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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잠시만, 안녕 (3) (75/197)

75화. 잠시만, 안녕 (3)2022.02.17.

공작저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 시카르는 듀리온을 시켜 병사들을 더 증병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비카에게는 당분간 정령 놀이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다. 키안의 정령 놀이는 자신이 떠나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시카르는 먼저 떠나기 전 침울해진 유라와 키안의 일상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 더 급선무라 생각했다. 설산을 다녀온 뒤로 유라와 키안은 하루 종일 한숨을 쉬거나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안드레아에게 일러 유라가 즐겨 마시는 밀크티를 타는 법을 하녀들에게 확실하게 익히라고 일렀다. 비카에게는 유라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영원히 맹약을 깨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사병들을 더 보강해 공작저의 보안을 더 굳건히 하고 출정을 앞둔 동안 세 식구가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은 무거운 분위기를 완전히 깰 수가 없었다. 결국 시카르는 두 모자의 마음을 환기하기 위해 출정을 이틀 앞두고 레이독스에게 서신을 보냈고, 다음날 레이독스는 쌍둥이를 데리고 곧장 공작저를 찾았다. 시카르의 예상대로 쌍둥이들이 갑자기 집으로 난입한 덕분에 어제의 침울했던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유라는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걸 해준 시카르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공작저를 찾아준 레이독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16549788101275.png“어서 오세요. 후작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16549788101281.png“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부인.”

시카르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서서 레이독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16549788101285.png“어서…….”

오시게. 라고 말하려 했지만, 쌍둥이들 때문에 묻히는 바람에 아무도 시카르의 다음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16549788101289.png“우왓! 공작부인 안녕하세요! 공작부인께서도 데스나이트를 보셨다면서요?! 그거 보고 놀라셔서 키안이 눈을 가려줬다던데, 진짜예요?”

16549788101294.png“루이드! 교양 없게 뭐 하는 거야!”

루시가 루이드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말렸지만, 루이드는 어린아이인 자신뿐 아니라 어른인 공작부인 역시도 데스나이트를 보고 놀랐다는 것에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루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루이드는 저와 같이 겁을 먹은 공작부인이 반가울 뿐이었다. 그래야 어른도 놀란 마당에 어린 제가 놀란 게 이상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루이드는 같은 쫄보라서 반갑다는 듯 유라의 대답을 기다렸고, 유라는 루이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6549788101275.png“맞아. 나 그때 엄청 무서웠어.”

16549788101289.png“우왓! 그쵸 그쵸! 봤지? 키안? 그건 어른들도 무서워하는 거야.”

키안은 그게 뭐 어떻냐는 말이냐는 듯 루이드를 한 번 쳐다보다가 대꾸도 하지 않고 레이독스를 보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16549788101306.png“어서 오세요. 스승님. 오랜만이에요.”

16549788101281.png“그래. 오랜만이구나. 키안은 안 본 사이에 더 의젓해진 것 같은데?”

키안은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고 루이드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카르는 쌍둥이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이들을 당장 쫓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떠올렸지만, 어제와는 달리 환하게 웃고 있는 유라와 키안을 보며 레이독스를 부르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신없는 쌍둥이들과 계속 같이 있다간 정말 쫓아낼지도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비카를 불러 키안과 쌍둥이들을 놀이방으로 올려보내고 난 후 세 사람은 티타임을 가졌다.

16549788101285.png“후. 이제 좀 살 것 같군.”

16549788101275.png“원래 아이들과 있으면 정신이 없는 거야.”

시카르는 얼토당토않는 소리라는 듯 레이독스를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16549788101285.png“일곱 살이나 된 귀족가의 아이들이 저렇게 정신이 없는 건 그 부모 탓이겠지.”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유라를 보며 말했다.

16549788101281.png“저, 그런데 공작부인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16549788101275.png“말씀하세요.”

16549788101281.png“혹시 공작부인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16549788101275.png‘제르미도 그렇고, 왜 자꾸 고향을 묻지?’

물론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유라는 그들이 자꾸만 고향을 묻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뭘 알고 있나 싶은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이 완전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 방법은 없을 터였다. 다행히 유라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시카르가 레이독스를 나무랐다.

