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부자의 계략 (4)2022.03.07.
음. 뭘까. 이런 반응은? 시카르가 정말 머리를 다쳤거나 미, 미친 건 아니겠지……? 기껏해야 ‘잘 키웠군.’ 정도로 화답할 줄 알았던 시카르가 껄껄거리며 웃으니 이상해도 너무나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럴 리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조심히 물었다.
“시카르 너 괜찮아?”
시카르는 웃음을 멈추고 본래의 평정을 찾은 듯 다시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지.”
“공작님께서 너무 기쁘셔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죠? 공작님?”
키안은 어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시카르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시카르가 그렇게 대답하며 키안을 슬쩍 노려보는 것을 보니 정말 기뻤던 모양으로 보였다. 너무 기뻐서 껄껄 웃다가 민망해서 갑자기 정색하는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하긴 기쁘겠지. 키안에게서 카네이션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시카르가 호탕하게 웃어줘서 그런지 내 기분도 훨씬 더 좋아졌다. 키안도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시카르는 키안을 보며 이를 꽉 물었다.
“정말 많이 컸군. 키안.”
저것도 나름의 애정 표현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런 식의 표현을 방관해선 안 되겠지. 나는 시카르에게 넌지시 다가가 처음처럼 속삭이며 말했다.
“말투가 좀 더 상냥했으면 좋겠는데.”
시카르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난 이제 그가 노려본다고 덜덜 떨고 무서워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젠 그렇게 노려봐도 안 먹힌다는 말이다. 나는 어서 빨리 상냥하게 말하라는 듯 그를 더욱 노려보고 눈을 부라려 주며 말했다.
“이왕이면, ‘많이 컸군’ 보다는 ‘잘 자라주었구나’라고 하는 게 좋겠어.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도 좀 쓰다듬어 주고 말이야.”
나와 잠시 눈싸움을 하던 시카르는 이내 자신이 져준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시카르는 비소를 띄고는 키안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아-주 잘 자라주었구나. 키안.”
누가 봐도 진심이 우러난다기보다는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 같았지만, 키안은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었다.
“제가 좀 컸죠.”
그런데, 방긋 웃는 모습과는 다르게 키안의 말에도 어딘가 살벌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왜 둘이 신경전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아니야 기분 탓이겠지. 둘이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었다고 했잖아.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시카르가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게. 정말 많이 컸구나. 키도 많이 자랐고 말이야.”
“공작님만큼 크고 싶으니 이제 머리는 그만 쓰다듬죠. 머리를 계속 만지면 머리 나빠진다는데.”
“네 어머니의 말로는 이게 애정 표현이라는군.”
역시 신경전이 맞는 건가?
“두 사람. 지금, 사이 좋은 거 맞는 거지?”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안이 시카르의 허리를 감싸 안자, 시카르 역시도 키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랜만에 봐서 어색해서 그런 거였어요. 어머니.”
기분 탓일까. 키안이 말을 끝낸 후 시카르가 몸을 조금 움찔거렸던 것 같았다.
“그래. 너무 오랜만이라 아직은 좀 어색해서 그런 것 같군.”
“정말 그런 거야?”
“그럼.”
“물론이죠!”
두 사람의 표정이 밝은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사이좋게 지내기로 해놓고 얼마 안 있다가 시카르가 출정을 갔으니 어색할 만도 했겠지. 시카르가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며 로즈마리를 한가득 사 온 것만 봐도 우리의 미래는 밝은 듯했으니까. 시카르는 어딘가를 주시하는 듯하더니 어색하게 웃던 얼굴을 멈추며 키안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시카르의 시선을 따라가니 비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을 받으며 다가와 말했다.
“레이독스 후작이 왔어. 그 조그만 두 소후작들도 같이.”
*** 그 조그만 소후작들이란 레이독스의 쌍둥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레이독스와 쌍둥이가 먼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레이독스와 쌍둥이는 넋이 나간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순간, 왜 저렇게 보는 거지? 하고 생각했던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시카르가 토끼 머리띠를 쓰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당황했겠지. 우리가 자연스럽게 토끼 머리띠를 벗은 탓에 시카르는 자신이 저런 걸 쓰고 있다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레이독스는 웃음을 참으며 나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시카르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님.”
“오랜만이군.”
이내 쌍둥이들도 레이독스를 따라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님.”
“많이 자랐군. 요즘도 싸우나?”
쌍둥이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레이독스를 보고 있었기에 나는 비카에게 부탁해 키안과 함께 아이들을 수련의 방으로 보냈다. 시카르는 비카가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쌍둥이들이 지난 3년간 수련의 방을 찾았더군. 거기서 검술도 익히고 말이지.”
“이젠 데스나이트에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자랐습니다.”
레이독스는 시카르를 보며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시카르는 레이독스가 자신을 보고 웃은 사실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봤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를 반가워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날 보고 잘도 웃는군.”
“공작님의 인상이 한층 더 푸근해진 것 같아서 좋아 보이셔서 웃음이 났습니다.”
