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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부자의 계략 (2) (78/197)

78화. 부자의 계략 (2)2022.02.28.

나를 애로 보는 작자가 이내 배가 고프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금세 다시 다이닝룸으로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듀리온도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는 냅킨을 목에 두르고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쥐며 대형견처럼 헥헥거렸다.

16549788898672.png“제대로 된 식사가 대체 얼마만인지. 이날만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식사에 대한 듀리온의 벅찬 기대에 화답하는 이가 없었기에 내가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16549788898678.png“거위요리를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16549788898672.png“어둠의 땅에서 말린 고기만 먹다 보니 지금은 제대로 된 고기를 먹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귀한 거위 요리까지 준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님.”

듀리온은 나에게 하트라도 날릴 기세로 사랑이 충만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는 한번 웃어 주고는 곧장 시선을 피해 테이블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요리가 나오자마자 듀리온이 고기와 사랑에 빠진 덕분에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릴 수 있었다. 말린 고기만을 먹고 지낸 건 시카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바로 점심때까지만 해도 먹었던 음식을 먹는다는 듯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 듀리온과는 상반되게 매우 차분했다. 반면, 듀리온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있었다.

16549788898687.png“듀리온. 식사 예절 좀 지켜. 누가 용병 출신 아니랄까 봐. 게걸스럽게좀 먹지 마! 좀 차분히 식사할 수는 없어? 네 음식 먹는 소리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야!”

하지만, 듀리온은 비카의 말 따위는 전혀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식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카는 피곤한 표정으로 식탁에서 일어나려다 시카르의 질문에 다시 자리를 지켰다.

16549788898691.png“비카. 독의 꽃을 가지고 있나?”

아무래도 왕후가 내게 주었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16549788898687.png“아직 가지고 있어 ”

16549788898691.png“내 서재에 갖다 놓도록 해라.”

16549788898687.png“알았어. 더 할 말 없지?”

16549788898691.png“그런 것 같군.”

비카는 심드렁한 얼굴로 듀리온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788898687.png“도저히 저 괴물과 겸상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식사를 마치겠습니다.”

비카는 듀리온에게 들으라는 듯 듀리온을 향해 얼굴을 내밀며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식사에만 집중하느라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시카르와 키안 부자는 조금 친해진 듯하더니 다시 서먹한 모습이어서 앞으로가 근심스러웠지만, 다행히 시카르가 먼저 키안에게 말을 붙였다.

16549788898691.png“그동안 정령술을 꽤 익혔나 보군.”

키안은 시카르를 힐끔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16549788926917.png“지금 공작님 팔을 녹일 정도로는 익혔죠.”

이게 무슨 대화들이지 싶었던 나는, 지금 키안이 조용히 시카르의 얼어붙은 팔을 녹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키안이 조용히 있는 듯했지만, 시카르의 팔이 얼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녹여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카르가 먼저 말을 붙인 건 줄 알았는데, 키안이 먼저 시카르의 상태를 파악하고 치유중이었던 것이구나. 시카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 거렸다.

16549788898691.png“정말 많이 늘었군.”

키안은 무심하게 포크로 콩을 찍으며 시카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6549788926917.png“아직 우리의 약속도 유효하겠죠?”

약속이라니?! 두 사람이 무슨 약속을 한 게 있었나? 시카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키안을 보며 말했다.

16549788898691.png“물론이지.”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카르가 걸린 저주의 발현이 원작처럼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팔이지만, 나중엔 온몸 곳곳에 나타나게 된다. 원작에서 그 저주의 발현 때문에 키안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토록 저주를 풀기 위해 사방으로 해제자를 찾아다녔다. 길리언은 시카르를 통제하기 위해 차후에 키안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키안이 시카르의 저주를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주가 사라진 시카르는 통제할 수가 없었기에 길리언은 시카르에게 키안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발현은 더더욱 자주 일어날 것이다. 키안이 곁에 있긴 하지만, 베로니아를 아직 찾지도 못한 데다 그 고통이 만만치 않았기에 시카르도 내심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키안이 완전히 시카르의 얼어붙은 팔을 녹인 듯 시카르는 몇 번 움직거리더니 이내 뻐근한 듯 팔을 비틀었다.

16549788898691.png“이제 괜찮은 것 같군.”

16549788926917.png“잘됐네요.”

16549788898691.png“실력이 많이 좋아졌군.”

16549788926917.png“제가 많이 자랐으니까요.”

두 사람은 신경전이라도 하듯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니었나? 분명히 대신전에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낼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동안의 시간의 간극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를 보며 암묵적인 경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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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안은 식사를 끝낸 시카르를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커다란 장막에 가려진 듯 여는 것을 시도 조차 못 했던 그 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덧 10살이 된 키안에게는 더는 이 장막이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카르는 무슨 일이냐는 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돌아서 물었다.

16549788898691.png“난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키안은 다이닝룸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도도한 자세로 팔짱을 끼며 시카르의 허락도 없이 소파에 앉았다.

16549788926917.png“제가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이제 겨우 10살이 된 주제에 마치 어른인냥 구는 키안이 우습다는 듯 시카르는 맞은 편으로 가서 앉았다.

16549788898691.png“우리 약속이 아직 유효하냐고 물었던 건 너인 거 같은데, 왜 이렇게 툴툴거리는 거지? 분명히 유라 앞에서는 다정하게 지내기로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랬다. 하지만, 출정을 가 있는 동안 편지 몇 통 없었던 공작 때문에 제 어머니인 유라가 매일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동안,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키안은 다시금 공작에게 서운한 마음만 커져 버렸다.

16549788926917.png‘내 어머니가 당신의 편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키안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할 수가 없었다. 대신 키안은 냉정한 눈으로 시카르를 보며 말했다.

