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부자의 계략 (1)2022.02.24.
며칠이 지나자,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시카르로 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은 기대 이하이다 못해 너무나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난 잘 도착했다. 레인독스와 너무 가깝게 지내면 그놈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될 것이다. 내가 네 기억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을 늘 유념하고 항상 처신에 신중하라.] ……이게 끝이야? 하지만 아무리 편지를 뒤집어 보고 봉투를 뒤져봐도 다른 내용은 없었다. 편지가 도착했다고 해서 한껏 기대했더니…… 대체, 난 뭘 기대한 걸까. 시카르를 무서워 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아는 사람이라곤 시카르 뿐이어서 인지 그가 떠난 후에 나는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했는지를 깨달았다. 어쨌든 나는, 그가 없는 동안에도 처신을 잘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제로 처신을 잘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 비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따라 다녔기에 처신을 잘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기껏 갈 수 있는 곳이라 봤자 레이독스의 후작저가 전부였다. 비카는 가끔 나를 수련의 방으로 안내했지만, 그곳은 내가 갈 곳이 못 되었다. 헤르시아는 틈만 나면 공작저로 놀러와서 그녀와는 꽤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고,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시카르가 돌아온다는 서신이 도착했다. *** 나는 메이리를 불러 그동안 꽤 많이 자란 머리를 정돈시켰다. 시카르의 귀환 소식에 공작저의 하인들도 모두 한껏 들떠 있는 눈치였다. 메이리는 내 머리를 땋아주는 동안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마님. 저는 공작님께서 대승을 거두고 올 걸 알고 있었어요!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죠!”
“그랬어?”
“그럼요! 당연하죠!”
모두가 들떠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시카르를 다시 만나게 된 탓에 나도 조금은 들떠 있었는지 오늘은 종일 마음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키안은 꽤 많이 자라 있었고 왕세자 수업도 착실히 받아서 예전에 그 어리기만 했던 키안이 아니었다. 그보다 한결 더 의젓해져 있었다. 다이닝룸으로 들어선 키안은 예쁘게 땋은 내 머리를 보며 점잖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머리를 땋으셔서 그런지 더욱 아름다워 보여요.”
나는 그 말이 ‘공작님이 오신다고 해서 땋으신 거죠?’로 들려서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머리? 그냥 스쳐 가는 바람도 따스한 봄이잖아. 그래서 땋아 본 거였어.”
“앞으로도 종종 땋아주세요. 저도 어머님 땋은 머리를 보고 싶으니까요.”
“우리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니 자주 땋아야겠는데?”
“참, 어머니. 공작님은 언제 도착하신다고 했죠?”
그때, 비카가 기지개를 피며 들어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오늘 오후쯤이요.”
“그렇군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키안도 조금은 기대하는 눈치였다. 자그마치 3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그동안 키안도 시카르의 소식을 궁금했던 모양이다. 비카는 레몬을 들어 고기 위로 뿌리고 그 향을 맡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도련님. 공작이 온다니 내심 기대돼서 그러지?”
수프를 먹기 위해 스푼을 들던 키안은 기겁하는 얼굴로 수저를 꽉 쥐며 고함쳤다.
“무, 무슨 소리예요!”
“뭐, 어때서 그래. 공작이 재수 없긴 해도 보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도련님. 안 그래?”
3년이란 세월이 길면 길다지만, 이들의 관계는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커버린 키안이 비카에게 더 이상 사탕을 물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대신 정령술을 쓰기 시작했다. 키안은 비카가 놀린 것을 복수하듯 비카가 잘 먹고 있는 고기에 불을 질렀다. 고기를 썰어 먹기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들던 비카는 갑자기 고기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자, 금방 범인을 알아차린 듯 키안을 노려보았다.
“도련님. 이게 무슨 식사 예절이죠?”
키안은 베시시 웃으며 빵을 입에 물었다.
“고기가 덜 익은 것 같아서요.”
명백한 시비였다. 하녀들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접시를 들고 갈 수도 없고, 비카가 식사 중인데 물을 뿌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대로 가만히 둘 수도 없어서 어쩔 줄 몰라 우왕 좌왕이였다. 그러자 비카는 쟁반 뚜껑을 접시 위로 덮음으로써 사태를 무마시켰다. 물론 매일 식사 분위기가 이렇진 않았다. 아주 가끔 비카가 키안을 놀릴 때 정도라던가, 비카가 내게 말실수를 했을 때 정도였다. 덕분에 오전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오늘은 오후에 공작저를 방문하기로 돼 있던 사람들에게 모두 방문을 미룰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돌렸다. 그러고 나니, 정말 이제는 시카르가 온다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3년 만에 찾는 공작저인데 시카르가 도착하기 전에 그를 환영하는 현수막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는 하인들을 시켜 공작저를 꾸미기 시작했다. ‘축 귀환’이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공작저 정문에 걸어두는 한편, 특별한 날을 위한 거위 요리를 준비했다. 이 봄날에 말을 타고 오느라 땀을 흘렸을 시카르를 위해 곧장 씻을 수 있게 목욕물도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키안과 같이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거실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기다리는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져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키안은 점잖게 다가와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어머니. 많이 긴장돼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런지 모르게 조금 초조하네. 미안. 시끄러웠지?”
“전혀요. 그냥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져서요. 공작님을 오랜만에 만난다 생각하니 저도 조금 긴장되거든요.”