“또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시카르는 사납게 말했지만,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레이독스가 웃은 것도 다 저 머리띠 때문이겠지. 나는 저 머리띠 얘기를 해줄까 말까 하다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시카르가 토끼 머리띠를 하고 나타난다면 저택의 하인들도 그가 알고 보면 얼마나 인간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예상대로 저택으로 들어서자 하인들은 모두 시카르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전에도 하인들이 시카르를 보며 입을 쩍 벌린 일이 여럿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하인들의 표정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안드레아의 놀란 표정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안드레아.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지?”
안드레아는 시카르를 향해 편안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의 밝아진 모습이 한결 좋아 보이십니다.”
안드레아의 말은 기분 좋게 들렸던 모양인지 시카르는 그녀에게만큼은 입꼬리를 슬쩍 올려주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안드레아. 차 좀 내어주지.”
“네. 공작님.”
안드레아가 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시카르는 레이독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 아내에게서 여전히 네가 준 향수 냄새가 나더군. 내 아내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고 했을 텐데. 향수는 왜 또 선물한 거지?”
그건 기념일에 예의상 선물을 주고받은 것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대신 말한다면 레이독스를 대변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심기만 더 건드릴 것이다. 그래서 난 레이독스가 잘 말할 것이라 믿고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건 아이들의 생일 때나 기념일 때 공작부인께도 드렸던 하례물입니다. 일전에도 제가 드린 향수를 잘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드린 것뿐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가 설마, 둘 사이를 질투하거나 오해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난 그저 네가 내 아내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 자체가 건방지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제 내 말뜻을 알아먹겠나?”
레이독스는 금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역시 레이독스를 믿고 맡긴 건 잘한 일이었다. 시카르는 언짢은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헛기침을 했으니까. 그때, 때마침 안드레아가 들어와 우리 앞에 차를 놓고 나갔다.
“일단 차나 들지.”
레이독스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시카르에게 예의를 표했다. 시카르는 내게도 차를 들라는 듯 한 번 쳐다봐주곤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카르는 경직된 얼굴로 찻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내…… 내가 지금까지 이…… 이,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는 줄은 모…… 몰랐군.”
음. 아무래도 시카르가 이렇게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지금껏 보아온 그의 모습 중 가장 웃긴 순간을 꼽으라면 난 아마 망설임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꼽지 않을까 한다. 시카르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띠를 벗었다. 지금 이 순간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넋 놓고 봤었던 쌍둥이들의 얼굴과 하인들과 안드레아의 표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 꽤 수치스럽다고 느끼고 있겠지.
“토끼 머리띠도 꽤 잘 어울리십니다. 공작님.”
레이독스는 빙긋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마치 그동안 벼르고 벼른 것을 한 번에 쏟아내는 말투 같아서 나는 너무 웃겼다. 하지만 레이독스는 이내 소심한 복수를 하려 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꼭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짓던 시카르는 냉소를 띄며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럼 너도 한 번 껴보지. 너도 꽤 잘 어울릴 거 같으니까.”
레이독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직되었다. 시카르는 레이독스에게 토끼 머리띠를 던지며 말했다.
“어서.”
레이독스는 머리띠를 물끄러미 보다가 낮게 말했다.
“사양하겠습니다.”
“내게 잘 어울린다고 놀려놓고 사양하겠다? 그 말은 곧 내가 수치스러워 보였다는 말이 되겠군?”
토끼 머리띠 하나를 눈앞에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 꽤 볼만했기에, 나는 이 머리띠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던져진 머리띠만 보다가 말했다.
“전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이것을 만든 사람도 제가 쓰는 걸 원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보는 내가 판단할 테니 어서 써라. 네가 이것을 쓰지 않으면 날 비웃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넌 날 비웃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설마 공작님의 말씀은 저 머리띠를 안 썼다는 이유만으로 유카나다르에 지원하고 있는 정령 트랩을 철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잘 알고 있군.”
레이독스는 새로운 국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리언의 미움을 샀다. 그래서 국왕의 충복인 정령사 라페가 유카나다르의 파멸의 정령을 푼 것이었다. 물론 원작에서 레이독스는 시카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시카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키안을 레이독스에게 맡긴 터라 소정의 광물을 받고 정령 트랩을 설치해주고 있었다. 파멸의 정령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트랩이 없다면 그것들을 제거하느라 인력도 많이 써야 했고, 무엇보다 사상자들도 그만큼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카르는 그 트랩을 철거한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카르가 결코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겨우 머리띠 하나를 안 썼다는 이유로 트랩 철거를 처결할 것도 레이독스는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영지민을 아끼는 레이독스였기에 그는 수치심에 경악 중인 사자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듯 머리띠를 손에 들었다. 토끼 머리띠를 끼고 있는 레이독스의 모습도 꽤 보기가 좋았다. 시카르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팔짱을 끼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꽤 잘 어울리는군.”
레이독스는 차마 감사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만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여길 자주 왔더군. 내 아내가 구설에라도 오르면 어쩌려고 공작저를 기웃거린 거지?”
“기우이십니다. 감히 블레이크 공작부인을 입에 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레이독스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감히 공작님을 속이려 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시카르는 불현듯 일어서 레이독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악수를 해본 지가 언제인지를 모르겠군. 악수하겠나?”
그런데, 레이독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라면 서슴없이 시카르의 손을 잡았을 레이독스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손을 잡지 않고 있었다.