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잠시만, 안녕 (4)2022.02.21.
투항하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재상은 순순히 항복하지 않고 악마와 피의 계약까지 맺으며 블레이크에 맞섰다. 원작에서는 전투가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시카르는 예상치 못하게 마물의 규모가 컸던 군대에 맞서 5년이 넘게 싸워야 했다. 이번엔 내 기억을 읽고 갔으니 전투가 원작만큼은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전이 빠르지도 않을 것이다.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아니면, 원작처럼 5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시카르는 우리의 안위를 생각해서 비카는 출정에서 제외하였다. 이 큰 공작저에 이능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와 어린 키안을 두기에는 염려가 많이 되었겠지. 비카는 내게 공작저의 열쇠꾸러미를 건네주며 말했다.
“공작이 전해드리라 하더군요. 이제 이 공작저는 마님께서 총관하셔야 한다면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비카는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참, 그리고 이건 금고 열쇠에요. 금고 안에 보석이며 금이며 각종 귀금속들이 있으니 마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시라는 군요. 그래야 공작이 없어도 울적해하지 않으실 거라면서요.”
일단 나는 열쇠는 받아 들며 말했다.
“울적해 한다라… 공작님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전 전혀 울적하지 않은데 말이죠.”
하지만 비카는 내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듯 제 볼을 긁적였다.
“눈꼬리가 축져 있고 시야는 초점이 흐리고 눈동자에는 영, 빛이 없는 걸 보니 울적하신 게 맞는 같은데.”
발리제의 죽음부터 출정까지. 연이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시카르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탓도 있었을 테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을 좀 팔았더니 그렇게 보였나 봐요.”
“공작이 없는 동안은 제가 보좌 해드릴 테니 앞으로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비카님.”
“마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귀가 밝은 데다 마님의 방엔 방음 마법을 걸지 않았으니 방에서 절 부르기만 해도 제가 곧장 찾아갈 수 있죠. 그러니 절 찾으실 땐 하인을 부르는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네.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나는 돌아서려는 비카를 보다가 마침,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려던 말이 떠올랐다.
“저, 비카님.”
내 부름에 돌아서려던 비카가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네?”
“한가지 여쭙고 싶은데 있어서 그런데 혹시 고마워. 라는 말과 비숫한 발음이 나는 언어가 있나요?”
“비슷한 언어요?”
“네.”
“그런 게 뭐가 있지?”
비카는 고민하듯 조금 더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혹시, 쿠마마인가?”
“쿠마마요?”
“엘프어인데, ‘내 영혼을 가져라.’ 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예요?”
그게 그런 뜻이었어? 그래서 얼굴을 붉혔던 거였어. 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조금 피식거려서인지 나를 물끄러미 보던 비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아, 별일 아니에요. 누가 그 말을 그렇게 오해했나 싶었거든요.”
그러자 비카는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더니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제법 빨랐다.
“비카님? 갑자기 뭘 하시는 거죠?”
“아, 공작이 마님께서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싶은 건 모두 편지에 써서 보내라고 했거든요.”
“비, 비카님?! 그런 건 안 써도 돼요!”
“죄송하지만, 마님. 이건 제 업무이기도 해서요.”
하긴. 시카르 성격에 비카가 제 명을 어겼다 싶으면 어떤 식으로든 비카를 괴롭히겠지. 비카의 팔이라도 붙잡고 말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들을 비카도 아니었고 어차피 다 들켜버릴 기억일 뿐이었으니까.
“그럼 이만.”
나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비카를 불러 세웠다.
“저, 비카님!”
비카는 또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게 아니라. 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요. 비카님께서 악몽의 정령들을 없애 주신 덕분에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간 정말 고마웠어요. 비카님. 이 말을 진작 전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비카는 전혀 감동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시차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평온하고도 무감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죠.”
“아. 네. 그, 그렇죠.”
비카는 이제 진짜 올라가 보겠다며 몸을 돌렸지만, 그때 안드레아가 거실로 들어왔다.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드레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다르게 평정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지.
“안드레아. 무슨 일이시죠?”
“왕실의 근위대가 찾아왔습니다.”
시카르가 떠나자마자, 근위대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당황한 얼굴로 비카를 쳐다보자 비카는 인상을 구기며 안드레아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야?”
“왕후 전하께서 마님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왕후께서 무슨 일로 우리 마님을찾으신다는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왕후 전하께서 친히 보내신 마차가 지금 전정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그래? 왕후가 친히 보낸 거라면 안 갈 수가 없겠지. 곧 내려간다고 전해.”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비카의 표정엔 날이 서 있었다. 그녀도 시카르가 출정을 나간 지금 왕후가 나를 찾는 이유가 개운치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왕궁에서 친히 왕실 마차도 보낸 터이기에 입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왕후는 나를 접빈실로 불러들였다. 비카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언제든 자신을 불러라고 일러주었다. 시녀들의 안내를 받고, 아무도 없는 접빈실에 앉아 있다 보니 왕후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걸어와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공작부인.”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전하.”