16549788101285.png“네깟 놈이 감히 내 아내의 출신을 따져 묻는 건가? 제르미도 그렇고, 둘이 아주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군.”

시카르가 매우 불쾌하다는 듯 대답했지만 레이독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16549788101281.png“출신을 따져 묻는다니. 가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 그저 공작부인의 고향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실례라 생각했다면 안 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16549788101285.png“실례인 줄 알면 됐다. 참, 부인. 후작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유라는 시카르에게 귓속말로 레이독스에게 실수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라가 자리를 비켜주자, 시카르는 레이독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16549788101285.png“폐왕을 모시던 재상을 찾았다.”

레이독스는 조금 놀란 기색을 내 비추었지만,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88101281.png“그렇습니까.”

16549788101285.png“그래서 당분간은 공작저를 비워야 해서 네게 키안과 내 아내를 부탁하려고 한다.”

후작은 단 일 초도 생각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16549788101281.png“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16549788101285.png“너라면 믿을 수 있겠지. 부탁한다. 장차 이 왕국의 주군이 될 키안과 내 아내를.”

시카르에게서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 레이독스는 제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어떤 것도 서슴없던 공작이. 그 무엇도 가소롭게만 보던 공작이. 아내와 자식 앞에서는 약해지는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레이독스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16549788101281.png“제 가족을 돌보듯 왕손 저하와 공작부인을 보필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시카르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었다. 레이독스는 그 누구보다 진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유라와 키안의 곁에 비카와 레이독스가 있다면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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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788101306.png“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어.”

오늘 키안의 얼굴이 침울하다고 놀리던 루이드는 깜짝 놀라서 키안의 얼굴에 낙서를 하려던 것을 멈추고 크레파스를 내려놓았다. 루이드는 제 손을 잡고 꼼지락거리다 키안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16549788101289.png“아빠가 그러는데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친구가 나타나면 손을 내밀라고 했어. 그래서 내미는 거야. 나와 친구 할래? 말래?”

키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루시도 손을 내밀었다.

16549788101294.png“너, 누구 친구 할래? 저 바보와 친구 할래? 아니면 나와 친구 할래?”

둘 중 한 명을 택하라는 소리였기에 키안은 갑자기 갈림길에 선 것 마냥 고민스러웠다. 그러자 루시가 협박하듯 말했다.

16549788101294.png“잘 선택해.”

16549788101306.png‘그래. 잘 선택해야겠지.’

키안은 양손을 모두 뻗어 루시와 루이드의 손 모두를 잡았다. 루이드는 만족스러운 듯 히죽 웃었지만, 루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16549788101294.png“아니. 이건 무효지, 무효!”

16549788101306.png“근데 난 너희 둘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데.”

16549788101294.png“루이드는 바보야. 머리 나쁜 애랑 친구 하면 고생한다, 너?”

키안은 잘 모르겠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16549788101306.png“그런가?”

16549788101294.png“그래. 그래서 내가 늘 고생하잖아.”

곁에 서 있던 비카는 시끄러워서 못 듣겠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16549788188791.png“계속 떠드시면 공작님께 일러서 수련의 방으로 다시 데려갑니다?”

그 말에 쌍둥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 놀이방으로 올라오던 유라는 그 모습을 보고 방긋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공작저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 레이독스와 쌍둥이가 모두 가고 난 후, 시카르는 키안을 슬쩍 불렀다. 키안은 시카르가 자신을 서재로 부른 것이 처음이었기에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서재로 걸어 들어갔다. 시카르는 소파에 앉아 차분히 키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16549788101285.png“왔느냐.”

16549788101306.png“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공작님?”

16549788101285.png“네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다.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16549788101306.png“먼저 들어보고요.”

시카르의 말투는 평소 위압적이던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 그 어조는 조금은 더 부드러워져 있었기에 키안의 말투도 툴툴거리긴 했지만,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16549788101285.png“키안. 난 이제 떠나야 한다.”

16549788101306.png“네?”

16549788101285.png“걱정 마라. 너무 늦게 오진 않을 테니까.”

16549788101306.png“어디 가시는데요?”

16549788101285.png“내 가문을 쇠퇴시키려 했던 원수를 찾아서 그 죄를 묻고 올 것이다. 언젠가 너도 크게 되면 날 이해하겠지.”