“이런 우리 키안도 긴장했었구나.”
“공작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게 어머니를 당부한 게 생각나서요. 제가 기대에 저버리지 않게 잘해내 왔는지도 모르겠기도 해서…….”
“오! 키안!”
나는 키안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당연히 항상 잘해주었단다. 어느새 너무나 듬직하고 의젓한 소년이 됐는걸.”
“아직 멀었는 걸요.”
3년 전이었다면 ‘정말이요?! 너무 기뻐요! 어머니!’라고 말하며 마냥 좋아했을 키안이었지만, 이제는 칭찬을 해도 겸손을 보이고 있었다. 얼마나 의젓한지 하고 듬직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이었다. 그런데 이거, 키안에게 미안해서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방금 키안이 내게 보인 모습들을 시카르가 다 보게 될 텐데. 키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제 모습을 시카르에게 들키기 싫어서라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 3년 전에 두 사람이 잘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별개로 둘 사이에 아직은 어떤 벽이 있긴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시카르는 지난 3년 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다 알게 될 테지만,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잖아? 이거 왠지 조금 억울한데? 키안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자니, 밖에서 요란한 갈채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보니 시카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오는 게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 기개와 풍채에는 위용이 서려 있었다.
‘돌아왔구나!’
나는 급하게 달려나가려던 걸 멈추고 키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이제 막 현관을 나오자 시카르가 말에서 뛰어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시카르는 따스한 봄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우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시카르는 안기라는 듯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랜만이군.”
나와 키안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시카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그를 안았다. 키안은 어색한지 손은 뻗지 않고 몸만 시카르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어쨌든, 우리 세 식구는 오랜만에 재회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러자 하인들을 비롯한 병사들의 외침이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공작님이 돌아오셨다!”
“공작님께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셨다!”
“시카르 블레이크 만세! 만세!”
고개를 들자, 병사들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듀리온이었다. 내가 듀리온을 향해 손을 조금 흔들어 보이자 그는 미소 지으며 내게 묵례를 올렸다. 나는 시카르의 넓은 가슴에 안며 잔잔하게 웃었다.
‘모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때 또다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와 고개를 들어보니 수레 마차 여러대가 한 번에 들어오고 있었다.
“시카르? 저게 다 뭐야?”
“로즈마리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가져왔지.”
자세히 보니 수레 마차 위에는 로즈마리가 가득 피어 있었다. 이걸 아직 기억할 줄은 몰랐던 탓에 조금은 감동이었다. *** 시카르를 환영하기 위해 준비한 것 중에서도 목욕물을 준비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했던 말이 목욕물을 받아 놓으라는 말이었으니까.
“목욕물을 미리 준비해뒀다고?”
“아무래도 목욕물을 먼저 찾을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해뒀지.”
“센스가 많이 좋아졌군.”
“넌 말투가 다시 돌아왔군.”
기껏 말투를 조금 고쳐놓았나 싶었더니 출정을 다녀와서는 다시 그대로였다. 물론 그곳에서 거친 병사들을 다루고 오다 보니 말투가 차가운 게 이상할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만 같았다. 씻고 나온 시카르는 예상대로 내 손을 먼저 잡고 내 기억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봐. 정말 다시 초기화된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음. 헤르시아와 많이 친해졌군. 그녀는 길리언의 사촌인데 굳이 친하게 어울려 다닐 필요가 있나?”
길리언과는 별개로 헤르시아는 착하니……. 내 해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카르는 다음 기억을 읽어 내려가며 말했다.
“레이독스와는 적정선을 잘 유지하고 있군. 하지만 왕래가 너무 잦잖아? 이건 또, 뭐지? 편지를 쓰려다 말았다를 반복한 것 같은데……. 편지를 쓰고 싶으면 쓰면 될 것을 왜 그랬지?”
아. 그래. 그랬지. 저땐 미처 내 기억을 그가 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열심히 편지를 썼다 지웠다를 했었지. 이거 점점 벌거벗겨지고 있는 기분인데. 나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해주었다.
“넘어가.”
오랜만이라 해도, 시카르는 여전히 내 말을 잘 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곧장 다음 기억을 확인했다.
“내가 출정을 떠나던 날 밤…… 아주 푹 잘 잤군.”
암. 피곤해서 푹 잘 자지 않을 수가 없었지. 왜, 좀 서운한가? 아니나 다를까 시카르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조금은 서운한 기색이었다. 잠시 동안 그의 입술이 비죽이 나왔으니까. 그는 기억을 모두 읽은 듯 내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없이도 잘 지낸 것 같군. 공작저도 잘 돌보고 말이지.”
“비카 님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어.”
그제야 그는 내 모습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군.”
“시간이 그만큼 흘렀으니까.”
“긴 머리도 나쁘지 않은데?”
내가 봐도 긴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머리가 짧을 때보다도 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뽐낼 수 있었고, 한 번씩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면 하녀들이 내 머리를 반짝이게 만져주었으니까. 내 긴 머리가 마음에 들어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시카르가 이내 비수를 꽂는 말을 던졌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물일곱이었던 넌 서른이 됐군. 30대.”
말로 얻어맞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흥분했다.
“네가 출정 가 있는 동안 공작저에서 20대를 다 보내서 그래. 나 이제 30대니까 앞으로 어른으로 대우해. 알았어?”
시카르는 심드렁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건 좀 힘들겠군. 그래 봤자, 내 눈엔 애로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