 베로니아만을 찾아다닐 것이다. 베로니아를 찾아 키안과 만나게 해주고 나면, 반드시의 피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키안과 유라를 울린 그것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시카르는 이를 갈며 유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