16549788926917.png“3년 동안 서신을 딱 두 번 보내셨더군요. 출정을 나가실 때 한 번, 귀환하기 전에 한 번이요.”

16549788898691.png“그랬었지. 그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안 됐노라고, 당신이 말하는 가정을 지키는 건 강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키안은 말하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기만 했다.

16549788926917.png“하지만 어머니를 잘 챙기셨어야죠.”

16549788898691.png“그 먼 곳에서 어떻게 챙기라는 거지?”

16549788926917.png“편지를 하는 것도 가족을 챙기는 것과 다를바 없어요.”

16549788898691.png“편지는 아무 힘이 없다. 그저 편지일 뿐이지. 그리고 전장이라는 곳은 펜팔이나 주고 받고 지낼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야.”

16549788926917.png“좋아요. 그건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건 덮어둬요. 하지만 이젠 돌아오셨으니, 이제부터는 어머니를 잘 챙겨 주세요.”

시카르는 원래도 맹랑하던 쥐방울이 조금 크니까더 맹랑해 졌다고 생각했다.

16549788898691.png“그래서 내 팔만 치료하고 내 발은 냅둔 건가?”

키안은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16549788926917.png“네. 제가 그랬잖아요. 어머니께 잘못하면 앞으로 공작님께 동상이 와도 치료해주지 않겠다고요. 그나마 팔이라도 치료해드린 건 어머니께서 공작님을 걱정하실까 봐 해드린 거예요.”

앞으로도 보이는 곳이 아니면, 치료를 해주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은, 그러니까 그것은 협박이었다. 어쨌든, 협박은 둘째 치더라도 시카르는 키안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49788898691.png“내가 뭘 못했다는 말이지?”

16549788926917.png‘당연히 편지죠.’

16549788926917.png“중요한 건 앞으로겠죠. 그래서 말인데요. 앞으로 잘해달라는 의미로 공작님이 동상에 걸리신다고 해도 풀어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다만 눈에 보이는 곳은 풀어 드릴게요.”

16549788898691.png“또, 협박하는군.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협박이라……. 골드카펫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오자마자 협박부터 받을 줄은 몰랐군.?”

16549788926917.png‘그럼 편지를 잘 보내시지 그랬어요.’

하지만 시카르는 편지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 출정을 가기 전에 키안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잘 마무리 지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돌아오니 다시 원점으로 흘러간 상황을 보며 그저 웃음이 날 뿐이었다. 시카르가 키안과 잘 지내려고 한 것은 비단, 저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저주가 발현되면, 불편하고 종종 고통이 따르기도 하지만, 이미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시카르가 키안과 잘 지내려고 했던 까닭은 유라 때문이 컸다. 툭하면 키안을 보고 우는 유라를 보며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사자새끼를 키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었다.

16549788926917.png“곧 가족의 날이 온다는 걸 알고 계시죠?”

16549788898691.png“이제 봄이니까 곧 가족의 날이 오겠지. 근데 그 얘긴 왜 하는 거지?”

키안은 자신은 전혀 생각이 없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16549788926917.png“제가 가족의 날에 카네이션을 드릴 거예요. 제가 직접 키운 거죠.”

16549788898691.png“카네이션이라…….”

그제야 시카르는 키안이 유라에게 줄 거라며 직접 카네이션을 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16549788898691.png“그 카네이션을 잘 키웠나 보군.”

초지일관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키안은 유라의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16549788926917.png“네.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셨죠.”

잠시 미소 짓던 키안은 다시 표정을 삼엄하게 굳히며 말했다.

16549788926917.png“어쨌든 어머니께서 그 카네이션을 공작님께도 드리라고 했어요.”

16549788898691.png“그래?”

유라라면 그렇게 했을 테지.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88898691.png“그랬군. 잘 받도록 하지.”

16549788926917.png“그냥 잘 받으면 안 되죠.”

16549788898691.png“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16549788926917.png“제가 이 서재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어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공작님께서 카네이션을 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16549788898691.png“왜지?”

16549788926917.png“어머니께서는 공작님께서 카네이션을 받고 기뻐 하실 거라고 믿고 계시니까요.”

시카르는 그 순진무구한 생각에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긁적거렸다.

16549788898691.png“카네이션을 보고 기뻐한다라……. 유라는 카네이션을 받고 매우 기뻐했겠지.”

그때의 일이 기억이 나는 듯 심드렁하던 키안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16549788926917.png“네.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니까요.”

16549788898691.png“감동의 눈물도 흘렸을 테고.”

어떻게 알았냐는 듯 키안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16549788926917.png“맞아요! 어머니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입이 귀에 걸리시게 활짝 웃으시며 눈물도 조금 흘리셨어요.”

키안은 그때를 생각하니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짓다가, 지금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며 다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16549788926917.png“어쨌든 어머니께서 기뻐하셔서 어머니는 공작님도 그렇게 기뻐하길 바라고 계세요.”

16549788898691.png“정말 많은 걸 바라는군.”

16549788926917.png“그러니, 제 요청은 이거예요. 제게 카네이션을 받을 때 반드시 기뻐하며 웃으실 것. 반드시 어머니의 기분이 좋아지게 해드리세요. 안 그러면, 다음에는 손가락 하나도 동상을 풀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시카르는 이런 쥐방울 녀석에게 말도 협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는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16549788898691.png“좋아. 약속하지.”

16549788926917.png“그럼 우리 새끼손가락 걸어요.”

16549788898691.png‘새끼 손가락이라니. 이제 어른이 된 줄 알았더니 아직 애군.’

시카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키안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키안은 엄지 손가락 도장을 꾹 찍으며 말했다.

16549788926917.png“그리고, 카네이션을 받는 날, 한 가지 더, 해줄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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