“오늘 공작님께서 출정을 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부인께서 오늘 많이 적적하실 듯해서 이리 불렀습니다. 불편한 건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불러주셔서 영광일 뿐입니다.”
왕후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공작님께서 헤르시아를 구해주신 일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드리고 있어요.”
“할 일을 해야 한 것뿐인 걸요.”
“그 일 덕분에 전하께서도 공작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진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블레이크 공작부인.”
“네. 왕후 전하.”
“저도 공작부인과 잘 지내고 싶군요.”
“언제든 전하의 부름을 기다리겠습니다.”
“헤르시아가 말하길 공작부인께서 예법에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운 분이라고 하더군요. 내게도 그렇게 왕실 예법을 차릴 필요 없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후 전하.”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왕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찻잎들이 담긴 유리병을 밀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전하.”
“공작부인께서 식후에 매일 밀크티를 즐겨 드신다죠? 그래서 최고급 밀크티를 준비해봤어요. 제 성의니 받아주세요.”
“황공합니다. 전하.”
“그냥 고맙다고 하세요. 그 편이 훨씬 더 편하니까.”
“그래도 제가 어찌 감히…….”
“이곳에 있으면 다들 예법만 중시해서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공작부인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미처 전하의 심증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부인께서는 타국에 와서 힘든 건 없으신가요?”
타국이라 불편한 게 아니라, 이세계라 불편한 것들이 있긴 하지. 하지만, 나는 괜찮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국왕전하의 은혜에 힘입어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는 왕이 자비롭다라...
“전하의 자비와 은혜에 블레이크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전하.”
“블레이크 공작님은 뭐랄까. 말 한마디 붙이기조차 힘든 분인데 공작부인은 정말 공작님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공작님께서 비록 겉으로 차가워 보이긴 하시지만, 따뜻한 구석도 있는 분이시죠.”
왕후는 일순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가 손으로 다시 제 입을 감쌌다.
“공작을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아마 공작부인 밖에 없으실 겁니다.”
그리곤 몇 마디 더 웃고를 손에 차를 들었다.
“드시죠.”
“네. 왕후 전하.”
접빈실에서 조금 더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눈 후에 왕후궁에서 나오자 불만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서 있는 비카가 보였다.
“어. 비카님. 아직 이곳에 계셨어요?”
“더 멀리가면 두 분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죠.”
“아직 밤이슬이 쌀쌀한데, 춥지는 않으셨어요?”
“조금 추웠긴 해도 이 정도는 견딜만 해요. 일단 드릴 말씀이 있으니 어서 마차에 오르시죠.”
“네. 그러죠. 비카님.”
우리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비카는 마차를 출발 시키며 말했다.
“왕후가 차를 줬다고요?”
“아. 네. 이거예요.”
나는 왕후에게서 받은 차가 든 유리병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비카는 그것을 냉큼 손으로 가져갔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네? 왕후 전하께서 제게 준 차를 비카님께서 이걸 왜?”
비카는 유리병 안에 담긴 찻잎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독의 꽃인지 모르니까요.”
“네? 독의 꽃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독의 꽃이라고 천 번을 우려 마시면 독에 중독됐는지도 모르게 죽는 그런 꽃이 있어요. 독살을 당해도 티가 나지 않는 꽃이죠.”
“아, 일전에 듀리온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천 일 동안 천 번을 우려먹을 수 있는 꽃이라고요.”
비카는 입을 쩍 벌리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그 바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죠. 천 일 동안 천 번이 아니라, 이 독의 꽃은 천 번을 우려내야 독성이 발현돼요. 하지만, 그렇게 천 번을 우려내는 동안 냄새가 심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죠. 인적이 없는 한 적한 곳에서나 우려낼 수 있겠죠. 그렇게 천 번을 우려내게 되면 완벽한 독초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홍차처럼 만들어 버리면, 이게 독의 꽃인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걸 한 번만이라도 마시게 되면 천일 뒤에 죽게 됩니다. 하지만, 사후 일주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시신에 그 어떤 독살의 징후도 나타나지 않죠. 그런데 대부분의 시신은 일주일이 지나면 독살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단순 심장마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 독의 꽃에 중독된 건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있는 거죠?”
“설산에서는 시신이 부패하지 않으니 그곳에서 확인이 가능하죠.”
그런 꽃이 다 있다니. 어차피 비카가 아니었다고 해도 일전에 시카르가 자신이 주는 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받지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어차피 장식장에나 두려고 했던 차였다.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비카님의 뜻 잘 알았어요. 그 차는 결코, 마시지 않을게요.”
“마님의 신변에 털끝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공작이 절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고 갔으니, 앞으로 제 말을 잘 따라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뚝뚝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비카가 고마웠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꼭 그럴게요. 비카님.”
비카는 내 웃음이 부담스럽다는 듯 미간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성격이 저러니 시카르와 잘 지낼 수 있었겠지. 성격이 저렇게 무뚝뚝해도 나와 키안을 위해 애를 많이 써준 비카가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내가 저를 마음에 들어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