16549788101306.png‘원수…….’

키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16549788101306.png“아니요. 지금도 이해해요! 저도 제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서 언젠간 반드시 그 죄를 물을 테니까요!”

16549788101285.png“그건 내가 하주겠다.”

키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16549788101306.png“네?”

내가 너를 반드시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카르는 그 말 대신 키안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16549788101285.png“날 믿을 수 있겠나?”

시카르를 빤히 쳐다보던 키안은 이제 그에게서 차가운 냉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에게서는 아주 옅은 주홍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키안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88101306.png“네. 믿을게요.”

16549788101285.png“키안. 내가 없는 동안 네 어머니를 부탁한다. 그러려면 네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어야 한다. 약속해줄 수 있겠나? 밝고 건강하게 자라겠다고.”

키안은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의 다음을 알고 있었다. 멀리 가거나, 죽거나, 아주 떠나거나 할 때 이런 말들을 했었다. 키안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16549788101306.png“어디, 멀리 가시는 거예요? 아니면 아주 떠나시는 거예요?”

16549788101285.png“난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잠시 멀리 다녀올 뿐이지. 죽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네가 없으니 내 저주의 발현을 막아줄 사람은 없겠지만. 아직은 경미한 발현이니 걱정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니 괜찮다.”

16549788101306.png“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주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16549788101285.png“조금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16549788101306.png“오래요?”

16549788101285.png“그래. 지금 떠나면 일 년이 걸릴지 이 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그동안만 네 어머니를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16549788101306.png“약속할게요. 마음 편히 다녀오세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유라를 걱정시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을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인데다 심정이 여린데가 있었기에 혹시라도 심약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시카르는 미리 키안에게 유라를 부탁한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16549788101285.png“내가 일전에 가정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

16549788101306.png“네. 기억해요. 공작님.”

16549788101285.png“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이 가정을 돌봐야 한다. 그러니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심약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 네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 알겠나?”

16549788101306.png“네……. 공작님이 걱정 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16549788101285.png“됐다. 이제 내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군. 올라가거라.”

키안은 곧장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었기에, 시카르는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16549788101285.png“할 말이 더 있는 것인가?”

16549788101306.png“저…… 감사해요.”

16549788101285.png“무엇이 말이지?”

16549788101306.png“제 아버지의 시신을 찾고 수습해주셔서요.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키안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방을 빠져나갔고, 시카르는 이제야 키안이 저에게 마음을 조금은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내일은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 다음 날 출정 길에 오른 시카르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폐왕을 처단할 때만 해도 언젠가 재상을 잡으면 오직 배신자를 응징하겠다는 독기만 가득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떠나려는 발길이 바윗돌을 매단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반드시 제 손으로 끝을 내야 하는 이 일을 미룰 수 없었다.

16549788101285.png“다녀올게.”

시카르는 아쉬운 얼굴로 보고 서 있는 유라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16549788101285.png“내가 없다고 아무나와 어울려 다니지 말고 항상 몸조심하고 알겠지?”

16549788101275.png“내 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와.”

16549788101306.png“잘 다녀오세요. 공작님.”

작별을 오래 길게 끌고 싶지 않았던 시카르는 옅은 미소를 한 번 지어준 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말에 올랐다. 힘차게 박차를 가하는 시카르의 발길질에 말이 재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유라와 키안은 아침 해를 향해 달려가는 시카르를 보고 서 있었다. 유라는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시카르가 처음으로 직접 사 왔던 반지를 만졌다. 어젯밤, 시카르를 배웅하며 이 반지를 낄까 말까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 반지였다.

16549788101275.png‘내가 이 반지를 끼고 있는 것도 몰라보고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저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건지.’

유라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반지를 계속 만지작 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시카르가 방향을 돌려 다시 달려왔다. 그러곤 유라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16549788101285.png“참, 너 어젯밤에 그 반지를 낄까 말까 고민했더군? 잘 꼈어. 잘 어울리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절대 빼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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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는 다시 박차를 가하며 말을 돌리며 떠났다. 유라는 조금 전 아리던 마음이 다시 두근거리며 설레 오는 것을 느끼며 해를 향해 달리는 시카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16549788101275.png‘부디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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